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5화 (15/69)

(15)============================================================

15.

정신을 차리니, 그 모든 불행이 뭉쳐 제 삶의 새로운 방향이 되고 있었다. 폭주의 위험성은 있지만 에스퍼로서의 능력은 사라져 센터에서 활동할 수 없으며, 타인과의 접촉이 불가능해 가이딩 약물만이 유험한 상태. 이것이 태화를 원치 않는 결혼으로 이끌었다.

필연적인 서사를 부여받을 정도로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제 삶에서 몇 남지 않은 선택의 순간을 신중하게 활용해야 했다.

세준과의 결혼 생활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평화롭지 않을 것이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한 결혼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이런 상황에서 신체 접촉이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예외성만으로도, 유현은 꽤 적절한 타개책이 될 수 있었다. 때마침 곤경에 처해 있던 덕택에 손쉽게 그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 터.

그런 의미에서 그가 택한 '고유현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이란, 명분도 좋고 부르기에도 그럴싸했다.

웬일로 일이 제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해, 앞으로 정립해 나갈 관계를 만만하게 본 것이 사실이었다. 유현의 손목에 있는 네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팔목에 그거, 네임이에요?"

유현은 당황한 듯 눈을 굴렸고 태화는 그 반응에 오히려 이미 가려져 보이지 않는 손목을 주시했다.

분명히 글자였다. 흔히들 말하는 러브 타투, 그러니까 각인 네임이거나 의미가 있어 새긴 타투. 둘 중 하나였다. 아이돌이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타투여야 하겠지만, 들킨 직후 타투라고 둘러댈 정신머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각인 네임일 확률이 높았다.

7월, SNS에 일파만파 퍼져 문제가 되었던 유현의 손과 네임. 태화는 보고서로 읽었던 내용이 생각이 나 불쑥 내뱉었다.

"뉴스가 난 건 봤어요. 그래도 네이머인 건 루머인 줄 알았는데."

"……문제가 되나요?"

네임이 있다고 해서 계약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다만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라면, 자신이 행운이라고 여긴 유현의 처지가 전부 제가 판 함정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을 두고 협상이라고 표현하는 것, 태화는 그런 것을 혐오했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서까지 이용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불행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교활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굵은 철심이 관통하듯 날카롭게 골이 울렸다. 태화는 회상을 관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진통제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야 여느 날과 같았지만 평소에 비해 컨디션이 현저히 나빴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눈붙일 심산으로 수면제와 진통제를 복용하고 누웠지만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아침이었다. 깜깜한 밤중에 들어갔으니 몇 시간 동안이나 뒤척인 것이었다.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을 끌어안고.

의식적으로 끊어낸 생각은 그렇게 또 제멋대로 이어졌다.

"정 마음에 안 드시면 아직 계약서에 사인은 안 한 상태니까…."

연예인들은 네임의 유무를 밝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니, 유현이 대답을 꺼리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

-나한테 약을 훔치러 가자고 해요, 차라리. 같이 하는 거면 그편이 훨씬 나으니까.

아니, 실은 이해가 안 됐다. 우습게도 자신이 팔목에서 네임을 발견하고 그에게 느낀 감정은 부정할 수 없이 선명한 배신감이었다. 대체 왜? 고유현에 대해서 뭐 얼마나 안다고.

쨍그랑―

진통제를 꺼내 입술로 물던 태화는 뇌를 파고드는 고통에 물잔을 놓치고 말았다. 새하얗게 날아간 시야가 돌아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의 발 주변으로 채 삼키지 못한 알약과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태화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통증의 정도가 심상치 않았다. 만성이 된 두통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가이딩이 고갈되어 일어나는 폭주의 전조처럼 악독했다.

그래, 오늘내일 중이겠다 싶었지.

발바닥에 유리가 박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태화야! 주태화, 너 피, 피!"

막 집안으로 들어오던 지호는 그 광경을 보곤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태화는 주저앉아 제 양손으로 두 귀를 꽉 틀어막았다.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온갖 소음이 천둥처럼 울리는 귀 안으로 삐이 이명이 울린다.

"야, 괜찮아? 아니 이거 발 왜 이래? 무슨 일이야?"

피투성이가 된 발바닥을 본 지호는 경악하며 저도 모르게 발목에 손을 올렸다. 지호의 손이 닿자마자 불에 덴 듯 순식간에 피부 위로 번지는 열통에 태화는 저도 모르게 팔을 움직인다.

"커헉, 태화, 목, 목…."

쾅―! 지호는 어찌해볼 틈도 없이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한참 동안 제 목을 붙잡고 컥컥거렸다.

태화는 이런 존재를 사건 현장에서 꽤 많이 봤다. 시민들을 위협하고 공격하고 끝내 자폭하고 마는 에스퍼들. 위험인물, 소위 악당으로 분류되는.

누군가를 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태화는 센터를 나온 날부터 갖은 애를 썼다. 영웅은 될 수 없을지언정 악당은 되지 말자고. 외로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혼자만의 공간에 처박혀서, 원래부터 제게 주어진 것이라 미처 피할 수도 없었다고 체념하면서.

이대로 폭주한다면 그간의 인내가 싸그리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태화는 유리 조각이 박힌 발바닥을 딛고 절뚝거리며 빠르게 주방을 벗어났다. 사물의 형태조차 가늠하기 힘든 암실을 가로질러 침대 옆에 위치한 자그만 수납장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가이딩 약, 가이딩 약, 빨리 아무거나….

지호는 아마도 부러진 듯한 팔을 멀쩡한 쪽의 팔로 지탱하며 침실 문가에 섰다. 거실에서 방 안으로 흘러드는 미약한 빛에 의지해 태화가 하는 양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찰나에 졸린 목이 부어 침을 삼키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만, 무섭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러다 태화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제가 신고를 해야 했으니까.

태화는 잘 보이지도 않는 서랍을 뒤져 용케 하나 남아 있던 비상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캡슐 제형의 가이딩 약물은 효과가 일시적인 만큼 그 목적이 일반 가이딩 약물과는 상이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제되지 않은 다량의 가이딩이 흡수되며 쇼크를 유발했다.

감각기관이 하나둘 스위치를 내리듯 점점 무뎌지고 서서히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기우뚱하던 몸이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자 그제야 멀지 않은 곳에서 지호가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온다.

"주태화!"

시끄러워…. 태화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

한동안 잠잠하더라니.

태화는 네임 스카로 더럽혀진 팔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운명을 거부한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 같은 것일까. 덩굴 같기도 하고 전광 같기도 한 흑색의 선들이 굵은 팔뚝 위를 뱀처럼 휘감고 있다. 방황하는 시선에, 뇌는 조건 반사처럼 전신에 끔찍하게 퍼지던 통증을 복기하고, 전기 충격이라도 받는 것처럼 저절로 눈가가 떨렸다.

문이 열리는 것보다 먼저 인기척을 감지한 태화는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았다.

"깨어있었네?"

당연히 잠들어 있을 모습을 예상하고 문을 열었는지, 세준은 잠깐 멈칫했다가 금세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 내며 카트를 밀고 들어온다.

베드 근처에 다가와 태화의 팔에 연결된 카테터를 제거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약 못 받았어?"

"……."

"윤지호가 안 갖다 줬어?"

능숙한 손길로 세준이 새로운 수액을 다는 동안 태화는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다.

"왜 그렇게 봐?"

"난 네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약발이 안 들길래 네가 바꿔치기라도 한 줄 알았지."

악의 없이 건네는 말에 카트 위를 정리하던 세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태화를 돌아봤다.

"안 듣다니?"

"말 그대로야. 네가 준 약이 2주를 못 가."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럼 진작에 검사를 했어야지!"

하품을 길게 한 태화는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세준은 이대로 대화를 끝내줄 생각이 없었는지, 침대가에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본격적이었다.

"눈 떠 봐. 얘기 좀 해."

"듣고 있어. 말해."

"너 이번에도 쓰러져서 실려 왔다며."

"한두 번이야?"

"그래, 쓰러지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약도 안 듣는다니까 하는 말 아니야! 거봐, 넌 옆에서 케어해줄 사람이 필요해."

태화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슬쩍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네 짓이지?"

"주태화."

낮아지는 목소리에 태화는 "아님 말고." 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

"얘기 좀 해."

"해."

떠들든 말든 안 듣겠다는 태도에, 세준의 눈빛이 냉랭해진다. 태화의 어깨 위로 세준의 손바닥이 닿았다. 피부 위로 싸하게 통증이 퍼져서야 태화는 눈을 뜨고 세준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바라봐주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태화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어려 있던 냉기는 금세 사라지고 다정함만 남는다.

"내가 너보고 뭐 어떻게 해 달랬어? 그냥 너만 생각하라는 거잖아. 넌 아프고, 아프니까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난 내 생각 많이 해. 그러니까 너도 내 생각 말고 네 생각만 해. 그리고 손 떼. 손목 부러지기 싫으면."

끝까지 선을 긋는 말투에 세준의 눈에 가득하던 염려의 빛이 사라졌다. 세준이 입매를 예쁘게 당겨 웃었다. 원래도 다정해 보이던 인상은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주태화, 내가 너한테 애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곧 결혼하게 돼. 그러니까 그렇게 애쓸 거 없어."

태화는 여전히 제 어깨에 올라와 있는 세준의 손을 한 번, 그리고 세준의 얼굴을 한 번 봤다.

세준의 모든 것에서, 센터 소속이 아닌 태화가 알아서 몸을 사리리라 장담하는 자신만만함이 읽힌다. 공식적으로 센터 소속도 아니고 에스퍼도 아니면서 가이딩은 필요한 비정상적인 네가 감히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그 순간, 시간에 채 용해되지 못하고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검질긴 분노가 뇌를 잠식했다. 태화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불시에 팔을 뻗어 가느다란 목을 콱 틀어쥐었다.

"있잖아, 연세준."

"컥!"

"무슨 마음인지는 알 것 같아. 실험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넌 연구원이니까."

"무, 무슨…."

태화의 코앞까지 끌려온 세준은 잡힌 목부터 얼굴까지 터질 듯 붉어졌다. 제 목을 쥔 손을 뜯어내려고 세준이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할퀴자 태화의 살갗도 비정상적으로 달아올라 이제까지와 색을 달리했다. 네임이 친친 감긴 살갗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저주 같은 흑선들이 팔뚝 위로 도드라진 새파란 혈관을 따라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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