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임 온 잇-50화 (5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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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아, 진짜 짜증나게…."

"뭐가 그렇게 짜증나."

"자기 침대 놔두고 꼭 내 침대에 와서 이러더라…. 저리 가라고! 진짜 좁다고요!"

"이러면 안 좁지."

"답답해…."

꿈지럭대다가 잠이 깼는지, 여기저기 입술을 박고 살을 깨물기 시작했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태화는 어깨를 떨며 웃는다. 품 안에 가두자 앓는 소리를 낸다.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요. 안 놓으면 어쩔 건데.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숨 막힌다고요. 안 죽게 내가 다 알아서 하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다 물어 뜯어버리기 전에―….

점점 아득해지는 소리에 태화는 순간 뒷골이 서늘해져 눈을 떴다. 시야가 선명해지자 안면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뭐지? 잠든 건가?

두 시간이 지나면 유현을 깨워서 집에 바래다주려고 타이머를 맞춰 놓고 책을 읽던 중이었다. 읽고 있던 책은 손을 떠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10 : 49

11월 30일 X요일]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그 두 시간은 진작에 지나 있었다.

자신이 알람 소리도 못 듣고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얼떨떨한데, 그보다 더 안 믿기는 건 꿈이었다. 잠에서 깨나는 순간에조차 웃어 버릴 만큼 생생하던 꿈.

태화는 포근히 이불에 싸여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유현을 가만히 보다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필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가.

"꿈을 꿔도 무슨 그런…."

헤어나오긴 고사하고 꿈을 자세히 되씹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미약한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다 태화는 불쑥 고개를 들었다. 바깥에서 누군가 비밀번호 패드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화? 못 보던 건데. 낯선 신발에 눈길을 주던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약한 심장마비를 경험했다. 막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태화가 어느새 소리도 없이 현관에 와 있었던 것이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지호는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어우, 미친놈아 놀래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가. 손님 있어."

"손님? 누구?"

태화가 집에 들이는 손님이라 해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부모님은 지금 집에 계신 걸 보고 왔고, 태영은 이 시간에 회사에 있을 테고, 태인은 지호가 들어온 것을 알았으면 버선발로 뛰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연세준?"

"아니."

"아니라고?"

아니면 누군데? 지호가 눈으로 되물었다. 태화는 알려줄 마음이 없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집에 낯선 사람 들이기 싫다고 본가에서 보내주는 가정부도 마다하고 심심하면 청소만 하고 있는 놈이….

태화는 진심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작정인지,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 지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너한테 내가 모르는 손님이 있다고?"

"응."

"누군데? 보자."

"자."

태화의 마지막 말에, 지호는 착실히 손을 찾았다. 빈손, 그것도 팔짱을 끼고 있는.

지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도 태화가 말한 '자'에 해당하는 행위는 보이지 않았다. 태화는 그저 제 커다란 몸을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놓고서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어쩌라고. 뭘 주고나 받으라고 하든가."

"받긴 뭘 받아. 안에서 사람 자고 있으니까 나가라는데."

"잠깐만, 뭐? 자? 잔다고? 지금 네 집에서 누가 자고 있다고? 슬리핑?"

물음을 거듭할수록 소리가 커지더니 마지막은 거의 고함이었다.

"쉿."

인상을 찌푸린 태화가 제 입술에 검지를 세웠다.

지호는 경악에 빠졌다. 집주인도 잠들지 못하는 집에서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다니? 제 절친이자 매형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보고 있는데도 정작 태화는 심드렁했다.

"오늘은 가."

"누군데. 여자야?"

"가, 그냥."

사람 심리가 얄궂게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었다.

도통 싫은 것만 넘치고 죽지 못해 살면서 온 세상 인간들을 저에게 가해하거나 혹은 제가 피해를 줄 대상으로만 보는 태화였다. 풀뿌리 하나 키워내지 못할 만치 황량하고 삭막한 심장을 지닌 처남! 그의 거실을 훔친 최초의 표본이 어떤 생물체인지 궁금했다. 말을 섞어보고 싶지만 안 된다면 그냥 확인만 하고 싶었다.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지, 살아는 있는지….

지호는 발돋움을 하며 태화의 어깨너머의 신세계를 엿보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관에서 거실이 바로 보이는 구조가 아니었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창이나 다름없는 태화를 밀치고 넘어가 보기엔 제겐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 번만. 얼굴만. 진짜 나 너무 궁금해서 그래. 이렇게 가면 잠 못 자."

"그럼 자지 마."

지호는 간절히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건 단호한 인사였다.

"잘 가."

학습된 공포에 의해 태화가 손을 뻗으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지경이 된 지호는,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문밖으로 얌전히 내밀렸다.

쾅 닫힌 현관문 앞에서 지호는 밸도 없이 문고리를 잡고 깔짝이다가, 별안간 허공에 코를 쳐들고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술을 마셨어?"

***

대본을 넘기면서 유현은 덤덤하게 생각했다.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겠네.

그날 마시는 첫 커피가 하루의 일진을 좌우하는 것 같다며, 상진이 개인 카페 앞에 정차를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지 십오 분을 경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두 손에 네 잔씩 채운 음료 캐리어를 두 손 가득 든 테이크아웃 손님만 다섯이었다.

어느 카페든 그렇겠지만 이 시간은 한창 바빠 주문이 밀리는 시간이었다. 주문을 하고서 카운터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상진이 눈에 선했다. 시간을 보니, 상진이 호기롭게 외친 당초 계획처럼 근처 한정식집에 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밥 먹고 대충 아무 데나 들러서 드라이브 스루나 하자니까."

작게 중얼거린 유현이 대본을 탁 덮었다. 언제쯤 나오려나. 썬팅이 된 창문에 눈을 바짝 붙였다.

회사가 이 동네에 있을 때부터 이 카페의 단골이 되었으니 벌써 몇 년째. 상진이 음료를 사러 들어가면 유현은 항상 이 각도에서 가게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다소 밋밋해 보이는 저 아치 형태의 문과 조그만 간판이 오히려 이 카페의 유명세에 한몫하지 않았나 생각하곤 했다. 너무 심플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달지….

카페 이름.

깔끔한 외관, 차분하면서도 분주한 매장 분위기, 맛 좋은 음료, 예쁜 식기, 사장님과 직원의 친절함.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너 찾으려고 가 봤어. 가서 무작정 기다려도 봤고."

문득, 며칠 전 취중에 이 카페의 쿠폰으로 실없는 말을 주고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유현은 주량이 대단한 편은 아니지만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필름은 잘 끊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 뱉은 말도 들은 말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이 났다.

*

그날, 하루의 끝. 태화는 약속한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거의 날이 바뀔 때쯤 돼서야 유현을 깨웠다. 유현은 술이 덜 깬 상태로 태화의 부축까지 받아서야 비틀비틀 겨우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습관처럼 한밤중 거리를 눈으로 좇다가 빠르게 움직이는 가로수에 멀미가 날 듯해, 유현은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차가운 창문에 뒷머리를 탁 기대고 풀린 눈으로 말을 걸었다.

"궁금한 거 또 있어요."

"말 놓는다면서."

"아, 그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진짜로 그 쿠폰 썼어? 커피 쿠폰 말야."

유현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말을 반 토막 냈다. 태화의 말대로였다. 말을 놓다 보니 편해졌고 말이 편해지니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집에 있어. 줄까?"

"줘. 그거 때문에 상진이 형이 얼마나 잔소리했는지 몰라."

"내가 그걸 주면, 넌 뭘 줄 건데?"

"으응? 뭘 줘야 해?"

"당연하지. 그건 네가 나한테 준 셔츠값인데."

'십 초 앞으로' 버튼을 연달아 누른 것처럼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몇십 초씩 흘러 있는 듯한 그 취중에도, 그의 발언이 모종의 심술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사고는 가능했다. 유현은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못 쓸 쿠폰인데. 그냥 줘."

"왜 못 써?"

"거기 카페 안 가 봤지? 형이 갈 만한―"

"가 봤어."

"가 봤어?"

"너 찾으려고 가 봤어. 가서 무작정 기다려도 봤고."

"말도 안 돼. 거기 완전 여자들만 가는 곳인데!"

그 카페를 찾아갔다고? 셔츠가 젖은 게 새삼 용납이 안 됐나? 아니면 술을 쏟고 도망친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거? 상체를 푹 숙이고 실없는 생각으로 실실 웃던 유현이 태화의 얼굴을 보려고 돌발적으로 몸을 운전석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안전벨트에 거세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반동으로 창에 옆머리를 부딪치고, 꼿꼿이 머리를 가누던 목은 힘을 잃었다. 창을 따라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졌고 벨트에 압박되면서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유현이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아? 안 다쳤어?"

유현은 안전벨트를 끄르며 웅얼거렸다.

"답답해…."

태화는 왠지 몰라도 뭔가에 당황한 듯 유현을 돌아보았다. 측면 버튼을 눌러 좌석을 뒤로 젖히던 그 시선에 유현이 '응?' 하고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묻자 태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형은 그때 날 왜 찾은 건데? 진짜로 셔츠값 물어내게 하려고? 아니면 그때도 파혼하게 도와달라고 했으려나?"

"……."

"근데 그때 마주쳤으면 나 형이랑 절대 계약 안 했을 걸? 절대 안 엮이려고 했을 걸?"

유현이 하는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오래도록 조용했다. 좌석을 최대한 젖히고 편히 누운 유현이 긴 침묵을 견뎌내다가 술이 약간 깰 정도로 한참이었다.

안 그래도 알콜에 부쩍 닳아져 있던 인내심에, 유현이 고개를 세워 들고 태화에게 재촉하는 눈빛을 쏘았다. 왜 찾았냐고, 말해 보라고!

그를 본 태화는 피식 웃으며 기대에 못 미치는 심심한 말이나 꺼내 놓았다.

"…그러게. 시기가 절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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