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2화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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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슬슬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조용한 곳에 혼자 남아서 약물을 주사하고 약기운에 기대 눈을 붙이고 싶었다. 태화는 가방에서 바이알을 꺼내 흔들며 노골적으로 성가시다는 티를 냈다.

"가 봐야지? 요새 회사 일로 바쁘다면서."

그러나 겨우 그 정도에 아랑곳할 태인이 아니었다.

"왜 하필 아이돌이야? 연세준이 신경이나 쓸까 싶은데."

태화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윤지호 진짜 못 쓰겠네….

눈치껏 태인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태인이 얻고 싶은 정보를 다 얻게 될 때까지 자의적으로 그럴 눈치를 발휘할 성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입을 열지 않으면 밝히고 싶지 않은 것까지 뒤져 댈 테니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겠지. 괴물을 감당할 사람이 없으니까 감시자라도 붙여야겠다고. 그나마 약혼이라도 올려놔서 다행이라고."

"누가 너더러 괴물이라 그랬다고 그래."

"내 결혼에 다들 그렇게 적극적인 게 그런 심리에 가깝지 않겠냐는 거야."

서운함이 조금도 비치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에 태인은 입을 다물었다.

"내 안전이 걱정되면 결혼이 아니라 차라리 날 묶어서 감금해두는 게 낫다고 봐."

"……."

"그런 의미에서 사실 결혼은 나한테 차선책도 못 돼."

두통의 정도가 더 심해졌다. 태화는 임시방편으로 눈을 내리감으며 뻑뻑한 목 뒤를 손으로 주무른다.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며칠 전 기억을 소환했다.

"듣기로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하는 게 그쪽 세계에서 보편적인 일이라던데."

욕이라도 시원하게 뱉고 싶은 눈치였지.

봉변이라도 당한 양 얼이 빠져 있다가 곧 제가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사태 파악이 된 후부터는 투자자라 참는다는 식이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리는 말을 툭툭 던지면서.

"이거 뭐… 드라마 보는 기분이네요. 그런 얼굴로 아침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말씀을 하시니까."

"그런 얼굴?"

"거만하고 재수 없는 얼굴이요."

의욕적으로 자기 피알을 하던 성실한 그 '아이돌'은 태화로부터 계약 제안을 듣자마자 안색을 바꾸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내내 심드렁했다. 만남이 있은 후 그 새벽, 오랜만의 단잠을 깨우며 도착한 문자에 안심이 되기는 고사하고 급변한 태도의 원인을 고민하느라 그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그럼 혹시 위약금도 있나요?"

다음 날 전화 목소리에 단순히 변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느새 희미하게 맺힌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태화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느릿하게 세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저를 들여다보고 있는 형을 향해 말했다.

"하필 아이돌인 게 아니라, 아이돌이라서 다행인 수준이야. 아니었으면 찾지도 못했을 테니까."

"찾다니?"

찰나였지만, 어떤 고통도 섞이지 않았던 오롯한 온기와 감촉을 떠올렸다.

"이번엔 결혼을 미루는 게 아니라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이야."

"대체 뭔 소린지는 모르겠다만, 미리 말해줘서 감사하네."

"형은 쭉 모른 척해. 괜히 나서서 일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태화는 무슨 말이 더 붙을세라 "이제 가." 하고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

"안 가?"

태인은 제가 줄 수 있는 도움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조금 더 뭉그적댔다간 어느 운 나빴던 때처럼 벽에 콱 처박히지 싶었다. 태인은 순순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어차피 들을 말은 전부 들어 낸 후라 마음은 가벼웠다.

"간다."

"안 나가."

"바라지도 않았어."

태인은 몇 걸음 걸어 나가다 우뚝 멈춰서서 뒤를 돌았다. 주사기로 작은 유리병에서 약물을 뽑아내던 태화는 제 형의 미적거림에 고개를 쳐들며 이번엔 또 뭐냐는 듯 눈썹을 구겼다.

"아… 네 약혼자가 주태영을 제대로 포섭한 모양이야."

***

"어서 와요. 반가워요. 유정림이에요."

유 작가가 '대본 리딩 전에 작가 권한으로 한 번은 꼭 만나야겠다'며 요청해서 만든 자리였다.

"아…. 안녕하세요. 고유현입니다."

순간 유현은 자리를 잘못 찾았나 했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동안인 걸 감안해서 많게 봐줘도 삼십 대 중반. 제 나이로 보자면 서른이나 이십 대 후반까지로도 보였다. 누군가 보고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들었어요? 내가 유현 씨 캐스팅하자고 감독님 엄청 졸랐는데."

"……."

"유현 씨는 로맨스 드라마라서 기피했다죠?"

앉자마자 바짝바짝 타는 목에 물부터 콸콸 들이부었던 유현이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감독님이 괘씸해서 혼 좀 나보라고 보내신 건가?

캐스팅 고사한 건에 관해서라면 유현은 할 말이 없었다. 유정림 작가의 말이 사실이니까. 그때의 유현은 모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기회가 많았고, 이 드라마에 출연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유 작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유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탓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 기죽지 말구요. 혼내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유현 씨가 러브씬 때문에 출연 고사하는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스토리를 바꿨을 거예요."

유현이 눈을 크게 떴다. 스토리를 바꿀 정도로 캐스팅하고 싶어 했을 줄은….

"어…. 작가님께서 절 염두에 두신 이유가…."

"백현수 감독님한테 못 들었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 작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액션이죠. 액션 드라마잖아요."

전혀 예상 밖의 이유였다. 작가는 웃으며 덧붙였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삼사 년쯤 되었을 거예요. 어느 날 심심해서 TV 채널을 마악 돌리다가, 우연히 유현 씨를 봤어요. 서바이벌 예능이었는데. 회차마다 룰이 달라지긴 했지만, 포맷은 연예인끼리 팀을 짜서 팀 대항을 하는 거였죠."

유현은 듣자마자 무슨 프로그램을 가리키는지 알았다. '올-라운더'. 격렬한 운동이 주된 미션이라 출연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잦아 현재는 폐지되었지만, 방영하는 동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예능으로, 유현 개인적으로도 애착이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화면을 오래 보면 눈이 피곤해서 TV를 오래 보지 못하는데, 유현 씨 나오는 편은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봤어요. 가끔은 두통약을 털어 넣고서라도요. 그리고 그 예능에서 더 이상 유현 씨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음먹었죠. 내 드라마에 꼭 출연시키겠다고."

올-라운더는 바닥을 치던 마인과 유현의 인지도를 단박에 끌어 올려주고, 수익이 전혀 나지 않는 상황에서 팀 활동이 지속되게 해준 고마운 예능이었다. 실제로 팬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듣는 전형적인 고백 중 하나가 '이전엔 관심도 없었는데 올라운더를 보다가 멋있어서 마인에 입덕했다'는 얘기였다.

'아이돌치고 잘하는 정도가 아니니 아이돌 육상 예능이나 아이돌 스포츠 예능에는 출연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의 밈이 될 정도로 유현의 운동 신경은 알아주는 것이기는 했다.

처음 섭외되었을 당시 '올-라운더' 프로그램 자체도 정규 편성을 받기 전의 파일럿 예능이었으나, 유현의 활약으로 대대적으로 매스컴에 타면서 정규 편성이 확정되었고, 정규 편성 후 올-라운더에 고정 패널로 출연할 때도, 예능이 아니라 선수촌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었었다. 프로그램을 하면서 얻은 별명도 가장 센 패라는 의미의 '조커'였다.

그렇지만 그게 캐스팅의 결정적인 이유일 줄이야. 역시 열심히 살고 볼 일이었다. 기쁜 한편으로는 다른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저, 작가님. 근데 액션 때문이면, 저 말고도 액션 잘하는 분들이 많지 않나요?"

"잘하는 분들 누구? 유현 씨만큼 어리고 잘생긴 사람 있어요? 있으면 말해봐요."

"어…."

유현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냅다 숙이고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자기애 가득할 것 같은 사람이 보이는 어수룩한 반응에 유 작가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림은 웃음을 갈무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만나자고 부른 거, 작품 설명을 해주고 싶어서예요. 알고 연기하는 거랑 모르고 연기하는 거랑 다를 거 같아서."

"네."

"이번에 쓰는 드라마, 내 친구 이야기예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거고, 아마 많이 논란이 될 거라고 예상해요. 백현수 감독님이랑 난, 마지막 회차까지 무사히 방영되기만 해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아, 그럼 친구분이 자문을 맡으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예요."

정림은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엔 몰랐다. 센터도, 에스퍼도, 가이드도. 뭘 하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 존재조차 몰랐다. 이능력이라는 건 가끔 해외 토픽 영상으로 만나는 특이한 기현상에 불과했고, 좀처럼 접할 기회 없는 영역이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것 같던 그 친구는 정림에게 그 특별한 이야기를 매일 조금씩 들려주었다.

"누군가에게 죽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누군가의 멍청한 짓을 보고 싶지 않아도 계속 봐야 하거든."

"멍청한 짓?"

"살고 싶어서 목숨을 거는 짓."

"널 지키려고 했을 뿐이잖아."

"그럼 살았어야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끝에는, 아마도 목숨을 잃은 친구의 연인이 등장했다. 친구는 한겨울 성냥팔이 소녀처럼, 이야기를 켤 때마다 잠깐 행복하고 오래 슬퍼했다.

"가문 땅에 내리는 소나기, 어둠 속의 한 줄기 빛? 로맨틱한데. 그만큼 네가 특별하다는 거잖아."

"그것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너무 미미해서 결국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거야."

"어쨌든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준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건 그냥 희망이 아니야. 헛된 희망이지."

친구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매일 조금씩 죽어갔다.

"서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후회해?"

"엄청. 날 사랑한댔거든. 살게 해서, 살고 싶게 해서."

"……."

"그래서 난 이제 살고 싶지가 않아."

친구가 떠나고 정림은 잊기로 했다. 들었던 이야기 모두. 친구의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친구가 남긴 슬픔 때문에 자못 고통스러웠다.

그런 정림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기로 결심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어느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알러지가 있어서 못 기르신다고…. 아, 저와 비슷한 처지시네요. 그래서 전 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존재만으로도 구원이 되는 사랑이 있잖아요."

유현에게는 예능을 보고 섭외하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니었다. 그 심야 라디오 때문이었다. TV를 시청하기보다 라디오를 더 많이 듣는 정림은 유현이 진행한 그 회차의 라디오를 저장해두고 듣고 또 들었다. 유현이 드라마에 출연해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꿈꾸게 된 게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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