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19화 (19/69)

(19)============================================================

19.

레디, 액션.

오늘은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마주쳐 버렸고, 이대로 지나쳐 버리고 싶지만 늘 그랬듯 지나칠 수도 없다. 평소와 다르게 못 본 체하며 내디딘 걸음을 물리고 몸을 돌려 마주 본다. 마치 너라면 지나치지 못할 줄 알았다는 듯이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덤덤한 낯에, 하려던 말과 전혀 딴판인 속내가 불쑥 목구멍을 빠져나간다.

"널 좋아한 게 내 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정말로."

충혈된 눈,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 일렁이는 목소리. 눈앞의 대상이 밉고 원망스럽다. 마음껏 상처 입히고 싶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넌 쓰레기보다 못한 자식이라고, 네게 건 내 기대의 반의 반절보다 못한 한심한 사람이라고…. 네가 나를 좌절시킨 만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실망한 만큼, 너도 후회하고 아팠으면 좋겠다.

"시간을 돌려서 널 안 좋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난 꼭 그렇게 할 거야.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한 내 시간이… 아깝고 억울해."

그러나 한때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람에게라, 입술은 원망을 오롯이 내뱉지도 못한다. 고작 내던진 말은 널 좋아했다, 어쩌면 지금도 조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에 가깝다. 널 좋아해서 괴로웠고 지금도 괴롭다는 고해.

스스로가 비참해 입술을 깨문다. 단 한순간도 보답받지 못했던 마음 따위가 소중해 끝내 모질어지지도 못하는 미련이라니.

언제나 그렇듯 감정은 쉬이 절제되지 않고. 끝내 볼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소매로 닦아낸다. 우스워 보일지언정 약해 보이고 싶진 않기 때문에.

"네 말이 맞아."

"……."

"그동안의 네 시간이 아까워."

더 이상의 기대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시 돋친 말은 애써 외면한 마음의 표면에 길고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아깝다 느끼는 건 오로지 나만의 몫이어야 했다.

넌 뭐가 그리 아까웠냐고 따지고 싶다. 내가 좋아했던 그 시간이 네게 그렇게 지독한 시간이었느냐고. 넌 어쩌면 이다지도 무신경할까. 상대의 진심은 어떻게 망가지든 관심도 없는, 혼자서도 완벽한.

생판 모르는 남도 이렇게 쉽게 인정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젖은 눈을 들어 그 야박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뒷걸음질치는 것뿐이다.

"그래."

너는 상심한 기색을 보이며 걸음을 돌리려는 앞을 막아선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나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망설임 없이 널 사랑할 거야."

"……."

"후회 없게."

"그게 무슨…."

아무렇지 않고 싶었지만 말의 호흡이 흔들린다.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허공을 정처 없이 떠돌던 시선이 위로 끌려간다. 눈을 들어 올리는 순간, 억지로 참아내던 눈물이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만다.

"……."

마침내 시선이 부딪치고 말끝이 흐려진다. 삐져나온 옆머리가 여름을 머금은 봄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린다.

눈물이라도 닦아줄 듯 손이 다가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온도의 시선도 함께. 닿을 듯 말 듯 주저하던 손은 끝내 볼에는 닿지 않고 흩날리는 머리칼만 귀 뒤로 넘겨준다. 닿으면 바스라지는 무언가를 만지듯 조심스럽다. 그 손길에서 무언가 달라졌음을 인지한다. 숨이 멎는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 언제나 바라왔던 순간.

"……."

싸아,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들의 소리가 둘을 둘러싼 정적을 깬다. 무너지는 결심을 다잡으며 주먹을 쥔다. 내내 네게 가 닿는 것이 무엇이든 조용히 스러지는 것을 보기만 해야 했다. 애정과 애정의 빛을 띤 모든 관심들.

"…이제 와서?"

"늦었을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네 눈에 고통이 스쳐 가는 것이 또렷하게 관찰된다. 본 적 없는 반응에 심장이 내려앉는 동시에 뒤틀린 만족감이 피어오른다. 그동안 네가 내게 받아갔던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컷!"

확성기를 거친 컷 사인이 앵글 안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긴장감을 끊어내며 튀어나오고, 곧장 "저쪽 가로등 이상하네. 저거 때문에 유리 쪽이 너무 어둡게 나오니까 조명 손 좀 볼게요. 낙엽도 너무 많이 잡히니까 그것도 좀 쓸고… 힘내서 방금 거 한 번 더 가봅시다." 하는 지시가 이어졌다.

조명까지 새로이 세팅을 해야 한다면 못 해도 이삼십 분은 걸리리라. 곧 퇴근이라 묘하게 들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퇴근을 바라는 스탭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촬영장이 조용히 소란스러워진다.

감독이 "유리는 나 좀 봐요." 하며 부르자 극 중 오유리 역할을 맡고 있는 최민아가 제 두 팔을 교차해 팔짱 끼듯 붙잡고는 총총 걸어가 감독의 곁으로 붙었다. 홀로 남은 유현은 주변을 둘러보다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유현이 살짝 빠져나오자 구석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 상진이 성큼 다가와 "차에 갈래? 왜, 대기 길어질 거 같대?" 하고 말을 붙였다.

"형."

"응?"

"나한테 그랬잖아요. 이거, 더 원, 오디션 보는 사람 나 말고 하나 더 있다고."

"으음, 그랬었나? …쓰읍,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쵸, 그랬죠."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백 감독이 너한테 뭐라고 해?"

드라마 '더 원'이 촬영에 들어간 지 한 달째. 유현은 백 감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크랭크인 이후 줄곧 스케줄 조율 문제로 메인 연출팀인 A팀이 아닌 B팀과 촬영을 해 왔고, 백 감독을 연출로 만난 건 불과 일주일 전. 총 네 번의 촬영에서 앞선 두 번은 프로모션용 촬영 영상이었으니 드라마 본 촬영은 오늘로써 두 번째인 셈이었다.

일주일간 백 감독과 네 번의 촬영을 진행한 유현의 소감은 단순했다. 독특한 감독님이시구나.

여태 했던 작품들은 모두 감독들이 세세하게 디렉팅을 주면 배우들이 연기 방향을 잡아가는 식이었다. 배우들도 분석을 하기는 하지만 작가가 기본적으로 잡아놓은 틀이란 게 있고 연출자의 의도라는 게 있으니 초반에는 감독의 디렉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 감독은 보통의 감독들과 달랐다.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며 유현을 카메라 앞에 던져두고 지켜보는 식이었다.

그 실험적인 디렉팅 앞에서 유현은 마냥 혼란스러웠다. 백 감독은 한결같이 무덤덤한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다 적당한 때에 컷 사인을 내렸고, 그의 입에서 '방금 장면은 한 번 더 가보자'는 얘기가 반복적으로 나오면 뭔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짐작하고 재빨리 원인을 분석해 내야 했다. 대사가 너무 빨랐나, 톤이 너무 떴나, 제스처가 너무 과했나….

촬영이 과하게 늘어졌다 싶을 즈음 조용히 던져지는 '오케이'로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어떤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그걸 섭섭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게 백현수 감독 고유의 디렉팅 스타일이라면, 감독이라고 모두 다 같으란 법이 없으니 이 또한 경험이 될 테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무관심에 가까운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렉팅은 오로지 유현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유현이 백 감독이 서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그들을 가만히 관찰했다. 저렇게 길게도 말씀해 주시는구나. 심각한 표정의 민아가 팔짱을 끼고 거북이처럼 목을 한껏 집어넣은 채로 백 감독의 얘기를 주로 듣고 있었다.

현시점에서 감독의 입장을 다양하게 추측해볼 수 있는데, 차별적인 태도로 귀결되는 사유는 하나인 것 같았다.

…백 감독은 마음에 안 든다, 고유현이.

상진은 저 멀리 어딘가를 초점 없이 바라보는 유현을 짤짤 흔들어 의식을 불러들였다.

"어? 백현수가 너한테 뭐라고 하냐구!"

"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뭐라고 안 하세요."

뭐라고 너무 안 하는 게 문제시지…. 유현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표정을 보니까, 아닌 게 아닌데? 뭔데?"

"그보다도. 형, 혹시 담요 있어요?"

"차에 있을걸. 왜?"

"그럼 담요 좀."

"이 날씨에 웬 담요?"

"그래서, 있어요 없어요?"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웬만해서는 겉옷도 잘 챙기지 않는 유현이 긴 팔 셔츠를 입고 담요를 찾는다니 별스러운 일이었다. 흐음, 수상한데. 상진의 눈이 의아하게 유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왜 그렇게 봐요?"

상진은 뭔가 떠오른 듯 이마를 탁 짚더니 유현에게 성큼 다가서서 홱 셔츠 깃을 뒤집어 목가를 확인했다. 유현이 깜짝 놀라 상진을 향해 팔을 퍼덕거렸다.

"아, 형! 그런 거 아니에요!"

"너 저번에 사진 찍힌 거 돌아다닌 일 때문에 대표님이 엄청 곤두서 있어. 알어? 한 번만 더 들키면 고팀 작살 내겠단다. 조심 또 조심해야지."

"들키는 건 난데, 멀쩡한 팀은 왜 작살 낸대요."

"시형이 지금 차에 있어. 불러와?"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다행이고."

"그래서 담요는요?"

수상한데…. 목덜미를 거칠게 놓아준 상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특이점을 찾다가 직접 갈 태세로 움직이는 유현을 보고선 혀를 찼다.

"있어 봐. 형이 갔다 올 테니까."

***

메이킹 영상 촬영을 맡게 된 허 피디는 혀를 찼다. 도저히 편집각이 안 나오는데?

허 피디는 프리랜서로 일할 때부터 현장감을 생생히 담아내면서도 팬들이 환장하는 포인트를 잘 캐치해 내기로 유명했다. '메이킹 보고 입덕했다, 본방보다 메이킹이 더 재밌다'는 평가를 받는 외주 메이킹 필름은 대부분 허 피디의 손을 거친 것이었을 정도로 감과 실력이 출중했는데, 그 덕분에 지난해 허 피디를 스카웃한 메이킹 제작사 Y는 드라마깨나 본다 하는 드덕들 사이에서 퀄리티 잘 뽑아내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 되었다.

원래 이 시기에 허 피디가 맡기로 했던 건 이 드라마가 아니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갑작스럽게 컨택이 온 제작사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며칠 만에 계약이 이루어졌고 허 피디는 얼떨결에 더 원의 메이킹을 맡게 된 것이었다.

부가 영상이 시청률의 지렛대가 되는 걸 보여준 허 피디였다. 내가 재밌으면 남도 재밌다는 단순한 신념 하나로도 여태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일까. 이 드라마는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쓸 만한 건 싹 담아오라는 제작사의 요청으로 빠짐없이 찍고는 있지만 별로 건질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일단, 메인 연출인 백 감독부터가 메이킹 카메라를 등한시했다. 물어물어 알아보니 백 감독은 영화를 찍을 때도 몰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메이킹 필름을 싫어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백번 양보해 메이킹 영상을 찍으며 눈칫밥 먹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한다 쳐도, 어째 배우들까지 소극적이니 영 찍을 맛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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