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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유현은 종이 위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빠르게 읽어 내린다.
나이가… 나보다 네 살이 많고, 키도 나보다 크고, 몸무게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 생각보다 많이 나가네? 아니, 굳 이런 것까지 알고 있어야 해?
초조함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꼬리에 불 붙은 송아지처럼 초조하게 종이를 들여다보게 된 건 순전히 바쁜 스케줄 탓이었다. 새벽 한 시에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다음 날이 촬영이 없는 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약속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약속에서 처음으로 퀴즈 시험을 보기로 했다는 것도 전부.
아침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오지 않았다면 태화의 메시지를 보지도 못한 채로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부랴부랴 챙기기 시작한 게 약속 시각에서 겨우 한 시간이 남았을 무렵이었고, 차라리 약속을 잊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언제 올 거냐고 묻는 유현의 메시지에는 야속하게도 곧 출발하겠다는 답장이 착실히도 도착했다. 이를 닦고 얼굴에 겨우 물만 묻히고 나왔지만 결코 여유롭지가 않았다. 며칠 전에 촬영 끝나고 보겠다고 던져둔 인쇄물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종이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의심을 사도 이상하지 않을 난장을 만들어두고 나서야 침대 협탁 위에 고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렇게 집에서 튀어나온 것이 삼십 분 전이었다.
유현은 혹시라도 태화가 일찍 도착할까 도어벨이 울릴 때마다 고개를 빼고 불안하게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을 틈틈이 수고스럽게 확인했다.
눈은 글자를 성실히 읽고 있지만 정작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 머리가 나쁘단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어릴 적부터 관심도에 비례해 성과의 편차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관심 있는 과목에 비해 그렇지 못한 과목은 몇 배의 시간을 들여도 성취도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어린 시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전에도 흥미가 없던 자신이 위인도 아닌 사람의 일대기가 갑자기 흥미로워질 리가 없었다.
이 사람 명의로 있는 집 주소들을… 내가 다 알아야 해? 그런 걸 줄줄 꿰고 있는 게 더 사기꾼 같고 이상한데?
자네, 우리 아들과 사귀는 사이라지. 그렇다면 정확한 키와 몸무게를 아는가. 그렇다면 집 주소는? 진지한 어조로 묻는 기업 총수의 얼굴을 상상하다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고 만 유현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혼자서 키득거리던 유현은 정수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
"얼마 안 되는데 아직 다 못 외웠나 봐요. 벼락치기 중?"
얼마나 외웠냐고 태화가 전화로 물었을 때도 제 발 저려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쳐 놓은 전적이 있었다. 그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갔냐 묻는 듯한 웃음기 서린 물음에 멋쩍어진 유현이 쥐고 있던 새것같이 깨끗한 종이 묶음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그럼 이건 뭘까…."
그러나 깨끗한 종이보다 더 숨겨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유현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죄다 밑줄에 물음표에… 이건 어지간히 안 믿겼나 봐요? '전화할 때마다 취한 사람 같던데'?"
안타깝게도 연습장은 쓰기 좋은 만큼 보기 좋게 버젓이 펼쳐진 상태였고 태화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손으로 하는 암기 습관이 남아 있어 집에서 가져온 수첩이었다.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다는 부분의 윗부분에 가볍게 낙서를 끄적여 놓기는 했다. 본인의 면전에 대고 '당신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고 알려진 것들은 모두 다 즐길 것 같이 생겨서 이 부분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말을 대놓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현이 해명을 하기 위해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였다.
"담배 피우면서 술 잘 마시게 생겨서…."
"내가 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거예요?"
"대충 잘생겼다는 뜻인데…."
"그래요, 그건 칭찬으로 받는다 치고. 그럼 여기 밑에 있는 이 그림은 뭐예요? 이 커다란 게 나고 옆에 쬐끄만 게 설마 고유현 씨예요?"
"그건 또… 어 그러니까,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고… 체감상 좀 많이 크셔서요."
암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끼적인 메모들이 당사자에게 읽히는 건 매우 곤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태화는 얼마간 흥미로운 눈으로 전후 페이지 몇 장을 더 들춰보더니 커버를 탁 덮어 유현의 쪽으로 던져주었다. 유현이 얼른 수첩을 챙겨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 메뉴는?"
"…아메리카노?"
"난 커피를 안 마셔요. 내 형제 관계는?"
"형님이 한 분… 계시다고 했었나요?"
"형과 누나가 있어요. 그 둘이 쌍둥이. 마지막으로, 내가 기르는 동물은?"
"고, 고양이? 아니, 강아지…?"
태화는 유현을 말없이 응시했다.
"고유현 씨 본인 입으로 암기력 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암기력을 운운할 자격이 사라진 유현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관심 없는 분야에서는 그 뛰어난 암기력이 잘 발휘되지 않으며, 촬영 쉬는 시간엔 대본을 보고 숙지하기에도 바쁘고, 당신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지금까지는 최선의 노력이었으며, 전화를 끊고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에 빠지니 당신에 대한 공부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라고 고백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 첫 만남은 언제인지 말해봐요."
기가 점차 수그러들던 유현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참, 절 뭘로 보고! 그건 당연히 기억하죠. 4월에, 패션쇼 끝나고 애프터 파티에서잖아요. 쿠폰 명함으로 착각해서 주고 간 날이요. 뭐, 날짜까지 말씀드려 볼까요?"
드디어 자신 있는 문항이 나와 유현이 한껏 확신에 차 대답했지만, 표정을 보니 그가 원하던 답이 아닌 건 확실했다.
"몇 장 안 되는 걸 끝까지 읽지도 않았고."
태화가 환자 상태를 진단하듯 무덤덤히 덧붙이자 유현은 웃음기를 지우며 입을 합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몇 장 안 되는 중에서도 가장 앞부분 넉 장 정도만 간신히 읽은 정도였다. 유현이 읽지 못한 뒷장들 중 어딘가에 그들의 가짜 첫 만남에 대해 적혀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안 읽고 싶어서 안 읽은 건 아니고요…."
어떡한다…. 유현이 눈을 굴리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가 궁지에 몰릴 이유가 있나. 나를 모르는 건 저 사람도 피차 같은데 말이지.
"그럼 그쪽도 한 번 맞혀 보시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 메뉴는요? 형제 관계는요? 동물은, 어떤 종류로 몇 마리 기르는데요?"
유현은 의기양양했다. 절대 맞힐 수 없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유현은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해서 건네준 적이 없었으니까.
"체중 조절 때문에 자주 마시진 않지만 생크림과 우유가 들어간 라떼를 좋아하죠? 거기에 바닐라 시럽이든 헤이즐넛 시럽이든, 단 게 들어가면 더 좋고. 형제는 두 살 터울 남동생 하나. 동물은 좋아하지만 잘 돌봐줄 자신이 없어서 기르지 않고 앞으로도 기를 생각이 없죠. 식물도 마찬가지고."
턱을 까딱이며 어디 한번 맞혀봐라, 하며 이죽대던 유현의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수상한 인물에게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몸까지 뒤로 젖히며 위아래로 훑어보자 태화가 그런 의심을 소리로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이 정도는 고유현 씨가 한 인터뷰 몇 개만 찾아봐도 나와요."
"……아."
"게다가 난 사전 조사를 꽤 많이 했다고도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저 사람과 엮일 수 있었는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계약 연애를 조건으로 드라마에 투자하기로 했다며 직접 저를 찾아온 사람이었지. 웬만한 조사로는 얻기 힘들, 최종익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이쯤 되니, 고유현 씨 기억력에 크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네?"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겠죠."
"……."
"결국 성의의 문제고."
"그건 아니고요!"
그의 신상에 큰 관심이 없었던 건 맞지만 성의 없이 계약에 임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던 유현이 바로 부정했다.
"그쪽이 시간 내서 제 인터뷰 찾아서 읽어본 거, 그거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래도 제 성의를 호도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왜 아니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한쪽 눈썹을 까딱이는 걸 보고 유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한 자세를 해 보인다.
"뭐… 바쁘다는 건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거니까, 그쪽이 바빴다 아니다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거겠지만서도…. 어쨌든 간에 전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쪽도 그걸 감안해서 저한테 이걸 준 거고. 정말 눈 붙일 시간도 없었다구요."
넌 백수니까 시간이 남아돌겠지만 난 바쁜 몸이다, 라는 말을 돌려 할 생각도 않는 당당함을 지켜보던 태화는 어이없는 웃음만 내뱉었다.
"그리고 전 매일 그쪽한테 전화도 했잖아요. 언젠 성실하다고 하더니 이젠 성의가 없어요?"
"성의 없단 말이 싫나 봐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유독 싫은 이유가 궁금해서요. 내가 계약 불이행으로 소송이라도 걸까 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젓곤, 유현은 아무 음료도 시키지 않아 비어 있는 태화 쪽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톡 쳤다.
"그보단 음료는 언제 시키시려고요? 여기 1인 1메뉴 원칙인데."
말을 돌리려는 수가 뻔히 보이는데도 태화가 한 번만 넘어가 준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유현은 그 등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어떻게 알았지.
유현은 태화가 가져온 트레이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런 데 와서 대체 저런 걸 왜 사 먹나 궁금했던, 쓸데없이 비싼 생수 한 병과 얼음 컵을 사 들고 돌아온 것이었다.
"커피는 싫어하더라도, 다른 음료를 좋아할 순 있지 않아요?"
"강한 단맛이 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아…."
쓴맛을 세상 최고의 맛으로 치는 어른이신가 보군. 단맛을 유달리 싫어하는 사람들을 종종 봤던 유현은 태화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라 판단했다. 다이어트가 숙명인 유현으로서는 부러운 입맛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시큰둥하게 들이켜며 까득까득 얼음을 씹었다.
태화는 기껏 사 온 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유현이 커피를 마시는 것만 구경하다가 여상하게 말했다.
"이렇게 확인해 보길 잘했네요. 시간이 이보다 더 촉박했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겠어요."
한심해하는 말 좀 들었다고, 면목도 없고 민망한 사람으로만 남아 있기엔 심야 통화 서비스로 태화가 심적으로 많이 편해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든 사후에 수습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게 좋죠."
"……."
"했어야만 하는 일을 한 거다. 이 정도로. 네."
유현의 헛소리를 재롱쯤으로 여기며 옅게 웃은 태화는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괴며 물었다.
"암기에 자신 있는 건 맞아요?"
"그게, 실은."
"네."
"조건부로 잘하는 편이긴 해요.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수긍이 안 되면 잘 못 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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