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49.
"그래서, 멤버들은 뭐라고 해요?"
"회사에 말 좀 잘해 달라고 그러죠."
"그 말에 다투진 않았을 거고."
"저밖에 모른다고요. …원래 리더 형이랑은 사이가 좀 안 좋아요. 그래도 대표님한텐 좀 더 생각해 보고 얘기할 걸 그랬다 싶은 거예요. 리더 형 말이 너무 서운하고 화가 나서 일단 질러 버린 거거든요."
태화가 유현의 매니저와 연락을 할 때 심하게 싸고 돈다는 인상을 받곤 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이런 성격이 유지될 수가 있었다. 1년마다 갱신하는 계약으로 인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던 당사자가 이렇게 물러 빠졌으니 주변에서 이용해 먹고 싶어하는 건 당연했다.
유현이 회사와 멤버들에게 어떤 기대와 미련을 가지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태화가 보기엔 부질없었다.
"저밖에 모른다는 말은 정말 염치가 없네요.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든지. 재주 부리는 곰한테도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동안 회사에서 절 집중적으로 푸쉬 해준 게 불만이 쌓였나 봐요."
"고유현 씨 혼자 고군분투한 거겠죠. 남들은 십 년에 하나 쓸까 말까 한 계약서를 매년 쓰는데 번번이 성과를 내는 건 저밖에 모르는 게 아니고."
무작정 두둔해주기만 하는 태화를 가만히 보다가 유현은 그냥 웃어버렸다.
외부에서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기분이라 말을 삼갔고, 멤버들과는 그렇게까지 유대가 깊지 못했고, 가족에게는 걱정을 끼칠까 입을 다물었다. 떼를 쓰듯 들어 달라 조르지 않아도 상진은 언제나 유현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동시에 유현의 편이었지만, 큰 문제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초기 대응은 중립적인 편이어서, 회사에 대한 섭섭함을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은 없었다. 솔직히 속이 후련했다.
"덩어리로 보면 회사지만 구성원은 사람이에요. 결국 사람 대 사람의 비즈니스는 신뢰 관계로 이루어지는 거고, 그게 깨지면 더 이상의 조직에 발전은 없죠. 특히, 엔터 산업은 사람이 중요한 자원이에요. 하나하나가 수단이자 목적이 되니까."
"……."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조직에 헌신하면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에요."
농담이라기엔 진지한 눈이었고 진담이라기엔 또 목소리가 가벼웠다.
"뭐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경험담이니까 새겨들어요. 이름도 없는 그룹 그만큼 알리고, 건물까지 올리게 한 건 전부 고유현 씨 공이에요."
묵직한 조언에 유현은 턱께를 긁적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술 있어요? 도수 높은 걸로."
태화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유현이 "맥주 같은 건 배만 부르고 살 찌니까."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
유현은 술자리에서만큼은 말이 앞서는 타입인 게 분명했다. 멤버들 중 가장 주량이 세며 밤을 꼴딱 새우도록 달린 적도 있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양주 몇 방울을 섞은 음료수 몇 잔에 완전 맛이 갔다.
태화가 식탁에 엎드린 채로 잠들 준비를 하는 유현을 흔들자, 간만에 마셔서 취한 거라는 얘기를 일곱 번 정도 반복하고 난 후 벌떡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해맑게 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난 유현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물었다.
"옷은 왜 그렇게 젖었어요?"
"손을 갖다 댔는데 갑자기 물이 이렇게 튀었어요."
욕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유현은 세면대와 원만한 합의에 실패한 듯싶었다.
일부러 물을 뿌려도 저렇게 젖지는 않겠다 싶을 만큼 티셔츠를 축축이 적셔 나오더니, 이젠 그 젖은 티셔츠를 입은 그대로 소파에 누워 가슴 위에 손을 모으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태화의 눈에는 너무나도 기이한 무엇이었다. 태화는 시원한 온도의 유리 테이블에 뜨거운 팔을 척 올리고, 턱을 괸 채로 그 기이한 무엇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해독이 빨라 잘 취하진 않았지만, 그 빠른 해독 능력 덕에 알코올이 들어가기만 하면 몸은 금세 뜨거워졌다. 태화는 서늘한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
유현은 만취해서도 대본 걱정이 되는지 연신 중얼거렸다. 아, 대본 읽어야 되는데… 덜 읽었는데….
"내일 촬영 있어요?"
"…있어요. 오후에."
"그럼 시간은 좀 있네요."
"어지러워…."
"어지러우면 좀 자요. 술 깨면 나중에 데려다줄게요."
"그쪽은 왜 안 취해요?"
"에스퍼들은 잘 안 취해요."
잠이 드는 건지 얼마간 조용하던 유현이 갑자기 옆으로 돌아눕더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얼굴을 받치고서 태화를 바라보았다. 마주 보는 눈높이가 얼추 비슷했다.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은지 유현은 자꾸만 히죽히죽 웃어댄다. 손바닥에 밀려 올라간 볼살이며 튀어나온 입술을 보며 태화도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요."
"그쪽이 에스퍼 아니었으면, 지금 약혼자랑 결혼했을 거 같아요? 재벌들은 정략 결혼 많이 한다면서요."
"내가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아예 약혼도 안 했을 거 같은데."
태화는 몇 년 전 그 시기를 곱씹어 보았다. 에스퍼 중에서도 기량이 압도적으로 좋았던 데다 운도 적잖이 따랐던 시절, 최연소 팀장 타이틀을 달고 있던 때. 그 무렵의 주태화는, 좋게 봐준다면 '특별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우신이라는 배경을 지우고 나서야, 성공이란 단어가 비로소 힘을 갖게 되는, 무결한 가도를 밟고 있던 때. 절친한 친구였던 세준과 약혼을 하기로 결정했던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서로 각인을 하면서.
하지만 만약 자신이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센터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테고, 센터 소속 연구원이었던 세준과 가까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약혼 얘기가 오갔다면, 그 대상은 세준이 아니라 그의 여동생인 찬영이었을 것이다.
태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혼은 확실히 안 했겠어요.
"그럼 지금 약혼자가 저 같은 사람이었으면요?"
"고유현 씨 같은?"
"만져도 안 아픈 거요."
"자꾸 이상한 걸 묻네요."
"네? 어땠을 거 같아요?"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태화가 고개를 저었다.
"안 했을 거 같아요."
"왜요?"
"걔가 싫으니까."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튀어나온 노골적인 대답에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언제까지 나만 답해요? 나도 고유현 씨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나한테요? 뭔데요?"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고유현 씨는 왜 날 '그쪽'이라고 불러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호칭을 개선할 의지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되물음에 태화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우리 가족들 앞에서도 그쪽이라고 부를 거예요?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참나. 그러는 그쪽은요? 나 보고 꼬박꼬박 고유현 씨라고 그러잖아요."
"'그쪽'은 내 이름이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야 주태화, 이렇게 불러도 돼요? 이름이니까."
말 까는 것보단 낫지. 유현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래요.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낫겠네요."
"뭐가 나아요."
"말 까는 게 낫겠다고.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시원하게 말 놔봐요."
"네? 갑자기요?"
많이 편해졌다고 해도 아직까지 유현에게 태화는 '갑'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쉽사리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고유현 씨가 날 그렇게 어려워하면 누가 우리를 사귄 지 일 년이 된 사람들로 보겠어요. 안 그래요?"
"꼭 말이 편해야만 사귀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전 친한 형 누나들한테도 전부 존대를 한다구요."
"우린 그냥 친한 사이가 아니라 사귀는 사이로 보여야 해요."
"……."
"왜요, 사귀는 척은 해도 말을 놓는 건 못 하겠어요?"
"아니, 못 하겠다는 게 아니라!"
유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술기운에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맨정신에는 절대 안 했을 고민을 하고 작은 도발에도 쉽게 휘말렸다. 일어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유현은 코를 쓱 훔치며 말했다.
"이런 거 잘 못 하지만…."
"잘 못 해도 해 봐요. 하다 보면 편해지겠지."
술에 취한 사람이 으레 그러듯 유현이 볼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술기운을 뱉는 것처럼. 상쾌한 치약 향과 달큰한 술 냄새가 섞인 오묘한 냄새가 태화의 코끝을 어른거렸다. 유현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알겠어요, 그럼." 하고 입을 뗐다.
"그럼 나 또 궁금한 거 물어본다?"
태화는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
질문을 한참 쏟아낸 유현은 졸리는지 길게 하품을 했다.
"졸려요?"
대답은 않고 천진하게 웃어버려서 태화는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근데… 나만 말 놓으니까 조금 재밌다. 이래서 다들 하극상을 저지르는 거구나."
"계속 말 놔요."
"이제 형도 나한테 말 놔. 우리 더 친해져야지!"
유현은 귀여운 선심을 쓰는 와중에도 눈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힘겹게 뜨였다.
"이제 더 궁금한 거 없어요?"
형도 말 놓으라니까, 하고 중얼거리던 유현은 마지막 인사를 고하듯 졸음 가득한 질문을 내놓았다.
"그럼… 센터에서 좋아하던 가이드는 없었어? 진짜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
"음…."
결혼하고 싶은 가이드라. 태화는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워낙 가이드와 인연이 없었다.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형식적으로 매칭된 몇몇 가이드에게 고마움으로 표현이 안 되는 벅찬 감동을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죄다 이용당할 만큼 당한 후 버려져 결국엔 아무 감정도 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센터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을 때도 겨우 스물넷이었다.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확실히 이른 나이다. 세준과 쌍방 각인에도 고작 약혼에 그쳤던 걸 보면, 그때도 결혼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글세, 그땐 결혼을 고민할 나이가…."
너무 조용해서 말하다 말고 눈을 들자 유현이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태화는 설풋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