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3화 (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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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성이 얘 겁도 없이 동네에서 데이트하다가 나한테 들켰어. 동창회 가다가 보니까 쩌 앞 카페 알지? 거기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더라구. 그게 하도 이상해서 여기서 너 혼자 뭐하냐 그랬더니 뒤에서 아가씨가 '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러지 뭐니. 난 그 아가씨가 네 팬인 줄로만 알구 얘길 했는데, 글쎄 알고 보니 쟤 여자친구였던 거야. 그때까지 네 동생이라고 밝히지도 않구."

유현이 건수 잡았다는 표정으로 유성을 음흉하게 쳐다보았다.

"오오, 고유성. 형이 카드 줄까?"

"형이 왜?"

"내 팬이잖아."

"내 여친이야."

유치하게 투닥대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가방을 들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유현은 대학 얘기에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 맞다. 엄마,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빨리 말해. 앞에 택시 불러놨어."

"나 수능 성적표 집에 있어요?"

사고 당시를 언급하는 것을 어머니도 유성도 끔찍히도 싫어해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던 질문이었다.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져서. 성적표 우편으로 부쳐 줬을까 싶어서."

제법 화목한 분위기였던 집안이 대번에 싸늘해진다. 유현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거 챙길 시간 없었어."

엄만 나가. 알아서 먹구 가. 어머니는 언뜻 매정하게 들릴 만큼 차가운 투로 유현의 눈길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주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에 유현이 괜히 뒷목을 긁적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유성이 으유, 하며 혀를 찼다.

"형은, 엄마 그때 얘기하는 거 싫어하시는 거 알면서 그런다."

"미안."

"테러인지 뭔지 그 뉴스 보시고는, 그때 생각나시는지 요새 엄마 잠도 못 이루셔. 밤만 되면 나오셔서 한숨만 쉬신다고. 집에 자주 좀 와라."

"또 이상한 애들 따라올까 봐."

"그럼 연락이라도 자주 하든가. 추워지면 더 불안해하시잖아."

"알았어. 연락 자주 할게."

죄인이 된 유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유현은 지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발을 벗으면서 명치에 걸려 있던 숨을 훅 뱉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돌아온 보금자리가 어지간히 반가웠는지 집에서 훈기가 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실내 슬리퍼를 슥슥 끌고 들어갔다.

고개를 젖히며 근육이 뭉친 목덜미를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체력이 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돌이나 배우나 활동기는 어쩔 수 없이 힘들고 지치지만 요새는 방전되는 속도가 달랐다.

분량이 많아서인가, 유달리 액션씬이 많아서인가. 몇 달 쉬는 동안 몸이 너무 편해졌나. 아니면… 나이가 드는 건가. 스물여섯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스물서넛 날아다니던 시절에 비하면야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어린 날부터 몸을 함부로 썼더니 이십 대 후반부터 한 해 한 해가 달랐다던 아이돌 선배들의 증언이 떠오른다.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겉옷을 벗어서 던져놓고 대본집은 소파에 올려두었다.

유현은 빼꼼 열린 거실 창문을 발견하곤 헛웃음이 났다. 지난달 물난리에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제가 또 열어두고 간 것이었다. 나가면서 볼 수 있게 현관문에다 뭘 써 붙여놓든가 해야겠다.

"나도 참 큰일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약을 챙겨 먹어야 했다. 샤워한 뒤에는 약을 챙겨 먹지 않고 잠들기 일쑤라 씻기 전에 챙기는 게 편했다.

습관적으로 찬장을 연 유현은 제자리에 있어야 할 약통이 보이지 않아 뒤를 돌았다. 약통이 식탁 위에 있었다. 여기 뒀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

겉옷 주머니에서 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생수는 식탁 위에 올려두고 느릿하게 걸어가 발신인을 확인한 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바빠요?"

"아뇨. 촬영은 마쳤어요. 집이에요. 자다 깼어요? 목소리가 잠겼는데."

-"뒤척이다가 일어났어요."

고질적인 불면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나한테 있어선 자는 일도 능동 행위라."

그땐 시간이 남아돌면 자는 것도 일이라고 했었지.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이제 와서 마음에 걸렸다. 진작에 그 서류 좀 읽어볼걸. 그랬으면 말조심했을 텐데.

"…피곤하시겠네요."

-"열심히 촬영하고 돌아온 고유현 씨만 할까요."

"잠이 안 와서 전화한 거죠."

-"그것도 있고."

"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고유현 씨가 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졸리기도 해서."

"스읍… 좋은 건가요?"

태화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태화가 다행히도 화두를 던져주었다.

-"아까 메시지를 남겼던데."

유현이 아, 소리를 냈다. 밴에서 대기하던 중에 대본을 읽다가 호기심에 메시지를 보내 놓고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답해주시려구요?"

-"일단은, 그 메시지만 읽어서는 고유현 씨가 뭘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에스퍼가 가이드를 싫어하는 거예요? 사람을 싫어하는 거예요?"

"에스퍼가 가이드를 싫어할 수 있어요?"

순진하게 되묻자, 태화가 짓궂은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야유하며 웃었다. 에스퍼라면 당연히 가이드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유현은 객쩍게 따라 웃었다.

-"가이드를 좋아하지 않는 에스퍼가 생각보다 많아요."

"왜요?"

-"생각해 봐요. 내가 갑질을 한다면, 고유현 씨는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가 아무리 고유현 씨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줬다 해도 말이에요."

"아…."

-"사람들은 내게 꼭 필요한 걸 많이 가졌다고 해서 상대방이 갑질하도록 두진 않잖아요. 에스퍼도 마찬가지예요. 본인의 몸을 폭탄처럼 보듬어 안고 사는 인간에게도 지켜질 존엄이란 건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유현은 아까부터 계속 눈에 거슬리던 창문을 닫은 후 커튼을 치고 다시 주방으로 움직였다. 어깨와 귀 사이에 폰을 끼우며 물었다.

"그럼 그쪽도 싫어하는 가이드가 있었어요?"

약통을 열고 톡톡 쳐 한 알을 식탁 위에 떨어트리고 생수병을 집었다.

-"크게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냥 가이드 자체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안 친했고."

"그래도 팀원이면 친해질 수밖에 없지 않아요? 대본 보니까 팀원들끼리는 돈독하던데. 드라마라서 그런가?"

-"글쎄요, 모르겠네요. 그런 팀도 있는데 내 팀은 돈독한 정도는 않았던 거 같아서."

"팀이요? 아, 혹시 그럼 그쪽도 센터에 있었던…."

물기 맺힌 생수병의 뚜껑을 돌리며 무심결에 눈으로 거실 어딘가에 있을 무선 이어폰을 찾았다. 저쪽에 뒀었나. 컵에 물을 따르던 유현이의 시선이 문득 구석에 놓인 컵에 그쳤다. 반쯤 빈 컵을 가져와 눈높이로 들어 올린다.

"……."

붉은색 입술 자국이었다. 유현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조금 흐트러져 있는 침구, 제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던 물건들, 열려 있던 창문….

모든 것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새삼스러운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오랫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자 조금 기다리던 태화가 건너편에서 말을 걸었다.

-"고유현 씨?"

통화 중이었단 사실을 잠깐 깜빡한 유현이 그제야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집을 비운 동안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었나 봐요."

-"모르는 사람이면, 도둑이요?"

훔친 물건이 없으니 도둑이라 할 순 없지만, 도둑보다 더 악질적이고 진저리나는 인간들이었다. 팬이라고 주장하는 사생 무리. 사적인 영역을 마음대로 헤집어 놓고 어떤 성질의 관심이라도 유현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인 이들이었다.

차라리 도둑이 들었다면 이 정도로 기분이 더럽진 않을 것이다. 작년에 한번 대대적으로 고소를 하기도 했고, 숙소에서 지내다가 회사 법인 명의로 계약한 오피스텔로 옮기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서 사생이 거의 사라져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걸 태화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보란 듯이 흔적을 남겨놓고 간 걸 보면 이 집에 무슨 짓을 해놨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종료 버튼을 누르고 거실에 널브러진 외투와 선반 아래 들어있는 차 키를 챙겨 들었다. 소름이 돋아서 한시도 더 있기 싫었다. 유현은 도망치듯 집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상진에게 문자를 남겼다.

[내일 스케줄은 형 대신 현욱이 좀 불러줘요]

혼자 하는 짓이 아니라 무리가 있었다. 하던 대로 본가 앞에 진을 쳐도 작년 연말 몰래 어머니와 동생을 이사 시킨 덕분에 몇 달은 허탕을 쳤을 것이다.

연초부터는 계속 스케줄이 없다시피 했던 데다, 멤버들과 함께 지내던 숙소에서도 밤중에 쫓겨나다시피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으니 행방이 묘연해져 유현을 따라붙을 수가 없었을 테고…. 그동안 약이 바짝 올라 이런 짓까지 벌인 거겠지.

드라마 찍는다는 기사가 나면서부터 감을 잡은 사생들이 발 빠르게 흩어져 매니저들을 좇다가 오피스텔을 알아낸 게 아닌가 싶었다. 폰으로 오는 연락은 눈치채고 피할 수라도 있는데, 따라다니는 인간들은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숙소에서 지낼 때 찾아온 적은 있어도 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유현은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비상용으로 세워둔 제 차는 아마도 로비에서 제일 먼 곳에 주차되어 있을 것이었다.

♪―

상진의 전화를 다급하게 받아든 유현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 집에 사생이 든 거 같아요. 어떡해요? 회사에서 계약한 오피스텔 여러 개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 진짜 어떻게 알아냈지. 집까지 들어올 줄 몰랐어요. 걔네 미친 거 같아요."

-"……."

"아무튼 형은 내일 나 픽업하러 오지 말고 관리 사무실에 들러서 cctv 좀 확인해줘요. 당분간 본가에서…."

어머니도 동생도 사생 때문에 곤혹을 치른 적 있어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유현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 오늘만 본가에서 잘게요. 지낼 곳을 새로 알아봐야 할 거 같아요."

-"……."

사생이 숙소에 숨어들다 발각된 일을 전해 들었을 때는 세상에 그렇게 상스러운 욕이 존재했구나 감탄스러울 정도로 난리를 쳤던 상진이었는데, 그답지 않게 이상하게 조용했다. 유현이 "형?"하고 재차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얼마 후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주차장이에요?"

유현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 태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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