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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유현이 한정운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뜨고 유정림 작가가 백 감독과 크게 틀어질 뻔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요 인물 캐스팅에서 작가가 요구한 단 하나의 사항이 '고유현을 남자 주인공으로 섭외할 것'이었다는데, 감독이 그를 무시하고 애초에 유현을 한정운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꽤나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은 어려웠으나, 유정림 작가가 저를 따로 만나는 자리에서 대뜸 '가장 매력적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가장 임팩트 있는 등장씬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보면 감독이 말하는 작가의 당부가 무엇이었을지 어렴풋이 짐작은 되었다.
넌 어떻게 할래? 묻는 눈에는 기대가 없었다. 백 감독이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유현은 기가 죽었다.
"제일 걱정되는 건, 유현 씨 준비 기간이 짧았던 거거든요. 그래서―"
"감독님, 일단."
그간의 노력을 전부 헛되이 만들겠다는 선언이 나오기 직전이라 유현은 감히 감독의 말을 싹둑 자르고 나섰다. 불편한 기색의 백 감독과 불안한 눈치의 액션 감독이 각기 다른 얼굴로 유현을 보았다.
"리허설을 먼저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
유현은 훈련복 아래로 불편한 와이어 장비를 착용하고 돌아와 스탭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 함께 합을 맞춰야 할 액션 팀 스탭들 중 하나였다.
"어쩌죠? 리허설 못 하면 감독님이 씨지도 불사하겠다시는데. 저 연습한 거 다 날리게 생겼어요."
"날리기는요. 관장님이 그러셨잖습니까. 고유현 씨 얼굴이 그렇게 안 생겼으면 우리 단원 에이스였을 거라고."
"립서비스 해주시는 줄 알았죠."
"물론 그런 면도 없잖아 있긴 했는데."
장비 점검차 줄을 당겨보며 덤덤하게 립서비스였음을 인정하는 민웅의 넉살에 유현이 키득거렸다.
"자, 줄은 다 됐고. 했던 대로만 하면 되니까 어려울 건 없을 거예요. 간단하잖아요. 당기면 발 굴러서 뒤로 한 바퀴 돌고 착지. 며칠 지났다고 다 까먹은 거 아니죠?"
"몇 번을 했는데 당연히 기억하…."
대답을 하며 무심코 민웅의 얼굴을 본 유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억하기로는 원래 이렇게까지 혈색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유현이 하다 말고 빤히 바라보자 줄에서 눈을 떼고 민웅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낯이 햇빛 아래서 평소와 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유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색이 나빠 보이세요."
"많이요? 그래도 오늘은 여기 오는 동안 좀 잤는데."
"잠을 못 주무셔서 그런 거예요?"
"아침이라 그런 겁니다. 오후 되면 또 괜찮아져요."
"괜찮아지는 거 맞아요?"
"그렇다고 오후까지 하자는 얘기는 아닌 거 알죠?"
액션 팀은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나와야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거의 매 회차에 액션씬이 등장하는 탓이었다. 그마저도 액션 감독 아래서 일하는 팀원들 중 몇 명이 지난 드라마 촬영 때 부상으로 빠지게 되면서 몇몇은 거의 교대도 없이 드라마에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도 듣긴 했는데, 이런저런 상황이 모여 연차가 오래된 민웅이 그 '몇몇' 중 하나인 성싶었다.
괜찮은 건가…. 유현이 다크서클이 잔뜩 낀 스탭의 눈가를 살펴보는 사이 뒤에서 백 감독과 액션 감독이 다가와 있었다. 민웅은 그 기척을 느끼고 유현으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섰다. 사인에 맞춰 와이어 줄을 당겨보기 위해서였다.
오늘 촬영은 1회 초반부의 훈련씬이었다. 유현이 맡은 캐릭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먼저 얼굴이 잘 잡히지 않는 풀샷으로 센터 최정예 에스퍼 요원으로서의 능력치를 과시하는 액션씬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다음 테이크에서, 총구를 잡고 있던 선명한 초점이 총구 뒤의 냉랭한 얼굴 쪽으로 옮겨가면, 비로소 '한정운'의 첫 등장이었다.
감독이 가장 걱정하는 장면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저기에서 여기로 달려와서… 그렇지, 그렇지!"
멀리서 달려오는 기척을 느끼고 유현은 약속된 사인에 익숙하게 날아올라 허공에서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았다.
"유현 씨! 아니지, 거기서 그렇게 하면 너무 '와라, 와라' 하면서 기다리는 것 같잖아. 조금 더 민첩하게!"
스턴트 액션을 익히는 건 춤을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모든 동작에는 모두 순서와 박자가 있었다. 그 순서와 박자에 맞춰 해내되 얼마나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자연스러워야 했다.
"어, 민웅아. 거기서 줄을 조금만 더 빨리 당기자."
"그렇게 너무 세게 발을 구르면 부자연스러울 거 같은데?"
"아니지, 민웅아! 방금처럼 너무 확 놔버리면 다치지!"
액션 감독이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을 더 매섭게 뜨고 유현과 와이어 팀의 합을 관찰하며 중간중간 조언했다. 대역을 쓰면서 바스트 샷을 따로 따지 않고 유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역 없이 쭉 롱테이크로 소화해 내기로 한 탓에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액션 스쿨에서 했던 연습과는 달리 한 동작 한 동작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서 리허설은 당초 예상보다 길어졌다.
뛰고 돌고, 뛰고 돌고. 유현은 리허설 내내 거의 기계처럼 일정한 각도와 속도로 움직였다. 백 감독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감독이 걱정한 것처럼, 언질을 받고 몇 개월에 걸쳐 준비했던 다른 배우들에 비해 트레이닝 기간이 짧은 건 사실이었으나, 그들에 비해 결코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타고난 운동 신경이 좋았고 안무 동작을 외우고 똑같이 따라 하는 연습을 십 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오히려 그들보다 사정이 수월한 편이었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금방 진도를 따라잡는 것을 본 액션 감독에게 소질이 있다 진지하게 감탄하는 말을 여러 차례 듣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러다가 멀미 때문에 대역을 쓰게 생겼는데….
어쩌면 이것이 백 감독의 큰 그림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 때쯤 촬영 준비가 끝났다는 조연출의 말이 들려왔다. 액션 감독은 유현 쪽의 와이어 줄을 조절하는 두 스탭들에게 할 말이 있는지 그들을 손으로 불러 모으며 인상을 썼다.
혼자 남겨진 유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셈이냐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백 감독이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안 쓰기엔 진짜 좀 아깝네. 일단 가보죠."
***
유현이 촬영을 하며 꾸준히 놀라고 있는 것은 드라마에서 연출하는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의외로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드라마 첫머리에 모두 픽션이며 사건과 단체, 지명 등은 실제와 무관하다는 자막이 들어가겠지만,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분명 센터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촬영할 훈련씬조차 철저히 고증된 것이라고 했다. 어떤 구역에 들어간 참여 인원 전원 누군가의 목표물이 되고, 그 각각이 주어진 무기로 움직이는 목표물을 제한 시간 내 무력화시키는 것이 규칙이며, 충격적이게도 총과 칼로 상대방을 해하는 게 허용되는 훈련이라고 했다.
총칼이 허용되는 게 기본 훈련이면 기본 아닌 훈련들은 얼마나 과격하고 험하다는 거야? 처음 그 설명을 접한 유현은 그런 극악한 살인 게임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훈련의 일종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폭력성과 모방 위험으로 훈련을 완벽히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까닭에, 드라마에서는 훈련 구역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목표물이 되는 살벌한 규칙 대신 제한된 시간 동안 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면 이기는 것으로 조정하고, 훈련 인원도 기존의 열 명에서 네 명의 인원으로 줄이고, 공격 무기도 시청자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하지 않는 형태와 길이의 칼로 바꿔서 촬영하기로 했다.
이 장면에서 유현이 선보여야 할 액션은, 설치된 조형물의 지형을 이용해 제게 달려드는 세 명의 스턴트 배우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리고 마지막에 와이어로 허공을 도는 것이었다. 연습한 대로만 한다면 문제없었다.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와이어 선을 달고서 유현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롱테이크 촬영으로 약 7분 동안 쉬지 않고 뛰어야 했다. 대본에 중력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비유가 쓰여있는 만큼, 움직임이 최대한 가벼워 보이면서도 쫓기는 사람처럼 급급해 보여서는 안 되었다.
유현은 다문 입안에서 숨이 헐떡헐떡 차올랐다. 당장 주저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하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연기를 이어갔다.
「뷰파인더 속 '한정운'은 합심해서 가장 강력한 사람을 밀어내기로 한 세 명의 합동 공격을 막아내고 조형물을 이용해 한 사람씩 유인해 근접전으로 구역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훈련장 입구 쪽에 걸린 전광판에 경과 시간과 점수 획득 등 한정운의 역대 훈련 기록이 뜬다. 이어 집계가 끝났으니 다음 순서의 훈련 참여자들에게 준비하라는 경고음이 울린다. 그때, 유유히 훈련장을 벗어나려는 한정운의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달려든다.」
유현은 어느덧 최종 관문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제 액션 감독의 사인이 뜨면 진짜 칼을 든 스턴트 배우가 유현과 마찬가지로 와이어 장비를 착용한 상태로 전속력으로 유현에게 달려올 것이다. 수없이 리허설을 했던 것처럼, 유현이 사인에 맞춰 발돋움을 하면 와이어팀에서 줄을 당길 것이고 몸이 허공에 떠오르게 된다.
이제 유현은 와이어를 이용해 고개와 등을 한껏 젖힌 채로 허공에서 크게 백 텀블링을 돌고, 상대의 뒤편에 착지한 뒤 발로 등을 차 무릎을 꿇게 만들고 총을 꺼내 머리에 겨누면 끝이었다. 아주 빠르게 이어져야 했고, 스턴트 배우도 마찬가지로 와이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중에 서로의 줄이 닿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유현은 스스로 긴장을 끌어올렸다. 정면에 선 액션 감독의 사인을 보고 도약하기 위해 발바닥에 힘을 줬지만 와이어는 꿈쩍하지 않았다.
"……."
뭐야. 아직 아닌가?
유현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고 경악하는 스태프들의 얼굴이 선명히 들어왔다. 달리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앞쪽과 위쪽 두 방향의 이중 와이어 장치를 한 스턴트 배우는 칼을 놓쳐버릴 정신도 없는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시퍼런 날을 쥐고 유현을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사인이 어긋났다.
스턴트맨이 제 의지로 멈출 수도 없는 지척이었고 이제 와 유현의 와이어를 당긴다 한들 피할 수도 없을 찰나였다. 스탭들은 목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누구 하나 소리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두 다음 장면을 예상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칼끝을 피하지 못해 봉변을 당할 배우의 모습을.
"……."
그 순간 유현은 어째서인지 바람 소리마저 귓바퀴를 예민하게 스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아주 느리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간발의 차로 몸을 비틀어 칼을 피하고 손을 뻗어 팔을 등 뒤로 꺾어 붙였다. 그리고 즉시 칼을 들이민 스턴트 배우의 옆구리에 총구를 겨눴다.
찰캉, 꺾여져 힘이 빠진 손에서 칼이 떨어져 바닥에 살벌한 소리를 냈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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