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48화 (4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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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목이 뻣뻣해지고 허리가 뻐근해지도록 돌려본 성과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고, 결국 몇 주 전 영상 자료까지 받아 돌려봐야 할 판이었다. 자료가 워낙 방대해 감히 손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는데, 그때 태화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웬 20대 여성의 신상을 넘겨주었다고 했다.

상진은 신상을 넘겨받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최대한 신중하자는 차원에서 지켜봤는데, 그 사생팬은 아무 의심 없이 유현의 집을 열고 들어갔고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범인은 진술 과정에서도 자꾸 연인 사이였다느니 거짓말을 해대는 바람에, 동종 전과가 없었다면 유현이 꼼짝없이 휘말릴 뻔하기도 했다고.

상진은 그 난리가 끝나니 잔뜩 지쳐서는.

"유현아. 그냥 촬영 끝날 때까지만 지내던 데서 지내는 게 어떨까? 원하면 호실은 바꾸는 걸로 하고. 응? 너만 따로 나와 사는 이유, 벌써 몇몇 기자들은 사생팬 때문에 멤버 불화로 엮는 것 같고…. 알잖아. 이런 일에 오르내리면 너만 손해인 거."

상진은, 호랑이를 피해 굴에 숨은 토끼처럼 잔뜩 겁먹은 유현을 살살 달랬다. 당장 기사 몇 개야 막을 수 있어도 집을 옮겨버리면 그땐 정말로 기사화될 거라고 말이다. 거기에 태화도 말을 보탰다.

"말을 흘리는 게 회사 사람 같은데,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는 더 있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래서 오피스텔에 촬영이 끝날 때까지만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 좋은 일만 시켰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할래?"

유현의 안전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돈 나갈 일 하나 줄어 기쁘다는 표정. 작년에 새로 작성한 계약서에 거처를 마련해주기로 한 조항이 아니었다면 이 일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마무리됐으니 다른 얘기도 해보자며, 기다렸다는 듯이 현욱과 수환을 불러 '진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마인의 돌아오는 컴백은 네 드라마가 끝났을 때가 딱 좋겠다고. 그러니 재계약을 하자고 말이다. 상진을 그 자리에 부르지 않은 의도가 투명했다.

지 대표의 이런 독단은 항상 마인 멤버들에게 반감을 일으켰다. 유현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표면적으로 제가 유리해 보이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니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리더인 인성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유도 사실은 그런 이유였다.

"그래. 넌 처음부터 너밖에 몰랐어. 넌 네 성공이 제일 중요했지. …그래, 네가 원래부터 그런 애였다는 걸 우리가 잊고 있었다, 야."

막내인 주영은 존경해 마지않는 인성이 연습생 동기였던 안강수를 그리워해서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주영이 믿는 의리파 인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유현이 차지하게 된 센터 자리는, 멤버 변동이 있기 전 인성의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인성으로서는 유현이 쟁취한 모든 것은 '원래 자기 것이어야 했으나 뺏긴 것'처럼 느껴졌을 테고, 유현도 그런 심정을 알기 때문에 인성의 은근한 견제와 시샘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각인 네임으로 그룹 탈퇴의 기로에 섰을 때 각자 나름의 이유로 유현을 걱정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내심 홀로 기뻐하던 것도, 결국에는 유현의 잔류가 확정되자 아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것도. 전부 모른 척했다.

이번에도 이제 저 엿 같은 고유현 좀 안 보나 하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드라마 촬영을 끝나길 기다려 다시 컴백을 하라니 자기 딴엔 속상했겠지. 그래서 악담을 해서라도 떨어트리고 싶었던 것도 같고.

이해는 갔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참고 함께 활동하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대표님. 말씀은 감사한데, 저 때문에 마인 컴백 미뤄지는 건 원치 않아요. 이미 저 빼고 타이틀 녹음도 끝났다고 알고 있는데, 더 미루지 마시죠. 제가 멤버들 볼 낯이 없어서요."

"멤버들 볼 낯? 너 무슨 겸양을 그렇게 떨어. 됐어, 됐어. 그깟 두 달을 못 참을까. 너 이번에 드라마 잘 되면 다 같이 득 보는 건데 다 이해할 거다. 해야 되고."

"아뇨, 대표님. 저 생각 없습니다."

"응? 생각이 없다니?"

달면 삼켜지고 쓰면 뱉어지는 존재라는 걸 확인 사살당한 봄여름, 광고 몇 개에 태세를 바꾸던 여름의 끝자락. 계절을 지나올수록 유현의 애사심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있던 정도 떨어질 지경이었다.

유현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고 못을 박았다.

"마인 컴백 시켜 주세요."

"해준다니까? 너 드라마 끝나면―"

"저는 빼고요."

"야, 고유현…."

잘한 거겠지…. 다시 곱씹어 보니 제가 너무 홧김에 저질러 버린 게 아닌가 후회가 되었다.

빵―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유현은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걸음을 가장자리로 옮겼다.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차는 유현의 곁으로 붙더니 느릿하게 속도에 맞춰 느리게 움직였다. 귀찮게, 뭐야….

유현은 표정을 구긴 채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린 창으로 태화의 얼굴이 보였다.

"뭐예요?"

"타요."

곧장 보닛을 돌아 차에 올라탄 유현이 안전벨트를 매면서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딱히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고 인사말 같은 것이었다. 이제 유현에게 쉬는 날 태화를 만나는 일이 별스러운 사건은 아니었다. 태화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오늘 스케줄 없다고 들어서. 방향이, 회사에서 오는 길인가 봐요?"

"아, 네. 대표님이 부르셔서요."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유현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요."

태화는 더 캐묻지 않았다.

회사에 대한 회의감과 충동적인 결정의 후회 따위에 허우적대며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에 차가 점점 오피스텔과 멀어지고 있었다. 낯선 경로에 유현이 두리번거렸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요?"

"글쎄요. 어딜 가겠다고 온 건 아니었어요. 고유현 씨 만나러 온 거라."

"……."

"어디로 갈까요?"

해가 있을 땐 눈이 많은 곳은 갈 수가 없는데, 현재 이 시간에 인적이 드문 곳이 어딜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생각나는 데가 없는데…."

"그럼 우리 집 어때요."

유현이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고 헛웃음을 짓자, 태화는 육 년 전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에 들었어도 씨알도 안 먹혔을 말로 꼬드기기 시작했다.

"맛있는 거 많아요."

"세상에 널린 게 맛있는 건데 꼭 그쪽 집에서 먹어야 할 이유가…."

"술도 많고."

"다이어트 중이라 그것도 썩."

"아무도 없고."

그때까지도 농담이라고 생각한 유현이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무심코 눈을 돌렸다가 햇빛이 비쳐들며 역광이 진 옆모습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는 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게 마치 답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라 유현은 당혹스러워 눈을 깜빡였다.

태화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다 놀면 집에 데려다줄게요."

***

태화는 유현을 커다란 소파 한가운데 앉혀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삼 초 전까지 그를 보고 있었는데 그만 놓쳐 버렸다. 어디로 간 거야…. 소파에 앉으면 집 구조가 완벽히 파악되는 유현의 소박한 오피스텔과는 달랐다. 유현은 뒷목을 긁적이며 덩그러니 앉아 이리저리 바쁘게 눈을 굴렸다.

강박적인 결벽증이 있다더니 무지하게 깨끗하네. 사람을 쓰는 거겠지? 이 큰 집에서 이 정도의 청결도를 유지하려면 온종일 청소만 해도 하루가 모자랄 것 같았다. 사람을 쓰는 게 아니라면, 그 커다란 몸으로 몸을 구기고 앉아 틈새를 닦고 장식장의 먼지를 털고….

"그럴 리가 없지."

보통 사람들이 가질 만한 편견의 수준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유현은 갑자기 나타난 태화를 보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뭐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아, 무슨 발소리도 안 내고 다녀요…."

"먹어요. 아직 식사 전이라면서."

그리고 유현의 앞에 놓여진 건 샐러드였다. 오면서 식사 전이라는 말을 하긴 했는데, 예전에 다이어트 중이라 아무거나 못 먹는다는 말을 기억한 건지 샐러드를 만들어온 것이었다.

"직접 했어요?"

"이 정도야."

유현은 샐러드 그릇을 받아들고 슬쩍 물었다.

"…직접 설거지도 하고 그래요?"

태화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다가 질문을 듣곤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질문 취소."

한참 포크를 쥐고 야채와 과일을 우물거리던 유현이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왜요?"

"대본 가져올 걸 그랬어요. 궁금한 거 많았는데."

"전화로 물어보면 되죠."

"문자나 전화로는 해결이 안 될 거 같아서요. 아깝다."

"걱정 그만하고 좀 먹어요."

"네?"

"내가 보기엔, 그 속도로는 그거 오늘 안에 다 못 먹어요."

유현이 먹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같은 양으로 만들어온 태화의 그릇은 거의 비어 있었다. 겉보기엔 음식에 전혀 욕심이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저번에 호텔에서도 느낀 거지만, 음식을 의외로 잘 먹는다 싶었다.

새것과 다름없는 제 그릇을 내려다보던 유현은 경쟁심을 느끼고 포크질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화가 칭찬하듯 탄산수를 밀어주었다.

그릇이 깊었는지 끝이 나지 않는 샐러드에 이미 포만감이 대단했는데, 칼로리가 낮은 과자라며 디저트에 커피까지 먹고 나니, 제가 생각해도 식사를 하기 전과는 확연히 기분이 달랐다.

이 타이밍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태화는 배를 문지르는 유현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까 회사에서, 무슨 일이었어요?"

가만 보면 제게 궁금한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유현에게 이것저것 듣고자 하는 게 늘 많았다. 오늘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집에 끌고 와 샐러드까지 해다 바친 건가 싶으면서도, 그 노력에 입을 열 마음이 생긴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유현은 고자질을 하는 기분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털어놓았다.

"재계약 안 하겠다고 말했어요."

그게 끝이 아닌 걸 안다는 듯 태화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멤버랑 다퉈서 홧김에 그런 거라서, 좀 후회되기도 하고."

"멤버랑은 왜 다퉜는데요?"

"저 때문에 컴백이 늦어졌거든요. 다른 팀 컴백 때문에 플랜이 밀린 줄 알았지, 회사에서 제 드라마 촬영 끝날 때까지 컴백을 미루고 있었을 줄은…."

"같은 그룹이라도 항상 같이 활동하는 게 아닌가 봐요? 난 잘 몰라서."

"그게 아니라, 상반기에 저 때문에 조금 시끄러웠잖아요. 그래서 절 빼고 활동하기로 했거든요."

"멤버들이랑만 합의한 거면 그럴 수 있죠."

"아뇨. 탈퇴는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는 정도로 해두자는 건, 오히려 회사에서 먼저 제안한 거예요."

"멤버들은 고유현 씨가 활동을 중단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 언질도 없이 회사에서 컴백 시기를 고유현 씨 촬영 스케줄에 맞추고 있어서 멤버들의 오해를 샀다는 거네요?"

"바로 그거예요."

태화는 얘기를 듣자마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연일 하락세에 이미지를 깎아 먹을 때의 유현이야 크게 불안하지 않았겠지만, 이제 주가를 올릴 일만 남았으니 재계약을 하지 않고 회사를 나갈까 봐 급해져선 그룹 활동을 빌미로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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