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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날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여길 왔었단 말이지."
유현은 턱을 매만지며, 이 아담하고도 귀여운 카페에 몸을 구부리며 입장하는 태화를 상상해 보았다.
저기 저 상진이 형만큼이나 안 어울렸겠는데. 그 커다란 키와 덩치로 여자 손님들이 가득한 곳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을 걸 생각하니, 입술 끄트머리로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그나저나 형은 언제 오는 거야."
문 가운데 뚫린 손바닥만 한 유리 안쪽으로 가게를 탐색하려 했지만 울퉁불퉁한 유리 표면과 자체의 불투명도가 심해 잘 보이지 않았다. 유현은 포기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맞다."
태화에게 전할 소식이 있었다. 생각이 난 김에 유현은 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로 보낼까 하던 유현은, 두 명의 손님이 막 들어간 입구를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촬영 중이에요?"
"아니요. 촬영장 가는 중인데, 갑자기 생각나서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유현은 실수로 종료 버튼을 누르기라도 했을까 봐 서둘러 화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기, 듣고 있어요? 유현이 작게 물었다.
-"듣고 있어요. 말해요.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고요."
"아, 네. 그러니까 여기가 그 카페 앞인데. 그쪽이 그랬잖아요. 쿠폰 쓰러 와 봤다고. 기억나요?"
-"그쪽이란 말이 입에 붙었네요. 이젠 안 쓰기로 했으면서."
사귀는 사이에 오갈 법한 이런저런 호칭 후보들이 있었지만 모두 탈락시키고 남은 건 무난한 '형'이었다. 후보들 전부 유현이 입에 올리기도 전에 미묘한 거부감이 드러나 들키고 말 거란 판단하에 합의한 호칭이었다.
"아, 그랬지. 그쪽이란 말 취소. 형! 형이 그랬잖아요."
유현이 말 잘 듣는 학생처럼 호칭을 고치자 태화가 나직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이미 말했지만 쿠폰을 쓰러 간 게 아니라, 쿠폰으로 때우고 도망간 누구 찾으러 간 거죠."
"도망갔던 거 아니라니까…."
그러고 둘은 한동안 별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까먹었다. 어제와 그제와 그 전날들의 전화들처럼.
카페 이름에 대해서, 태화의 카페인 섭취량에 대해서, 카페인 중독자 상진에 대해서, 잠 못 드는 새벽에 대해서, 또 오늘 있을 촬영에 대해서,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렇게 1화와 14화 장면을 어쩌다 보니 한날에 찍게 되는 이야기에 이르렀고, 들쑥날쑥한 촬영 순서에 따른 여러 가지 고충을 털어놓고 나서야 마침내 용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하마터면 잊어먹을 뻔했네. 17일에 뭐해요?"
-"…17일엔 왜요?"
"별일 없으면 그날 만날까 해서요. 그 다음 주가 가족 모임인데 전략도 짜야 되고."
-"전략씩이나."
"철저하게 대비를 해야죠."
유현은 멈칫했다. 수화기 너머로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혹시, 그날 안 돼요?"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요? 아, 그럼 어떡하지. 24일 전엔 쉬는 날이 없는데…."
-"오전 촬영만 있는 날도 없고?"
오전 촬영만 있으면 그날 만나자는 거였다.
"중요한 약속이에요?"
-"캠프에 예약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설 가이딩 기관이요. 촉박하게는 예약을 바꿀 수가 없는 시스템이라."
"오래 걸려요?"
-"음, 검사나 가이딩 자체가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단지 문제는, 당일 아침에 예약 시간을 알려주면 내가 시간에 맞춰서 가는 방식이라 정확히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예요."
반드시 그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안 만 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놓고 꺼낸 얘기라, 유현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얼마나 당황했느냐 하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입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
어지간히 곤란한 부탁이었는지, 대화의 공백이 길어졌다. 유현이 민망한 듯 목을 긁적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쏟은 말을 주워 담았다.
"아, 안 되는 거면 굳이―"
-"아니에요. 같이 가요."
"…진짜요? 가도 되는 거 맞아요?"
-"될 거예요."
유현은 와아, 기쁨에 찬 탄성을 뱉어냈다.
"지방 촬영하면서 가본 곳 중에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풍경이 진짜 좋더라고요."
-"어디였는데요?"
"거기 어디더라. 제천이랑 원주…."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오만상을 찌푸린 상진이 가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됐지.
유현이 화면에 뜬 시간을 보곤 히익 숨을 들이켰다. 들어간 지 십오 분이 지난 시점에 전화를 걸었는데 이 통화 시간만큼이 더 지났다면 주문에 혼선이 있었든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유현은 하던 말을 끊고 가까워지는 상진을 보며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마무리했다.
"어, 그럼 그날 보는 거예요!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끊을게요!"
폰을 딱 내려놓자마자 상진이 벌컥 문을 밀어젖혔다. 예상대로 샌드위치도 커피와 함께 들려 있었다. 상진은 험상궂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재밌는 일 있어?"
"응? 아뇨?"
"웃고 있잖아. 왜, 뭔데. 혼자만 웃지 말고 같이 웃자. 나도 웃고 싶어."
"내가요? 안 웃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진의 몸에서 형형한 기운이 풀풀 날렸다. 유현이 입꼬리를 내리고 시치미를 뗐다.
"근데 형,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알바생이 바뀌었나 봐! 에잇, 저 앞에 스벅이나 갈걸!"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그때 유현이 쥔 폰의 검은 화면이 밝아지며 수신화면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쯧, 역시 스벅을 갔어야 했는데."
모르는 번호가 열한 자리가 뜨는 것을 본 상진이 혀를 차고 중얼거렸다. 평소보다 힘차게 문을 밀어 닫아주곤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유현은 익숙하게 거절 버튼을 끌어당겨 화면을 없애고 대본을 찾아 펼쳤다. 방금 전화는, 아마도 번호의 주인을 확인하려는 전화일 것이다. 데뷔하고 나서 한두 통 받아본 것이 아니었다. 또 어딘가에서 번호가 알음알음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슬슬 번호를 바꿀 때가 됐나.
"이것만 마시고 가자."
"웬일로 아이스예요? 형 안 추워요?"
"속에서 열불이 나!"
"뭔데요? 알바생이 형한테 실수했어요?"
"그런 거 아니야!"
유현은 걱정스럽게 음료를 한 모금 빨아들이다가, 빨대에서 입술을 떼고 상진에게 물었다.
"어? 형 거랑 내 거 바뀐 거 같은데요? 달아요."
"아니야. 네 거 맞아. 넌 이제 살 그만 빼."
"형이 웬일로 그런 말을 해요? 아이돌은 말라야 보기 좋다면서요."
"지금은 아이돌 아니고 배우잖아. 촬감님이 너 여름에 비해서 살 너무 많이 빠졌다고 하시는 거 들었어. 백감독도 네 살 좀 찌워 달라더라. 많이 먹어, 더 먹어."
세상에, 상진이 형한테 데뷔 5년 만에 살찌라는 소리를 다 듣네. 유현이 눈을 굴리며 이마를 위로 밀어 올렸다.
상진은 사람이 좋은 것과 별개로 가혹할 정도로 충실한 다이어트 감시자였다. 본인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면 잠깐 풀어주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가끔 그랬고, 기본적으로는 아주 가차 없는 매니저였다.
"아, 내가 아까 말해줬지, 17일 너 쉰다고. 그날엔 그냥 많이 먹고 누워만 있어. 알았지? 운동도 하지 말라고."
"……."
"왜 아무 대답이 없어?"
"그날 약속 있어요."
"어디 가게? 피곤하다면서?"
속이 타는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상진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며, 말이 없는 유현을 홱 돌아보았다.
"너 한 달에 며칠이나 쉰다고? 나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어."
"이미 약속했어요."
"취소해."
"못 해요."
"누구 만나는데?"
재깍재깍 답을 하던 유현이 의도적으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상진이 눈치를 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사귀는 사이라도 그렇게 자주 만나면 안 좋아."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거 아닌데요? 촬영 있는 날은 안 만나요. 근데 요샌 촬영 거의 매일 하잖아요."
"그래, 거의 매일 촬영하면서 딱 하루 쉬는 그날 꼭 만나야겠냐. 이브에도 만나기로 했다면서."
상진의 말만 들으면 자신은 연애에 빠져 허구한 날 데이트할 궁리만 하는 사람이었다. 유현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계약으로 맺어진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이미 약속을 해버렸어요."
"그럼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면서…."
아니다, 바깥에서 만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집에서 만나면 위험하니까. 상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뱉었다. 유현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뭔 일이야 있겠나 싶은데, 또 혹시 몰라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단 말이지. 한창 바쁜 때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굿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원."
"형?"
"여자보다 남자가 더 겁난다고.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눔 자식이 눈 돌아서 너한테 달려들어서 몸이라도 상하면 촬영은…."
저 형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만히 듣던 유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형!"
"아이고, 깜짝이야. 왜!"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다, 달려들긴 무슨…."
제가 뭔 소리를 했냔 듯이 상진이 멀뚱멀뚱 보더니 아아, 소리를 내며 설명했다.
"아, 내가 너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너 아직 못 들었지?"
"뭘요?"
"네 그분한테 먼저 말을 해두긴 했다만…."
"그러니까 대체 뭘요?"
"스읍, 그래, 너도 알고는 있어야지!"
유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저번에 잡힌 걔가 그러더라고. 자기 말고도 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혼자만 잡힌 거 너무 억울하다고 말야."
"사생이 더 있었다고요?"
"그래, 심지어 자기네 무리가 아니라 아예 처음 보는 남자였다는데…. 서로 정보 공유하자고 접근해서 얘길 해보니까, 너랑 잘 아는 사이 같댔어."
"남자? 처음 보는 '남자'요?"
"응. 남자라고 하니까 이상해서 나도 인상착의를 자세히 물어봤어. 쯧,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지."
"……."
"그러니까 수상한 놈 보이면 괜히 엮이지 말고 그냥 바로 튀어. 요새 미친놈들 많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덩달아 심각해져서 이야기를 곱씹던 유현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돌연 열이 돌았다.
주체가 불분명해 오해할 만했다고 해도, 상진의 말을 어떻게 그런 의미로 연결 지을 생각을 한 건지! 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진짜 애인이라도 됐다고 생각한 거야 뭐야. 유현은 민망함을 숨기려 괜히 헛기침을 했다.
상진이 몸을 바로 하고 시동을 걸다가 백미러로 유현의 얼굴을 보곤 물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더워?"
"조, 좀, 덥나?"
"조수석 창문 좀 열어줄까? 옛날부터 유현이 넌 겨울에도 더위를 타더라. 이상할 정도로 몸에 열도 많고."
출발하자 열린 창으로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시뻘게진 얼굴은 좀처럼 열이 떨어질 생각을 않는데 몸은 으슬으슬 추웠다.
"……."
유현은 티 나지 않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옆자리 담요를 끌어와 무릎에 덮고 아이스 음료를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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