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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심각한 얘기일까 하고 귀를 기울이던 영준과 유현은 싱거운 대답에 동시에 탄식을 터트렸다.
"하는 거 없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는데, 그 사람들 뜨면 촬영장 묘하게 조용해지는 거 알아?"
"그랬어요? 못 느꼈는데."
"포스가 남다르긴 해. 키 때문인가?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지나갈 때 보니까 내가 더 작더라?"
민아의 말에 영준이 동조했다. 가이딩 시설에서 촬영을 할 때만 경호원들이 파견되어, 아직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유현은 점점 궁금해졌다. 그런 유현의 눈에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저를 바라보는 남자가 들어왔다.
"맞다, 유현아."
"네?"
"내가 저번에 부탁했던 거 언제 될까? 우리 조카가 목이 빠져라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서."
영준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성인이 된다는 영준의 조카는 삼촌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유현과 마인 멤버들의 사인이 담긴 시디를 요구했다고 한다. 부탁을 받은 지는 꽤 됐는데 유현이 넘겨주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아! 형, 저 그거 차에 있어요.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아냐아냐! 지금 당장 달라는 건 아니었어!"
"제가 나중에 잊어버릴까 봐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한 건데."
"한정운, 내 건?"
"누나 것도 가져올게요. 금방 갔다 올게요!"
유현이 커피를 내려놓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밴으로 달려가면서 남자가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두 개의 사인 시디를 가지고 영준과 민아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기."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저를 쳐다보고 있던 그 남자였다. 누군지 몰라 유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계속 지켜봤는데, 맞는 거 같아서. 맞지? 유현이."
"네?"
인상이 사나운 남자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현은 금세 좁혀지는 거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몰라볼 뻔했어. 전이랑 너무 달라져서…."
"누구세요?"
"역시 안 변했네. 그동안 연락 못 한 건 미안해. 근데 우리 사이에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말자. 나도 뺑이 치느라 바빴다니까.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어."
"……."
"와아, 네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이야. 넌 꿈을 이룬 거네? 그때 네가 말했을 때 비웃어서 미안."
그 순간 며칠 전 당부하던 상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번에 잡힌 걔가 그러더라고. 자기 말고도 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혼자만 잡힌 거 너무 억울하다고 말야.
서로 정보 공유하자고 접근해서 얘길 해보니까, 너랑 잘 아는 사이 같댔어.
그러니까 수상한 놈 보이면 괜히 엮이지 말고 그냥 바로 튀어. 요새 미친놈들 많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소름이 돋았다. 유현은 남자에게 잡힌 팔을 힘줘서 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경찰 부를 겁니다."
경계하며 위아래로 훑어보자 남자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한 발 물러섰다.
"유현아. 나 정혁인데…."
"사람을 잘못 보신 거 같네요."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꿈뻑거리는 남자를 두고 유현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 뒤편에서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밴이 오피스텔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는데도 유현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아까 촬영장에서 그 남자… 얘기해 말아.
유현이 갈팡질팡하는 동안에 차는 곧 끼익 소리를 내며 로비 앞에 정차하고, 상진은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내일 늦지 말고." 하며 작별 인사 아닌 작별 인사를 건넨다.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내릴 듯 말 듯 시간을 끌던 유현은 결국 가만히 상진을 불렀다.
"형…."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상진이 의아한 듯 뒷자리를 돌아다본다.
"왜, 무슨 일 있어?"
"……."
"왜, 뭔데? 응?"
재차 묻는 상진의 얼굴이 금세 수심이 어렸다. 그를 보자 유현은 사실대로 말하기가 주저되었다. 말해도 될까….
상진이 어떤 매니저인가. 극성과 유난이 일상인 매니저 아닌가. 아까 본 남자에 대해 말하면, 남자 사생이 촬영장을 뚫었다며 펄펄 뛰는 것은 당연하고, 당장 내일부터 모든 일에 피곤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울 것 같았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유현은 낮에 마주친 남자 얘기를 하는 대신 다른 말을 내놓았다.
"오피스텔 말고 당분간만 다른 데서 지낼까요?"
상진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었구나."
"아니, 뭐 꼭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구요. 그냥…."
말끝을 흐리는 유현을 보고선 무슨 생각인지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더니 상진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음…. 아니면, 유현아."
"네?"
"형이 너 임시로 지낼 곳이라도 알아볼까? 본가는 옮긴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되도록 안 가는 게 맞는 거 같고… 간다면 형 집이랑 가까운 곳으로."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음에도, 유현은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상진이 너무나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응, 유현아? 옮길래?"
한 번씩 상진을 대신해 와 주는 현욱과 수환이 언제 한번 말한 적이 있었다. 지 대표가 일부러 괴롭히려는 건지, 상진에게 쓸데없는 일 처리까지 떠넘기는 바람에 쉬는 날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유현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상진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얘기가 과장이 아닌 듯싶었다. 회복될 새 없이 몰아치는 스케줄 대부분을 함께 하는 탓인지 눈 밑이 푹 꺼져 있고 볼은 패였고 피부는 까칠했다.
세상에, 저 지경이었단 말이야? 유현은 새삼스럽게 놀라워했다.
집을 옮기면 결국 그것도 상진에게는 업무가 될 것이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이 시기에 번거로운 일거리까지 얹어주는 셈이 된다.
그래, 집에 드나드는 악질 사생도 잡아들였고…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니 촬영 끝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텨보지 뭐.
어차피 촬영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집에 머무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짧아져,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잠을 자고 씻는 것이 전부였으니 집을 옮기는 것까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현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귀찮을 거 같아요."
의심을 놓지 못한 상진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일 없는 거 맞아?"
"저번에 형이 말한 거, 괜히 겁나서요. 수상한 놈 있다던 거."
"혼자 올라가기 무서워? 형이 같이 올라가 줘?"
"아니에요. 혼자 가도 돼요. 무슨 일 있으면 형한테 전화할게요."
"…그래, 바로 해. 내 번호 띄워 놓고 올라가."
"알겠어요. 형도 얼른 들어가요."
상진은 걱정이 되는지 곧바로 떠나지 않고, 유현이 로비로 들어간 뒤에도 조수석 창문을 열고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유현은 거울로 피곤에 전 얼굴을 확인하다, 알림판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팔랑거리는 종이를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빅 세일. 차렵이불을 80퍼센트까지 할인한다는 홍보 전단이었다. 근처 이불 가게에서 관리인 몰래 붙인 듯했다. 내일 아침 발견되면 가차 없이 버려질 전단지를 떼서 손에 들고 중얼거렸다.
"벌써 이렇게 됐네."
이렇게 어영부영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태화와 약속한 가족 모임이 당장 사흘 뒤였다.
지난주에 그렇게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그날 만난 건 분명 목적이 있었다. 가족 모임을 어떻게 잘 넘길 것인가, 함께 의논해 보고 전략을 짜보자는, 그런 목적.
그런데 돌이켜 보면, 태화를 따라 캠프에 놀러 갔다가 밥이나 먹고 돌아왔지, 정작 해야 할 얘기는 하나도 못 한 의미 없는 만남이었다.
그날 그 식당에서 걔네만 맞닥뜨리지만 않았어도….
"애, 애인이 이런 거 안 좋아해!"
"……."
"아, 아니, 아, 안 좋아해요…."
눈은 왜 감고 말은 왜 더듬었는지.
식사를 하는 내내 횡설수설하다가, 굳이 시간 내어 만나려 했던 목적도 새까맣게 잊고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이 만남을 파했었다.
그리고 헤어지던 차 안에서.
"없었어요. 좋아하던 사람."
"……."
"궁금해했잖아요."
쫓기는 사람처럼 인사를 하고 도망치려는 유현의 등 뒤로 태화가 툭 던진 대답이었다.
유현은 전단지로 얼굴을 부쳤다. 겨울이라 미미한 움직임에도 찬바람이 일었다. 대체 누가 그걸 궁금해했다고. 좋아하던 가이드 없었냐고 물은 거지. 엘리베이터가 도착음을 알리며 양쪽으로 벌어졌다.
유현은 상기된 얼굴이 비친 거울을 외면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연갈색 눈동자 같은 건 생각나지도 않는다고 애써 부정하면서.
***
돈을 벌어 얻다 쓰냐고 타박을 듣는 게 일상일 정도로 명품 소비에는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유현은 곧 데뷔 육 년 차로 접어드는, 필요 이상의 환대와 호의가 익숙한 연예인이었다. 게다가 저와는 다르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정효에게 이끌려 백화점 명품관을 제집 드나들 듯했던 때도 있었으니, 명품 브랜드의 VIP가 어떤 서비스를 받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VIP 고객을 위해 패션쇼를 진행한다거나 폐점한 매장을 연다거나…. 이런 건 건너건너 들어만 본 재벌의 기행이었지, 그 기행을 실제로 목격할 줄은, 아니 그 기행을 벌이는 주인공이 되어볼 줄은 몰랐다. 유현은 이게 다 뭔가 싶었다.
넥타이를 매는 데 익숙지 않아 보였는지 직접 매만져주려고 직원이 손을 뻗어 왔다. 유현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스타일리스트 손에 옷이 입혀지고 벗겨지는 게 익숙한 아이돌치고는 과한 반응이었지. 제가 생각해도 새삼스러웠다. 유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제, 제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친절을 거절당해 무안할 법도 한데, 직원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오히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 주었다.
유현은 광택이 도는 타이를 어설프게 매만지면서, 거울에 비친 태화를 불만스럽게 쏘아보았다. 멀찍이 서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태화는 그것이 무언의 구조 신호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조금 기쁜 얼굴로 걸어왔다. 바로 뒤까지 바싹 붙은 태화는 눈치 없이 물었다.
"어때요?"
어떻긴 뭐가 어때. 유현은 거울 속의 태화와 시선을 마주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은데."
"아닌데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태화는 미소를 띤 채로 유현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더니 볼품없이 묶인 넥타이를 스르륵 풀어낸다. 능숙한 손길로 매듭을 만들면서 물었다.
"뭐가 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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