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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누군가 반갑게 눈인사를 하며 유현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서 뭐 해?"
남자 주인공인 김지형 역의 하영준이었다. 연극을 하다가 몇 년 전 백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린 연기파 배우로, 동료 배우뿐 아니라 스탭들 사이에서도 성격 좋기로 유명했다. 통 붙는 씬이 없어 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저 여기 구경하러 나왔어요."
"나돈데. 신기해."
"이런 곳이 이 나라에 몇 군데나 더 있다니 신기하지 않아요?"
섭외의 불확실성 때문에 중후반부 촬영분을 죄다 앞으로 당겨올 정도로 공을 들인 곳이었다. 촬영 준비가 한창인 내부를 들여다보며 느낀 건물의 첫인상은 지나치게 넓고 또 지나치게 층고가 높다는 것이었다. 휑뎅그렁한 공간인 주제에 내부의 소음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다지 웅장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범상한 건물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 건물은 전국에 몇 안 되는 합법적인 사설 가이딩 기관 중 하나라고 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드라마 촬영지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도시와 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도시와 멀지 않을 수 있는지, 따로 제한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등산객의 접근이 없을 수 있는지 의문스러운 산중이었다. 사전 답사를 한 몇을 제외하고는 버스에서 내리는 스탭들 모두 압도적인 규모에 입을 벌리고 감탄했고, 배우들과 개인 스탭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그것보다 센터가 이것보다 몇 배나 더 크다는 게 신기해. 대체 거긴 어떤 곳일까."
유현과 영준은 나란히 서서 건물의 외관을 훑었다. 벽에는 아주 작은 창문들만이 의무적으로 달려 있을 뿐이었는데,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인 곳이니 안에서 언제든 전망을 감상할 수 있게끔 통유리창을 냈으면 더 좋았겠다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나저나 진짜 괜찮은 거야?"
"뭐가요?"
"요새 사람들 만나기만 하면 한다는 얘기 있잖아."
최근 가장 핫한 이슈. 삼성동 카페 테러 사건.
"아, 그거…. 괜찮아요."
"글쎄, 넌 안 괜찮다고 말을 안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일주일 내내 인터넷에서 네 이름이 내려가질 않아서 혹시나 했다."
영준의 말대로 관심은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엄청났다. 사건 직후 센터에서 테러 행위라고 규정했고, 반드시 그 범인을 잡아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에도 이 나라에 사는 이상 모를 수가 없도록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 사건이 떠들썩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관심이 식을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있었던 유현이 센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찍는다고 알려져 생각지도 못하게 홍보 효과가 상당했다. 테러를 가지고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 하냐며 더러 욕을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피해자인 유현을 감싸주는 분위기였다.
"진짜 그랬으면 촬영도 못 나왔어요."
"그래, 나 그거 듣고 깜짝 놀랐잖아. 너 바로 그다음 날 촬영 나왔다며."
"감독님도 쉬라고 하셨는데, 왠지 꾀병 부리는 기분이라서요."
경계심이라고는 없는 유현의 대답에 영준이 쯧 혀를 찼다. 영준은 주변을 둘러보고 다들 제 갈 길 가기 바쁜 것을 확인한 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유현아…. 어쩌다 그 자리에 있었던 거야?"
"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그렇게 묻는 영준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최민아와 하영준, 주연 배우 두 명을 포함한 주조연들이 최근 연예계에서 '더 원' 출연을 이유로 보이콧을 당하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였다. 출연 결정에도 아무 타격 없이 지내고 있는 건 유현 하나인 듯싶었으나 사실상 이미 보이콧 당하고 있던 상태나 다름없어서, 그도 연예계의 미운 오리 새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영준이 이렇게 심각한 건, 그런 인과가 선명한 문제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연이어 일어나는 우연한 악재 때문이었다. 크랭크인을 2주 앞두고 사고가 나 민아의 오래된 매니저가 중상을 입은 일, 지난주 촬영 소품을 실은 탑차 두 대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 일, 사기 혐의로 피소된 소속사 사장의 허위 진술로 영준이 공범으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된 일, 며칠 전 B팀 감독이 귀갓길에 퍽치기에 당할 뻔한 일…. 구체적으로 연관 짓긴 어렵지만 촬영에 방해되는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군가의 표현으로는 '재수 더럽게 없는' 일들.
벌써 일부 스탭들 사이에서 기어이 유현에게도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라고 말이 도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근거 없는 흉흉한 소문들은 근래 촬영장 사기 저하에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까지 보탤 필요 있나. 유현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물어보시니까 무섭잖아요. 그런 거 없었어요."
"그래?"
"그리고 전 다친 데 없고 드라마 홍보도 됐으니 호재라고 생각하려구요."
영준이 허를 찔린 것처럼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탄식을 터트렸다.
"아이돌이라 그런가? 멘탈이 다르다, 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아이돌인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하하."
"너 대단하다고. 완벽해. 너 지금 완전 한정운이야."
감탄의 의미로 손뼉을 무겁게 뻑뻑 마주쳤다. 영준의 오버스러운 리액션에 언제 심각했냐는 듯 어두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둘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키들거렸다.
스탭들의 분주함을 봐서는 촬영 준비가 거의 막바지인 것 같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촬영장으로 걸었다.
"그래서, 매니저는 좀 상태 어때?"
"매니저 형이요?"
"일행이 많이 다쳤다며? 기사에는 그렇게 적혀 있던데."
어딘가로 사라져 감감무소식인 남자가 이 대화 중에 등장할 줄은…. 유현이 인터뷰하지도 않은 내용이고 적어도 본인이 확인한 기사 중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서 몰랐다. 마법의 양탄자처럼 날아다니는 소파에 당한 그 많이 다친 일행은 현재까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아아, 매니저가 아니었구나?"
먹잇감을 발견한 눈에 금세 장난기가 차오른다. 유현이 서둘러 둘러댈 거리를 찾았다.
"휴일에도 매니저랑만 논다더니? 아니었네."
"그건…. 아는 분이 회사 근처래서, 저도 마침 쉬는 날이고 해서 만난 거라서…."
"아는 부운?"
말꼬리를 잡으면서 과한 동작으로 끄덕이는 게 딱 건수를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잠잘 시간도 모자라지만 아는 여친 분이 회사 근처면 만나러 가야지. 그치?"
"여친이 아니고요!"
"아아, 실수. 그냥 아는 여자 분."
"그것도 아니거든요!"
리허설 갈게요. 피곤이 배인 음성이 불쑥 비집고 들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 있냐는 눈을 하고 잠시 쳐다보더니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조연출의 뒤를 따라 유현과 영준도 걸음을 빨리했다.
썸이라서 얘길 안 해주는 거냐, 누군진 말 안 해줘도 되니 인정만 해라, 설마 일방적인 마음이냐, 그래서 그분 상태는 어떻다는 거냐. 영준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도 귀에 소곤거리며 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유현아."
"진짜 여자 아니에요. 그냥 아는 지인분, 남자…."
반걸음 앞서가던 유현은 귀를 건드는 손길에 말을 멈추고 영준을 돌아봤다. 영준은 질색하는 눈길에 억울하다는 듯 제 귓바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난 너 여기 귀 뒤쪽에 뭐 묻은 거 같아서 닦아주려고."
무심코 영준이 가리키는 부위로 손을 올리던 유현은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점차 얼굴이 굳어졌다.
***
"왜 그랬냐고!"
몇 번째 같은 말을 반복 중인 형사 이 씨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취조실은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형사의 앞에 마주 앉은 청년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자신이 그랬다는 말도, 안 그랬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씨는 복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카페에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손님 몇을 다치게 했으나, 본인이 손해를 배상할 적극적인 의지가 있고 경상으로 그쳤고 하니, 지금이라도 의사를 불러 정신 감정을 받게 한 뒤 심신 미약 상태로 우발적인 범행을 저질렀다고 적당히 조서를 꾸밀까 싶었다.
오로지 위협을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보통 사회 부적응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이다. 올해로 십오 년 짬인 이 씨의 의견으로는 굳이 대낮에 폭탄으로 사람들을 해칠 만한 동기가 없는 삶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이십 대 청년. 양심적 병역 거부로 군 복무도 하지 않았고 해외 유학을 오래 해 국내 대학 졸업장도 없었다. 정신 병력이나 약물 복용을 의심했지만 그쪽으로도 깔끔했다. 답답할 따름이었다.
청년에게서 한 마디라도 더 이끌어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으레 그 나이 또래라면 겁을 먹거나 못해도 어른의 눈치라도 보기 마련인데, 청년은 협박과 강요, 회유 어느 방법을 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많이 불리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청년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대단한 빽이 있어 이러는 건가 기다려 봤지만, 상부에서 풀어주라는 지시가 내려온다거나 대단한 로펌의 변호사가 찾아오는 등의 드라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봐. 김의환,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왜 그랬어?"
이 씨의 말투에서 지친 기색을 느꼈는지 내내 심드렁하던 김의환이라고 불린 청년의 눈이 천천히 바닥에서 옮겨 왔다.
"형사님."
"그래, 그래. 뭐든 좋으니까 말해봐."
"누가 신고했어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준 보람이 없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네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이 자식아. 보복하게?"
"아, 말 안 해줘도 알겠어요. 어차피 나라고 찌를 놈들은 그 자식들밖에 없으니까. 꼬리 자르고 지들만 살겠다는 거지. 얍삽한 새끼들…."
"잠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범행을 모의한 놈들이 더 있다는 거야?"
김의환은 자신이 언제 말을 했냐는 듯 다시 텅 빈 눈으로 돌아가 침묵을 지켰다.
꼬리를 잘라?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건가? 이 씨는 손을 들어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내내 심드렁한 김의환을 면밀히 살폈다.
…아니지,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거짓 진술일지 어떻게 알겠어.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사의 단초는 센터에서 제공한 정보였다.
김의환이 입을 열어도 속 시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진술로 센터로부터 전달받은 정보와 괴리가 생겨 버렸다. 일이 더 복잡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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