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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 온 잇-11화 (11/69)

(11)============================================================

11.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 앞에 서서 예고 없이 울리는 최종익의 협박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디션 보러 다닌다며? 겁도 없이]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직전인 이 순간에도 신문 제목을 보면서도 낮의 그 대화를 곰곰이 되돌이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렇게 매정하게 굴 것까진 없었다고 후회하면서.

유현은 헤드라인이 보이지 않도록 신문을 반으로 곱게 접었다.

-내가 네 생각대로 사람을 죽이고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유현이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

"최종익."

-고유현 씨가 망가지는 데는 꼭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보다 나은 선택지."

취기가 가시지 않은 유현은 충동적으로 폰을 집어 들어 빠른 속도로 문자를 작성했다.

[아까 낮에 주신 제안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요.]

전송된 시각. 오전 02:05.

"뭐야, 시간 왜 이래…."

메신저에 친구로 등록하기 싫어서 고집스럽게 문자로 보낸 덕분에 취소도 불가능했다.

"아아! 고유현, 아아…!"

밤늦게까지 그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우습게 볼까. 망했다.

유현은 자괴감에 빠져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다가 어떤 진리를 깨달은 도인처럼 침착해져서는 소파에서 가만히 내려섰다.

"어차피 자고 있을 시간인데 뭐."

덜 마른 머리나 말리고 자야겠다며 들어간 것이 그날 하루의 끝이었다.

***

"안 된다며? 떨어진 거 같다며!"

호들갑을 떠는 상진에 힘겹게 눈을 떴다.

"으어어…. 형은 자기 손이 얼마나 매운지 모르죠…."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 앉는데, 상진은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걷어 보니 한참 이른 아침이었다.

"몇 시예요? 해 뜬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해 뜬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뭐가 중요해요. 나 어제 늦게 잠들…."

"잔소리 말고 이거나 봐!"

상진의 패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뒤로 뺀 유현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화면에 뜬 내용물에 초점을 맞췄다.

[단독] 마인 이유, 드라마 '캐처' 주연 발탁

유현은 멍한 상태로 그것을 반복해 읽었다.

"이거 뭐예요?"

"어젠 백퍼 떨어졌다며!"

유현은 벌떡 몸을 일으켜 폰을 낚아챘다. 만우절에 한두 번 당한 경험이 있는 유현은, 자신을 놀리려고 만들어 낸 사이트인가 의심스러워 뒤로 가기를 눌렀다가 앞으로 가기를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페이지였다.

서둘러 검색창에 고유현을 넣고 검색했다. 방금 본 기사와 다르지 않은 수많은 인터넷 기사들이 줄지어 떴다. 자신이 드라마의 주연으로 캐스팅이 확정되었다는 내용의 기사들.

…어떻게 이런 일이?

유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제가 새벽에 저지른 일을 기억해 냈다. 상진을 밀어내고 폰을 찾아 나섰다. 침대를 다 뒤집어엎고 나서야 소파에 두고 들어왔다는 게 생각이 나 소파로 달려나갔다. 소파 틈에 껴 있는 폰을 뽑아내 화면을 켰다.

잠금을 해제하자 어제 폰을 던져두기 직전의 화면 그대로였다.

[뭐가 궁금해요?]

[직접 들어야겠단 거죠]

문자를 보내고 오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연달아 도착한 문자 두 개와 그 직후에 걸려온 듯한 부재중 전화 한 통.

상진이 붙어서서 보려는 것을 막아내고 얼른 전화를 걸고 귀에 가져갔다. 그 전화마저 듣겠다고 귀를 가져다 대는 덩치를 홱 밀어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걸고서야 또 시계를 확인한 유현은, 지금이 오전 아홉 시도 되지 않은 아침이고 어쩌면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남자가 지금까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제는 절대 안 할 것처럼 해 놓고 새벽에 문자를 보내질 않나, 눈 뜨자마자 신나서 전화를 하질 않나….

또 한 번 늦은 후회를 하며 끊으려는 순간, 한참 전부터 깨어있었던 것처럼 말끔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계약금은 마음에 들어요?"

"예?"

-"아직 기사 못 봤어요?"

"아, 기사는 봤는데…."

-"일어나자마자 전화했나 봐요."

아까 끊을걸. 물이라도 마시고 전화할걸. 유현은 성급했다고 조금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잠긴 목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큼, 네, 기사를 봤어요. 캐스팅됐다는 거 보고 연락드린 거예요. 근데 방금 계약금은 무슨 말씀이신지…."

-"고유현 씨가 운이 나빠서 잃은 거, 내가 다 돌려놔 주겠다고 했잖아요. 배역 하나 정도야, 계약금 정도로 치면 될 거 같아서요."

하겠다고 결심한 건 사실이지만 자세한 얘기를 듣기도 전에 계약금이라고 하니 괜히 겁이 나 유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위약금도 있나요?"

남자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숨죽이며 기다리자 간격을 두고 답했다.

-"만나서 얘기해야겠네요. 시간이랑 장소는 문자로 알려줄게요."

뭐야, 끝이야? 유현은 뭐에 홀린 기분으로 끊긴 전화를 가만히 보다가 뒤늦게 번호를 저장했다.

"위약금은 무슨 얘기야?"

"아이, 깜짝이야! 형은 남의 집에서 발소리도 없이 내고 다녀요?"

"언제는 남의 집에서 쿵쿵댄다고 뭐라 하더니."

"기척 좀 내고 다녀요. 자는 사람 엉덩이는 그만 때리고. 엉덩이 진짜 멍든 거 아냐?"

유현이 후드려 맞은 엉덩이로 엄살을 떨며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방을 벗어났다.

"너 못 깰까 봐 그랬지! 아팠어? 한번 보자. 진짜 멍들었는지."

"보긴 뭘 봐요."

많이 아팠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며 따라 나오는 상진의 눈을 피해 한숨을 돌렸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약을 가져다줄 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아마 골이 쪼개질 듯이 아파 올 것이다. 빨리 와야 할 텐데. 태화는 체념하듯 눈을 감고 뒤통수를 소파에 기댔다.

세준은 대개 이런 식으로 항의했다. 오전 중에 들르겠다는 말을 에둘러 거절하자 보란 듯이 태화의 본가로 달려가 약을 맡겨 놓은 오늘처럼, 가족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방식으로. 그따위 약은 행동이 거부감만 키우는 걸 모르고 말이다.

♬―

태화는 뒤로 젖힌 머리를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전자음부터 발소리까지 전부 익숙지 않은 것이다.

"자고 있는데 깨운 거 아니지?"

그의 형, 태인이었다.

"어떻게 들어왔…."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 중에 태인에게 비밀번호를 넘길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을 지호의 소갈머리가 훤히 읽혔다.

"윤지호가 가르쳐줬어?"

"글쎄, 누굴까."

태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태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자식은 어디 모자란 것도 아닌데 번번이 왜…."

"너 친구 윤 서방 하나밖에 없잖아. 하나 있는 친구 욕해 봐야 도매금으로 묶이기밖에 더하나."

"윤지호라고 안 했는데."

"지호는 내가 시킨 대로 예, 아니오로 답한 죄밖에 없으니까 좀 봐주란 얘기야."

태인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왔다.

태화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태화가 안고 있는 폭주의 위험을 처음 목격하고 가족 모두가 혼비백산하는 사이에도 태인만은 침착했었다. 지호는 겁이라도 먹지 이쪽은 쫓아내려면 직접적으로 무력을 쓰는 방법밖에 없는 인간이다.

"약 전해주러 온 거면 그것만 주고 가. 쓸데없는 소리 떠들지 말고."

"간만에 보는 형님한테 앉아보란 빈 말도 안 하네."

"빈 말하면 빈 말로 안 받는 사람한텐 빈 말 안 해."

"어떻게 너 같은 놈이 내 동생일 수가 있을까. 나만 보면 형님형님 좋아 죽는 윤지호가 아니라."

동생의 푸대접에도 개의치 않고 버젓이 소파 한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태인은 지호 대신 가져온 종이가방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다.

오 년 동안 방문일을 전부 헤아려도 일주일이 채 안 되니 태인에게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새집처럼 썰렁한 집안을 시선 바쁘게 탐방하던 태인은 은근슬쩍 화두를 던졌다.

"너 결혼 안 하기로 했다며?"

종이가방에 팔을 뻗던 태화가 문득 멈추고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윤지호가 그래?"

"아, 참고로 주태영은 모르니까 안심하고."

태화의 눈썹 앞머리가 미세하게 좁아 들었다.

"윤지호는 예, 아니오로만 답했다며. 형은 무슨 수로 알게 됐는데."

"우리 막내가 뭐 하느라 급하게 자금을 만들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까 저절로 궁금해지더라고?"

교류가 없는 동안 조용히 보고를 다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심한 제 실책이었다. 태화는 혀를 차며 종이 가방을 제품으로 끄집어 당겼다.

"그래서, 결혼 안 하는 건 맞고?"

"그걸 확인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고."

"맞는데?"

종이 가방 안에서 주사기를 꺼내 한 손으로 캡을 분리하고는 다른 한 손으로 알약을 까 입에 물다 말고 바라본다. 태인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주태영도 하다 못 해 윤지호도 걔 편이지만, 나는 네 편이야."

"……."

"생각해 보면, 정말로 나쁠 거 없는 결혼이지. 유상 제약에선 네게 필요한 걸 무한히 제공해주겠다고 한 데다, 누구라도 붙어살면 두 달에 한 번꼴로 실려 가는 널 안 봐도 되니까 얼마나 좋아? 다 떠나서 조건으로만 판단한대도 결혼 상대로 썩 나쁘지 않잖아. 무려 센터장 아드님이신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네 결혼은 사실, 우리 입장에서만 나쁠 것 없는 결혼이라는 거지. 우리 모두 네 결혼을 폭탄 돌리기 정도로 여기고 있고 그걸 그쪽에서도 잘 알고 있어."

태화는 시린지 캡을 다시 씌워 두고 제 형을 응시했다.

"그런데도 그쪽에서 파혼은 무슨, 벌써 사돈이라도 된 양 호의적으로 군단 말이지. 결혼 파투날까 전전긍긍하는 건 네가 아니라 연세준이고. 좀 이상하지 않아?"

사납게 웃은 태인은 몸을 기울이며 신랄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주태영이랑 생각이 달라. 처음부터 연세준이 네 목숨을 살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네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 안 해."

흥미로운 의견이었다. 세준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줄은 알았어도 그의 공까지 모두 부정하는 결론을 낸 건 정말 의외였다.

"난 연세준이 원래 싫었어. 너도 알지?"

"……."

"나에 비하면, 넌 비교적 최근에 싫어진 거야. 걔가 널 살려줬을 때부터 싫어하기 시작한 거니까. 살려준 게 맞기나 한가? 네가 살려준 사람을 미워할 리 없잖아."

전후 사정을 모르는 태인의 의문은 합당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생명의 은인을 거부하기는커녕 없던 호감도 생겨 관계가 진전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보통의 경우가 아닌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날 살려준 건 맞아."

"……."

"살려준 게 다가 아닐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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