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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유정림 작가가 얼마큼의 애정을 갖고 쓰든, 현장에서 대본을 수정할 권한을 사전에 양해를 구한 이상 연출 감독인 자신이 원하면 교묘하게 분량을 쳐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당히 평면적인 인물이 탄생하게 될 예정이었다. 한정운이라는 캐릭터의 분량이 대폭 줄어든 까닭이자 유현에게 크게 요구하는 바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유현을 방치한 채로, 현수가 부연했다.
"고유현 씨 때문에 망하는 일은 없을 거란 얘기예요. 최악으로 연기를 한다고 해도. 자, 그렇게 굳어 있지 말고 여기 한 잔 더 받아요."
"아, 네."
"그리고 그렇게 연기를 못하고 있지도 않고."
조르륵 채워지는 와인잔을 보고 있던 유현이 생각보다 후한 평가에 눈을 들었다. 그 시선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감독은 제 잔을 유현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유현 씨는 지금처럼만 해주면 돼요."
"지금처럼이요…?"
감독의 냉정한 눈으로 봤을 때, 고유현은 남자 주인공인 김지형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정운 역할도 과분했다. 그동안 유현이 택했던 작품과 배역들은 본인의 팬들을 의식한 듯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 감초 역에 머물러 있었고 연기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이돌 출신치고는 약간 더 괜찮은 정도였다.
유정림 작가가 만들어 낸 초기의 한정운은 남자 주인공인 김지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오해를 받고 미움을 사더라도 꿋꿋이 저만의 방식으로 약혼녀인 오유리를 지키고, 결국 그녀가 위험 속에 뛰어들기로 결정하자 끝내 그 뒤를 따라 걷는 인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데다 극 초반에 부각되는 차가운 성정조차도 자기 통제의 일면이라는 설득력마저 갖춘 캐릭터라, 막상 내놓고 보면 수요가 확실한 쪽은 어쩌면 김지형보다는 이 한정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백 감독은 유현이 한정운 역으로 캐스팅 되고서는 그렇게까지 서사를 할애해줄 마음이 사라졌다. 고유현의 '한정운'은 약혼녀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하게 되어서야 저도 몰랐던 진심을 깨닫고 때가 되어 희생하고 퇴장해주는 걸로 족했다. 제가 가지자니 싫고 남 주긴 아까워서 미적거리다가 끝내 후회하는 억울한 서브인 게 적당했다. 복잡한 내면을 감춘 의미심장한 친절함을, 오로지 인기 회복만을 노리고 합류한 고유현이 구현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현수는 새로 따른 와인잔을 둥글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유현 씨한테 그렇게 고차원적인 연기를 기대하진 않아요. 유현 씨가 적당히 소화해 낼 수 있는 만큼만. 적당히 쌀쌀맞게 굴다가 질투 때문에 갑자기 자기 마음을 깨닫고 지독하게 후회하는 남자. 딱 그 정도."
감독을 바라보는 유현의 시선이 회의적인 빛으로 변질되었다.
"유현 씨."
"네."
"다소 이르긴 하지만, 계획대로 결과물이 나와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 드라마가 신드롬이 될 거라고 감히 확신하고 있어요."
그건 유현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드라마 현장에서 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걱정할 거리가 거의 없었다. 투자자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고전 중이었던 드라마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의상, 소품, 조명, 음악, 촬영지 등 드라마 셋업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까다로운 회의를 거쳐 선정된 것이라고 했다. 연출팀의 막내 스태프 하나도 백 감독이 직접 고른 사람들로만 구성된 백 감독의 백 감독에 의한 백 감독을 위한 사단이라고 하는 걸 보면, 영화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는 백 감독의 인터뷰가 괜히 부리는 허세는 아니었다. 무리한 일정에도 큰 잡음 없이 촬영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그런 백 감독의 자신감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백 감독의 경고였다. 감히 나서서 내 작품을 망치지 말라는. 그러니 오히려 유현은 오기가 생겼다.
"한정운이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시다는 거죠. 네, 감독님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전혀 알겠다는 투가 아니라 현수는 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런데 전 아무래도 감독님이랑 생각이 달라서요."
이제 유현의 시선은 언뜻 도발성을 띠기까지 했다.
"……."
현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홀짝였다. 독이 오른 건지 약이 오른 건지, 자극받은 유현과 사사건건 부딪치게 될 미래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골치 아프게 됐네. 괜히 전투력만 상승시킨 꼴이었다. 현수는 유현이 부디 태화를 부추기지만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
"여긴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야. 병실이야 감옥이야 뭐야."
태인은 미덥지 못한 것을 보는 듯 회복실을 둘러보는 눈이 깐깐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지호는 태인의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음료 상자를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지호는 문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병실도 아닌데 주스랑 과일 바구니를 사 가지고 오셨네요, 형님."
"내가 먹으려고 가져왔어. 내가 먹으려고."
"잘하셨습니다. 태화 자식이랑 입씨름하다가 입안이 깔깔하던 차였는데."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태화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은 바로 해야지. 입씨름이 아니라 너 혼자 떠든 거잖아.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을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 하고 반박했다.
"그게 너랑 상관이 없는 일이야? 네가 만들라고 한 드라마잖아!"
"알 게 뭐야. 투자해 줬으면 됐지."
"처남이라는 놈이 매형한테 저럽니다. 형님."
"네가 참아라, 매제."
태인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척 꼬며 지호에게 과일 바구니를 턱짓했다.
"윤 서방, 사과 하나 깎아 봐."
"이것 참, 형님. 어떻게 된 게 칼도 사과도 없습니다?"
"여긴 칼도 없어?"
"또 비서 분한테 이런 거 사 오라고 자질구레한 일 시키셨습니까. 아이, 그러지 마시라니까.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런 걸 시키고 그러십니까. 과일은 됐고, 그냥 토마토 주스나 한 병 드시죠."
"우리 매제가 날이 가면 갈수록 겁이 없어져. 좀 있으면 맞먹겠어?"
"이게 모두 저를 매로 다스린 형님 덕분입니다. 앞으로 맞먹을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희극적인 대화를 듣던 태화가 실소했다. 잘들 논다.
지호가 태화의 친구이기만 했을 때도 태인과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위아래가 없는 점이 마음에 든다며 태화가 센터에 들어가고 없을 때도 옆에 끼고 살았다고 했을 정도로, 둘은 절친했다.
지금도 가끔 열 받으면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는 모양이니, 보통의 형제애에 가까운 건 진짜 동생인 태화보다는 지호 쪽이었다. 에스퍼 동생을 둔 덕에 팔자에도 없이 화를 참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가 다루기 만만한 동생이 생긴 게 좋은 게 아닐까, 태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태인이 낄낄대며 지호가 내미는 주스를 잠자코 받아들어 마신다. 지호는 보던 잡지를 넘기며 타령을 하듯이 주절거렸다.
"우리 처남이 얼른 괜찮아져야 내가 자식을 볼 텐데."
"왜, 태영이가 태화 저놈 다 낫기 전엔 자식은 꿈도 꾸지 말래?"
"그건 아닌데, 동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저놈 결혼부터 시키고 볼 작정인 거죠. 요즘 부쩍 바빠진 거 보면요. 무튼간에 여차저차 자녀 계획은 좀 미루기로 했습니다요."
차순위 신세에 해탈한 듯한 지호를 태인이 곁에서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걔 성격은 원래 그러하니 네가 이해해라, 그렇지만 조카는 소중하니 포기는 하지 말아라…. 그렇게 저 좋을 대로의 응원을 주워섬기던 태인의 시선이 무심코 잡지의 한 곳에 멈췄다.
덜 마신 주스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조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페이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예 지호에게서 잡지를 빼앗아 제 눈높이로 들고는 지면 위 어딘가에 손가락을 뗐다 붙였다 하며 말했다.
"동생아, 어제 아버지랑 여기 센터장님이랑 만나셨대. 네 결혼을 서두르든지 다시 센터에 처박아 두든지 조치를 취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온 모양이야."
누가 들어오든 관심도 없다는 듯이 일 초도 떨어지지 않고 화면에 머물러 있던 태화의 시선이 그제야 제 형에게로 움직인다. 태인은 그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책을 가리키며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지호에게 물었다. 얘가 고유현이야?
태화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분들의 만남이 잦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사안에 대해 여러 논의들이 오가고 있음을 뜻했다.
"그게 먹혀? 아버지한테?"
"농담 아니야. 아버지 많이 놀라셨어."
"센터에 처박아주면 나야 고맙지."
대책 없는 느긋함에 지호는 아연실색하며 태화를 쳐다보았다.
"야, 그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절대 센터에 처박힐 일 없단 소리야. 내가 고마워할 일 할 사람 아니니까, 센터장도 연세준도. 그런데도 아버지 약점을 알고 있으니 협상 카드로 써먹는 것뿐이고."
세준이 태화에게 성질을 긁히면서도 회복실에 이동하는 그 순간까지 꼬박꼬박 자리를 지키는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이제 이런 걸로는 너는 나를 못 당해 낸다, 뭐 그런 걸 보여주려는 거였겠지….
"연세준은 대체 무슨 생각이래? 징그러울 지경이야."
태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태화와 세준의 사이를 반대했다. 마찬가지로 절친이었던 지호를 제 누이인 태영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해준 것과는 매우 상반된 태도였다.
세준과 약혼을 한다고 했을 때는 왜인지 관망하며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세준이 집안의 일원이 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물심양면 도와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번 드라마 투자도 태인의 도움이 컸다.
"형님은 예전부터 연세준 싫어하시더라. 솔직히 걔 싫어하는 사람 거의 못 봤거든요. 반듯하게 잘생겼지, 친절하지, 머리 좋지. 그래서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형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서로 앙숙이었다고 하기엔 세준이 태인의 적수가 되지 않았고, 말하자면 고양이와 장난감 쥐의 관계와 비슷했다.
세준네 집안과는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잦아 함께 서로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태인은 세준의 동생 찬영은 좋아하면서도 세준에게만은 유독 냉랭했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던 세준이 유일하게 아이처럼 호불호를 명확히 드러냈던 인물도 바로 태화의 형, 태인이었다.
더구나 태화와 세준의 십 대에는 약혼이나 그런 쪽의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태화가 세준과 절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넌더리를 냈다. 세준만 집에 다녀갔다 하면 너는 친구가 걔밖에 없냐는 말을 며칠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고, 세준도 면전에서 몇 번 그런 말을 듣고부터는 점점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태화와 관련된 문제로 둘은 마찰을 거듭하다 근래에 이르러서 둘은 본체만체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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