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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고유현 씨 매니저, 한 번 부주의했던 걸로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는 사람으론 안 보이던데."
"그게, 매니저 형이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거든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고가 음주운전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확인 없이 기사가 먼저 뜨는 바람에 난리가 났어요. 부랴부랴 해명 기사를 냈는데, 다음 날 이유가 맨정신에 사람을 치여 죽였다고 기사가 나고, 거기에 또 해명 기사 내니까 팬들이 회사 앞에서 아티스트 케어 제대로 해 달라고 시위하고….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거겠죠."
태화는 유현의 말을 다 듣고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매니저가 엄살이 심한 편인가 보네요."
"에이, 절대 아니에요."
유현은 그 사고 후 눈을 떴을 때 본 상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시한부 선고를 들으면 저럴까 싶게, 양 끝이 심각하게 솟은 눈썹과 우울한 입매.
상진을 이만큼이나 걱정시킨 게 미안해서, 유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 활짝 웃어주었다.
"이, 이유야, 형 알아보겠어?"
미안해, 형.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놓은 한 마디에 상진이 대번에 무너졌다. 꼭 기적을 목도한 교인처럼 감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유현을 꽉 껴안고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주문처럼 외며 아이처럼 울었다.
태화의 목소리가 케케묵은 상념을 갈랐다.
"서로 각별한가 봐요."
"네, 좀 그런 편이죠. 형은 제가 처음으로 맡은 연예인이고, 저도 형이 제 첫 매니저니까."
유현은 쉽게 인정했다. 상진과 저 사이에는 남들은 이해 못 할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부터 정 엔터 연습생이었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현은 상진이 트레이드를 제안해 데려온 멤버였다. 그래서 다른 멤버보다 마음이 간다는 말을 직접 하기도 했었고, 대표에게 맞아 죽을 뻔한 일이나 계약 문제 때문인지 괜히 끌고 왔다는 부채감도 있는 듯했고, 순탄치 못한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도 꿋꿋한 유현을 기특해하기도 했다. 유현이 상진이 쓴소리를 해도 고깝게 듣지 않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순 단절적인 정적이 흘렀다. 유현은 정적의 원인을 찾지 않고 그저 걸었다. 그리고 유자차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 짐을 내려놓듯 툭 던졌다.
"저도 잘 모르지만 심리적인 문제예요."
아까 그쪽이 물어보던 거 말이에요. 태화가 돌아보자 유현이 작게 부연했다.
"저번에 병원까지 태워주셨잖아요. 그날도 네임 때문에 간 거였어요."
"네임 때문에 생기는 문제면 보통 신경과 쪽으로 가지 않나?"
"보통은 그런데, 전 좀 특이한 케이스라서요."
이제 우리 돌아갈까요. 저 추워요. 유현이 목을 한껏 집어넣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화는 제 몫의 음료를 유현의 손에 건네주고 발길을 돌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태화 몫의 유자차는 아직도 뜨끈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걸어온 길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 추웠다. 차로 돌아오자마자 태화는 히터를 켰고 유현은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열선이 데워지길 기다렸다. 태화는 유현의 호들갑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아까 그건 어쩌다가 궁금해진 거예요? 메시지로 물어봤던 거."
"아아, 그거. 에스퍼였던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서요. 그냥 참고만 하려고 한 건데…."
사고로 특수 능력을 몽땅 잃었다는 전직 에스퍼 앞에서 꺼내도 될 질문인지 가늠이 어려워 눈치를 살폈다. 불쾌한 기색은 아니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맡은 역할이 약혼자는 좋아하면서도, 약혼자가 가이드인 건 싫어해서 약혼자가 해주는 가이딩을 거부하거든요. 가이드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다 본인 때문인데, 그걸 외면하는 게 솔직히 전 이해가 안 가서요."
고민을 하는 듯하던 태화는 차를 출발시켰다. 공원을 빠져나온 차가 완전히 도로에 올랐을 때 신중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으음, 정확히 어떤 캐릭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가이드가 되겠다고 하는 게 기뻤을까요? 아니었을 거라고 봐요. 본인 등급이 높다면 달갑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을 테고. 약혼자가 좋은 거랑 별개로 화가 났겠죠."
"화가 나요?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을 자초하니까. 높은 등급의 에스퍼일수록 더 위험한 현장에 파견될 텐데, 저 때문에 들어왔다면 더욱 기뻐할 수가 없는 거죠."
유현은 눈을 크게 떴다. 유현이 캐릭터를 재해석하며 최대한 자기 입맛대로 바꾸고 있긴 했지만, 초반의 쌀쌀맞음은 여전히 이해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것이었다.
고증 문제로 감독에게 대본 수정 권한이 있다고 하니,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바뀐 건 아닐까 의심도 했다. 고민 끝에 유 작가에게 전화해 물어보았지만 놀랍게도 쌀쌀맞게 구는 게 맞다고 했다. 그래서 유현은 그것을 캐릭터의 근본적인 문제로 여기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태화는 그 문제에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캐릭터가 가지는 성격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그조차도 애정의 한 갈래라는 것. 대본을 수없이 읽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직접 설명을 들으면서도 짐작 못 했던 작가의 의도가, 정작 제삼자인 태화의 말을 들으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가이드가 돼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 않아요?"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데…. 가이드가 후방 지원만 하는 백업 가이드로 포지션을 정했다거나 파트너를 지정하기 전에는, 법령에 따라 센터를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가이딩을 받지 않으려는 것도 아마 센터에서 내보낼 작정을 한 게 아닐까 싶네요."
드라마와 같은 일들이 센터에서는 흔한 일인 걸까. 정확히 시기까지 짚어내다니.
"그럼, 그거는요? 가이딩은 왜 안 받는 거예요? 꼭 파트너가 아니어도 가이딩은 받을 수 있잖아요."
생일날 잔뜩 쌓인 선물을 하나씩 골라 뜯어보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에 태화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른데,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상성이 잘 맞을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거 같네요.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상성이 잘 맞는 게 왜요? 좋은 거 아니에요?"
"고유현 씨는 다이어트를 자주 하죠?"
웬 다이어트. 유현이 눈을 깜빡였다.
"다이어트 중에 한 입만 먹고 그만두는 건, 아예 안 먹는 것보다 괴롭지 않아요?"
"아……."
"에스퍼와 가이드는 상성이 맞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다들 고유한 파장이 있거든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상성까지 잘 맞는다고 생각해 봐요.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상성이 잘 맞는 경우엔 센터 밖으로 보내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겠죠. 그런 가이딩은 황홀하다고들 하니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유 작가는 첫 미팅에서부터 유현에게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도 유현은 작가가 캐릭터를 변호하려는 거라고 오해했다. 초반은 쌀쌀맞은 캐릭터로 연기하는 게 맞다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건, 캐릭터의 감정선마저 철저히 의도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는데도.
"정말로 신기한데요…."
"신기한 건 내 쪽이에요. 그런 건 일반인이 쉽게 파악할 수가 없는 얘기라서. 작가가 센터 출신인지 의심이 들어요."
"아, 작가님 친구분이 센터 출신이라고 그러셨어요. 그분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재구성한 거라고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얘기라면, 실화의 주인공은 에스퍼와 각인한 가이드일 확률이 높겠네요."
작가는 첫 미팅에서 유현에게 캐릭터와 사건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친구 얘기를 들려주었다. 본인이 밝히지 않아 가이드인지 에스퍼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에스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에스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털어놓았었다.
"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에스퍼는 살아 있는 채로 가족이 아닌 외부인과 그렇게 오래 만날 수도 없으니 분명 얘길 전해준 사람은 가이드일 거고. 근데 가이드들은 사실 에스퍼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거든요. 다른 직장인들과 똑같죠. 승진, 월급, 보너스 그런 게 중요하지, 다른 데는 크게 관심 없어요."
"아…."
"가이드가 에스퍼의 심리까지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둘 중 하나로 판단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사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감정이나 생각이 공명하는 사이였다. 어느 쪽이든 각인을 했을 거 같네요."
"에스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쪽처럼 센터에서 나와서 생활하는."
"그건 나 하나뿐이라 불가능할 거 같네요."
태화의 말을 듣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가 다리를 완전히 지나왔을 때 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는 왜 남주가 아닌 걸까요?"
태화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남주가, 아니에요?“
***
유현은 발소리를 죽이고 현관문도 덜컹거리지 않게 조심히 닫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에 현관문이 다 닫힐 즈음엔 센서 등도 꺼진 채였다.
"읍!"
움직임을 감지한 현관 등이 켜지자,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던 유현은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센서 등이 다시 꺼지고 떡 버티고 서 있던 유성의 실루엣이 신기루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놀랐잖아! 유현이 속삭거리며 팔을 파닥거리자 다시 한번 현관이 밝아졌다. 유현은 현관 등을 한번 보고, 굳게 닫혀 있는 안방 문을 한번 본 다음,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서 침입자 보듯 하는 유성을 질질 끌고 제 방으로 향했다.
유현이 방문을 닫자마자 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추궁했다.
"온다는 말 없었잖아."
"그냥 왔어. 여기가 가까워서."
"촬영장에서?"
"아니, 약속이 있었어. 이 근처에서."
"근처 어디."
"그냥…. 아, 뭘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내가 뭘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거야? 난 그냥 어디에 있다 왔는지만 물어봤는데."
"아무튼 별일 없고, 오피스텔 가는 것보다 여기가 가까워서 왔어. 내일 엄마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주라고. 가 봐."
할 말이 끝난 유현은 온 힘을 다해 유성을 방 밖으로 밀어냈다.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놓고 가벼운 실내 차림으로 갈아입던 유현은 어느샌가 소리 없이 들어와 문가에 서 있는 유성을 보고 깜짝 놀라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야이, 미친! 깜짝 놀랐잖아!"
"형."
"뭐."
"내일 촬영 있지?"
"응."
왜인지 유성의 얼굴로 웃음기가 싹 번졌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목 스트레칭을 하던 유현이 그를 불쾌하게 쳐다보자, 웃음은 한층 더 음흉해졌다.
"데이트하고 왔다는 거네."
"무슨 데이트."
"만나서 뭐 했는데? 떳떳하면 말해봐."
"뭘 떳떳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냥 뭐, 차 마시면서 얘기 좀 했어."
"누군데?"
"네가 말하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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