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33화 (33/69)

(33)============================================================

33.

그 현장에 참여한 전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강력3팀이 마약 조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조직의 주거래 상품이 마약이 아니라 사람이어서.

애초에 마약 조직이 아니라, 마약 판매와 매춘을 부업으로 삼는 인신매매 조직이었다. 심지어 인간을 고깃덩이로 취급하는 인신매매에서, 어쩐 일인지 인간이 마약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 거래되는 값에 비하자면 마약은 무가치한 덤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고.

당시 강력 3팀은 조직의 실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약이 유통되는 경로, 이동 수단과 판매책까지 파악이 거의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의 미끼에 걸려들었을 뿐이라는 진실을 알아챈 순간, 축배를 들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강력3팀의 분위기는 쑥대밭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위험 물질을 조합해 중독성이 강한 신종 마약으로 눈길을 끈 것은 전부 안정적인 인신 매매를 위한 연막에 불과했다는 쇼킹한 전말 앞에서 강력3팀은 무력했다. 대외적으로야 일반인들의 혼란과 불안을 막기 위해 경찰이 밀수 조직을 붙잡은 것으로 언론에 내보내 졌으나, 강력 3팀의 공은 공중 분해된 것이었다. 죽자사자 매달려서 고이 센터의 입에 털어 넣어 준 꼴이 된 3팀은 허탈해서 속이 헐도록 며칠 동안 강소주를 들이켰다고 했다.

그 사건의 파편이 다른 사건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이 씨는 심란해졌다.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찾아간 거라는데…."

"복수를 해? 누구한테?"

"그걸… 저도 모르겠네요?"

잠자코 듣고 있던 이 씨는 후배의 어수룩한 웃음에 이마를 짚었다.

"너 이 새끼, 나 약올리냐…?"

"그게 아니라요, 선배님. 딱 그 대목에서 취조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아, 집어치워! 센터에 연락부터 빨리해봐 봐. 진짜 센터에서 테러범 데려간 거 맞냐고."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지금요?"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이 씨가 눈을 지긋이 내려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는 미소를 띠운 채로, 꺼벙하게 따라 웃는 후배를 향해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차암, 선배님두…. 말로 해도 알아먹는데 욕을 하고 그러십니다…."

백치 같은 얼굴에 열 받은 이 씨는 결국 엉덩이를 걷어차며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새끼야, 지금 안 하면? 지금 안 하면!"

알겠어요, 알겠어요! 후배는 엉덩이를 가리며 쏜살같이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

지방 촬영 이틀째 밤. 어떻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지친 촬영을 끝내고 유현이 홀로 숙소에 앉아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똑똑똑.

누군가 조용히 방문을 두드렸다. 유현이 문을 열자 다른 스탭들과 어울리고 있을 줄 알았던 백 감독이 와인 두 병과 치즈 따위의 안주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독님."

"내일 촬영 때문에 좀 곤란하려나? 일부러 약한 걸로 골라왔는데."

감독이 바구니를 슬쩍 기울여 보였다.

"오후 촬영인데요. 들어오세요."

감독은 저벅저벅 방으로 걸어들어오더니 술 바구니를 턱 얹은 테이블 위에 턱 얹었다. 바로 그 옆에 형형색색 볼펜으로 메모가 빼곡한 대본에 눈길이 닿는다. 왠지 자랑하듯 펼쳐 놓은 모양새라 얼른 접어 한쪽으로 치우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감독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 안주, 와인, 오프너를 차례차례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바구니에서 꺼내는 것들이 꽤나 본격적인 구성이라 유현은 신기한 눈으로 순식간에 술상이 차려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촬영 중엔 술 안 한다 했던가요?"

"조금 자제하는 편이에요."

"근데 나도 그걸 방금 들었어요. 요 앞 복도에서 유현 씨 매니저랑 마주쳤거든요. 혹시, 아예 술 못 하는 건 아니죠?"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서로 타협한 걸로 해줍시다. 나도 평소였음 이런 건 손도 안 대요."

감독이 '이런 거'라고 지칭하면서 와인병을 살짝 흔들었다. 능숙하게 병을 따서 오프너를 던져놓고 와인을 따랐다. 유현은 잔을 들어 살짝 머금었다. 음료라고 해도 무방하게 단맛이 강한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뭐가 잘 안 되나 봐요."

감독의 눈이 구석으로 처박힌 대본에 가 있었다.

유현은 방으로 돌아온 내내 곱씹었던 오늘의 촬영을 되새겼다. 같은 테이크를 반복해서 찍으면서 집중력은 흩어지고, 스태프들의 기력이 떨어지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데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기계처럼 대사만 읊었던.

"걱정이 돼서요."

"무슨 걱정?"

"제가 다 망치는 건 아닐까, 하는."

"왜 그런 걱정을 해요?"

진심으로 우스워하는 투라 유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원래 한정운 역에 제가 아니라 다른 배우를 고려하셨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요?"

"며칠 전에 감독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욕심낸다고 욕심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 막힐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게, 처음부터 저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걸 욕심낸 게 문제가 아닐까 하고…."

드라마 '더 원'은 고요하게 주시당하고 있었다. 없던 관심조차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제작 행보 덕분이다.

로맨스와도 드라마와도 연관 짓기 힘든 백현수 감독이 난데없이 로맨스 드라마를 연출하겠다고 덤빈 것, 그가 제작사도 투자사도 배우도 찾지 못해 발품을 팔아 2년 가까이 방황했던 것, 그러면서 마침내 성사되었다는 소식과 또다시 엎어졌다는 소식이 종이 양면처럼 붙어 꾸준히 번갈아 들려오던 것. 어느 것 하나 쉬이 풀리는 일이 없는 작품이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가 꼈다 비웃었고, 조금 아는 사람은 고개를 저었고,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혀를 찼다.

기획 과정에서 되다마는 작품은 숱하게 많았다. 어렵게 가면 어렵게 가는 만큼 망하기가 십상이었다. 백 감독에게 동정의 눈길이 따랐다. 그가 하릴없이 드라마 진출에 고배를 마시게 될 거라 예상했으므로. 그러게 하던 거 하지 왜 변덕을 부려 고생을 자처하느냐며 훈수를 두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이번 여름, 기습적으로 캐스팅, 제작사, 투자 규모를 언론에 폭탄처럼 터트렸다. 조용히 무산되리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침내 제작이 확정된 것이었다. 비웃고 고개를 젓고 혀를 차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 관심의 성질이란 것이 곱지가 않았다. 악조건을 딛고 제작에 돌입한 후로 줄곧 '겨우' 소리만 듣고 있었다.

겨우 그런 이야기로, 겨우 그런 배우들로, 겨우 그런 편성으로.

'겨우'자가 붙은 드라마에 관련된 모든 관심의 밑바닥은 악의까진 아니어도 비슷한 성질의 저의가 있음을, 유현을 비롯한 배우들과 제작진은 확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현은 그런 비틀린 관심들 속에서 제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안정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겨우 그런 배우'가 됐지만, 역으로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니까.

그러나 정작 촬영에 들어가자, 유현이 도통 감을 못 잡고 헤맸다. 작가와의 미팅에서 들은 캐릭터와 달랐다. 백 감독이 주는 디렉팅은 추상적이고 막연했고, 상대역이자 여자 주인공 유리 역인 최민아에게 조언을 구해 봐도 "한정운 그냥 전형적인 츤데레 캐릭터 아니야? 지금 너처럼 계속 싸가지 없게 하면 될 거 같은데?"라고 답하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현수는 주인의 손을 타 두껍게 부풀어 있는 대본집을 가리켰다.

"이거 한번 봐도 될까요?"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손을 뻗어 스르륵 넘겨보았다.

유현은 배역을 곧잘 소화하는 듯싶다가도 또 한 번씩 우왕좌왕했다. 현수는 그것이 준비가 미비한 상태에 카메라 앞에 선 탓이라 치부했다.

촬영장에서 부쩍 잦아진 캐릭터에 대한 질문을 은근하게 항의하는 걸 보니 어쩌면 조만간 잘난 투자자를 앞세워 분량을 늘려달라 요구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구태여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유현의 방을 찾은 것은 그래서였다. 적당한 말로 달래기 위해서. 주제도 모르고 분량 욕심에 불편한 투자자를 부추기지 못하도록.

대본집은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촬영장까지 대본을 챙기고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어 대사 하나는 잘 외우니 다행이라 속으로 혀를 찼었는데, 상당한 정성이었다. 현수는 대본집을 돌려주며 물었다.

"주태화랑 무슨 사이예요?"

"네?"

"아,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으면 미안해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유현을 보고는, 제가 실례했다며 현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까놓고 말할게요. 캐스팅에 주태화 입김이 있었다는 거 알고 있을 거예요. 유현 씨 캐스팅이 투자 조건이었거든요."

"……."

"물론 제작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유현 씨한테 무척 고맙지만, 그거랑 별개로 위기 모면하려고 내 드라마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어요. 유현 씨도 본인이 오디션 때 어땠는지 알잖아요."

감독이 갑작스레 오디션 날의 얘기를 꺼내 들자 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화가 나타나 연애를 해달라고 얼빠지게 해 놓고 가는 바람에 거하게 말아먹은 바로 그 오디션.

"난 그래서 유현 씨가 억지로 하는 줄 알았어요. 재기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으면서 하기 싫은 티를 무지하게 낸다고 생각했고."

"그,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는 줄 몰랐어요. 오디션 날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이제 와서 탓하자는 건 아니고 그때 내 생각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 후엔 유현 씨가 현장에선 성실해 줘서,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이용해 주겠다고 마음먹은 거였고요."

"……."

"오디션 보기 전에도 유현 씨가 탐탁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유 작가님은 꼭 유현 씨여야 한다고 해서 다른 배우들 다 젖혀 두고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보내서 부탁했는데 다 깠잖아. 그래 놓고 이제 와 한다고 하니까, 그 속 참 뻔하다 싶고 그랬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나도 사람인데."

"…아, 그렇죠."

"그렇게 풀 죽으라고 꺼낸 얘기는 아니고 나도 터놓고 말해 보는 거예요. 지금은 유현 씨한테 크게 유감없으니까. 지금은 유현 씨 덕분에 든든한 뒷배도 얻었겠다, 고유현 씨가 쭉 못 봐줄 발연기를 해도 내 입장에선 남는 장사라."

작가가 유현을 주연으로 섭외하도록 기획 단계부터 강하게 의견을 어필했지만, 그보다 캐스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건 다 엎어지기 직전의 드라마에 투자하겠다고 나선 태화의 의견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 하는 심정으로 유현을 캐스팅을 해놓고선, 기왕 캐스팅을 했으니 당장 촬영이 임박해서는 취할 건 취하되 내려놓을 건 내려놓자는 마음이 되었다. 그림을 해치지만 않으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각본만큼이나 중요한 게 연출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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