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38화 (3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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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유현은 신발만 던지듯 벗은 채로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몇 칸 되지 않는 집안을 온통 뒤집어엎었다. 소파와 테이블 식탁과 찬장, 화장실 선반까지. 있을 수 없는 곳까지 샅샅이 뒤지며 태화가 준 서류를 찾았다.

"어디 갔어…."

유현은 소파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가 혹시 밴에 놓고 오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았지만, 상진과 시형의 시야에 둘 수 없어서 아예 들고 갈 생각조차 않았던 아침들을 기억해 냈다.

혹시 가방이나 다른 서류 더미에 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자기 전에 읽으려고 베개 옆에 고이 올려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유현은 침실 안으로 전투적인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수면제나 다름없는 신상 요약본은 몇 장 넘어가다 만 상태였다. 앞부분만 너덜너덜한 종이 묶음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차원이 다른 속도로 빠르게 장이 넘어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어째서 고유현이어야 하는가' 의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에스퍼인 거랑 꼭 나여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이유를 듣고 나왔어야 했는데….

*

"도망 안 가겠다면서?"

유현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소리쳤다.

"그래서 도망가지 말고 나보고 그쪽 자살하는 거 도와달라고요?"

"자살?"

"약이 필요한 몸인데 약을 거부하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잖아요. 죽는 거 아니라더니, 아니라더니!"

"에스퍼인 건 괜찮다?"

"네?"

"도망가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에요? 파혼하면 내가 죽을까 봐?"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겠어요? 그것"도" 문제인 거죠. 그쪽이 파혼하겠다고 하면 그쪽 집에서 날 가만두겠냐고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하던 의사의 조언도, 본가에 들러야겠다고 아침에 한 결심도 다 잊고, 잘난 얼굴을 뚫어져라 쳐보며 다그치기 바빴다.

"말하자면 청부살인 같은 거라고요. 난 그런 거 못 해요.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계약이었다고요.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 태화는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 유현의 말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태화는 손을 뻗어 천천히 유현의 손목을 끌어당겨 잘 보이게 뒤집었다.

그러나 태화가 나직이 뱉은 물음에 유현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네임이, 없어졌네요?"

태화는 놀라지 않는 유현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혹시 각인 네임이 없어지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각인 네임의 소멸은 네임주의 죽음을 뜻했다. 그러나 그건 일반적인 경우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 네임이 사라진 현상에 대해 설명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유현에게 각인 상대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고민은 아주 짧았다. 본능적으로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이 들었고, 차에서 도망쳐 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내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유현은 머릿속으로 다시금 정리해 보았다.

주태화는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 가이딩 약물 때문에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할 위기에 처해 있음. 본인은 가짜 애인을 앞세워 파혼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 그리고 그 가짜 애인은 가이드는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함.

"뭐냐, 진짜…."

애인 하나 만들었다고 파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애인이 있다고 결혼을 물러 줄 것 같았으면 재벌이 등장하는 수많은 막장 드라마는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목숨이 걸린 결혼인데.

조금만 따져 봐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신발에 붙은 불 끄자고 발등에 기름을 부었다. 암만 생각해도 여우 피하자고 호랑이굴 들어간 꼴이다. 물웅덩이 피하자고 연못에 뛰어든 격이다.

드라마 배역과 우신 계열사의 광고 그리고 최종익으로부터의 보호. 그의 가짜 연인이 되는 조건으로 받은 대가만 벌써 이만큼이었다. 그쪽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조롭게 계약을 해지한다고 해도 도로 토해내야 하는 것만 해도 그만큼이라는 의미였다.

그것만 뱉어내고 계약을 깰 수 있다면 다행일지도. 계약서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던 징벌적 배상 조항들이, 고유현이란 인간을 단시간에 이 세상에서 완전히 털어버릴 것이다.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머리에 둥둥 떠다녔다. 송사에 휘말리면 더 볼 것 없이 제 손해였다.

그뿐인가. 투자자의 개입이 내내 마음에 안 들던 백현수 감독은 얼씨구나 좋다 하고 당장 유현의 분량을 새로 찍으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종익은 곧장 한국으로 돌아와 저를 괴롭히겠지.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해버려?"

아스라이 몇 편의 드라마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우신 그룹에서 왔다며, 차갑게 생긴 남자들이 들이닥치고, 그 뒤로 겉보기에 단아한 사모님이 나타난다. 네깟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며 악다구니를 쓰고 따귀를 때리고….

보통은 그런 뒤 재벌남과 사귀는 여자 쪽에서 임신 사실을 숨기고 도망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유현의 경우 애를 가질 수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다.

재벌이랑 엮이니까 삶 자체가 드라마네. 유현은 뜨끈해지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 머리 아파…."

바닥에 둔 폰 화면이 반짝였다. 유현이 집어 들자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약을 두고 내렸는데]

유현이 으아아, 탄식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친, 미친. 안 그래도 껄끄러운데 약까지 두고 왔어. 양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꿈치를 대고 유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하다가 몇 번 심호흡을 깊게 한 후 벌떡 일어섰다.

마른세수를 한 유현이 도를 깨달은 도인처럼 해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씻자."

***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남자는 흘긋 눈을 들었다. 부하 직원의 노심초사하는 얼굴을 보고도 남자는 위기의식 하나 없었다.

"김의환이 센터에 가서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이렇게 여유로우십니까."

"어차피 배신자 낙인이 찍힌 놈이야. 센터는 배신자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곳이 아니고. 그러니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남자는 부하 직원이 저를 어떻게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책상에 팔을 괸 채로 모니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장 단체 습격" 강남 한 카페서 30여 명 긴급 대피 소동]

['더 원' 마인 이유, 복귀 앞두고 날벼락… "스케줄 무리 없이 소화할 것"]

[센터, "명백한 테러 행위… 반드시 대가 치르게 할 것"]

누군가의 입맛대로 '그들'의 소행이라 오해를 받고는 있지만, '그들'은 동료들의 몸을 헐값에 내돌린다거나 금전을 요구하며 민간인이 있는 건물을 테러하는 정신 나간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김의환, 그 멍청한 놈만 아니었어도….

몇 년 전, '그들'과 맹렬하게 대치하던 그가 센터에서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아마도 쓰임이 다해 그가 센터에서 버려졌을 것으로 짐작했다. 언젠가 '그들'이 경고했던 대로.

'그들'을 잡겠다고 총력을 기울이던 프로젝트팀의 팀장이 사라진 것이 기뻐야 마땅한데도 찝찝했다. 같은 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는지.

리더가 사라진 여파인지 '그들'을 파헤치고, 사사건건 방해하던 센터 프로젝트팀은 눈 깜짝할 새에 와해되었다. 모든 것은 그가 '그들'을 담당하게 되었던 처음으로, 정확히 원점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그의 모든 업적이 수포로 돌아갔다. 놀랍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지 속상했다. 한때 같은 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끝내 같은 편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거대 기업의 동맹… 우신 차남 주태화, 유상 제약 장남 연세준 약혼]

그동안 생사를 확인하기도 어려웠던 그가 센터장의 아드님과 결혼을 한다는 기사였다.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지.

별일 아니었다. 귀족적 마인드를 가진 여느 에스퍼 도련님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것에 불과했다.

그저, 약혼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포장하며 짐짓 괴로운 듯 해명하던 그는 실은 처음부터 특수능력자로 살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제 입으로 목숨이나 다름없다던 팀을 해체시키면서까지, 센터장의 비호 아래 센터를 빠져나왔던 것이다. 기도 안 차서.

그렇게 서서히 잊혀질 한심한 인물이었다. 뱉은 말마다 가식에 지나지 않았던, 제 안위가 제일 중요했던 그저 그런 부잣집 도련님으로.

"너 내가 눈썰미 좋은 건 알지. 익숙하더라고."

"누가요?"

"같이 있던 사람.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주태화가 투자한다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였어."

"그런 건 눈썰미가 없어도 알 것 같습니다만."

"너도 알았어?"

"모르셨습니까? 광고에 많이 나오는 아이돌이잖습니까. 전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그를 다시 관찰하게 된 건, 얌전히 식장에 걸어 들어가 만만한 삶을 살아내면 족할 그가 그 결혼 기사 이후 보이는 수상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족의 손을 빌려 자금을 만들어서는 반反센터 드라마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손바닥이 다 닳은 방송국에, 편성을 취소하라는 센터장의 압박을 무시하지 않으면 광고를 모조리 빼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고. '그들'의 귀에 들려올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니, 센터장도 그가 만든 이 사태를 인지는 하고 있을 것이었다.

은근히 뿌듯한 기색의 부하 직원을 작게 비웃어 준 남자는 포털 사이트 프로필 화면을 띄워놓고 중얼거렸다.

"유명한 아이돌이랑 왜 그러고 있었을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김의환을 대동한 것은 얄팍한 수였다. 그의 경계심을 낮추는 데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그 애송이가 제 분에 못 이겨 일을 그르쳤다. 사람 하나 만나러 가는 자리에 필요 이상으로 굳어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설마 데이트였나?"

졸지에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테러범으로 몰리고, 센터로부터 대대적인 소탕을 경고받았지만, 그럼에도 그 나들이에서 건진 것은 있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보였어? 주태화 남자 좋아하잖아."

"의심이 가긴 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 아이돌 때문에 드라마에 투자를 한 거 아닐까, 그런 의심도 잠시 생겼습니다."

"…일리 있는데."

원인이 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과,

"혼자서만 맘 편히 사는군."

기억도 잃었다는 사실.

"잊었으면 기억나게 해줘야지."

***

"대본대로 할 수가 없다고?"

"그게 아니라 오늘 식전에 유리랑 대화하는 부분은 저한테 맡겨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감독님."

"그게 그거지. 대본 무시하고 유현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작가랑 감독을 뭐로 보는 거야, 유현 씨는?"

백 감독이 험상궂어 보이게 인상을 썼다.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선을 벗어난 맹랑한 요구였다. 감히 대본을 바꾸겠다니. 아무리 잘난 탑스타라고 해도 대본을 건드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이미 소문난 망나니이겠고.

"감독님이 대본을 수정할 권한을 갖고 계신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의논을 드리는 거구요.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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