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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 온 잇-58화 (5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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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괜찮은 게 아닌데? 지금 식은땀 흘러요."

"잠시 밖에 좀."

"같이 가요."

"혼자 다녀올게요."

태화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낮게 읊조리고 소매를 잡는 유현의 손을 떼어내더니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쪽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얼마 못 가 휘청이더니 멈춰 서서 주변 의자를 붙잡고 중심을 잡는다. 아닌 척 유현과 태화를 의식하던 사람들이 대놓고 고개를 돌렸다. 웅성거림이 유현에게까지 닿았다.

술기운이 달아난 유현이 빠르게 다가갔다. 태화를 부축하려 하자 손이 닿기도 전에 피했다.

"뭐야, 왜 그러는데요."

"저리 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뒤편의 소란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상태는 더 심각해져 이제 태화의 입술이 아예 파리하다.

"혼자 서 있지도 못하면서, 어딜 가라는 거예요. 여기 나 잡아요. 네?"

왜인지 숨을 가쁘게 쉬던 태화는 눈을 질끈 감더니 무릎이 꺾였다. 유현은 얼른 그를 붙잡아 제게 기대게 했다. 또 유현을 밀어내려고 팔을 잡아빼는 걸 보고 유현이 신경질을 냈다.

"좀 떨어져 있―"

"혼자 서있지도 못 하면서! 가만있으라고요!"

사람 몸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나. 제가 당장 붙잡고 있는 건 사람의 신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좀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화도 힘이 빠지는지 점점 무게가 더해졌다.

"어, 어떡해…. 어떻게 해야 돼요? 구급차 부르면 돼요?"

"구급차, 안 돼…."

"그럼? 그럼 뭐 해야 돼요? 아직 쓰러지면 안 돼요!"

"……."

"뭐 해야 되냐니까?"

그 순간 나눠 지고 있던 무게가 온전히 쏠렸다. 태화가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덩달아 유현의 다리도 같이 꺾였다. 이대로는 태화를 바닥에 처박게 될 것 같아 유현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이렇게 모였는지 몰라도 그들의 주변을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구경났네, 진짜!

유현은 마침 근처에 서 있던, 알고 보니 태화의 형님이었던 남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좀 도와주세요."

"……."

"진짜 무거워서 그래요."

그가 움직이려 하자 그 뒤에 서 있던 태화의 누나가 뭔가 귓가로 속삭이며 꽉 잡아 세운다. 아니, 자기 동생이 쓰러졌는데 뭐 하는 거야…. 유현은 이를 사리물었다.

결국 혼자서 태화를 끌고 의자에 앉힐 수밖에 없었다. 팔도 다리도 후들거렸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졌다. 유현이 의자 뒤에 서서 쓰러지지 않게 태화의 어깨를 붙잡고 숨을 내뱉었다.

에스퍼라 구급차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거겠지. 그럼 대체 어디로 연락을…. 한참 전에 주량을 넘긴 상태라 두뇌 회전이 평소보다 현저히 느렸다. 머리가 온통 백지였다.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복잡한 마음에 너무 생각 없이 술을 들이부었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것을 가져온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등장했다. 유현이 반색하며 덜 고른 숨으로 물었다.

"혹시 여기 이 사람 데리러 오셨어요?"

말을 걸 줄은 몰랐다는 듯 두 남자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은 한숨을 돌리며 의자를 가리키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둘 중 베테랑으로 보이는 남자가 동료에게 잠깐 있어 보라며 척척 걸음을 옮기더니, 눈을 뜨지도 못 하는 사람의 귓가에 팀장님, 팀장님, 하며 속삭였다.

장난하나…. 구급 대원들처럼 의식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사람을 깨운다기에도 답답한 꼴이었다. 가만 지켜보던 유현이 결국 허리에 손을 올리며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지금 뭐 하세요?"

"예?"

날카로운 물음에 남자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거기에서 답답한 건 유현 하나만이 아니었는지 옆쪽에 서 있던 동료가 "선배님, 뭐하십니까?" 하며 움직였다. 그가 태화에게 손을 뻗자, 베테랑 쪽이 소리쳤다.

"안 돼!"

유현도 동료도, 주변에 선 구경꾼들조차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었다. 동료는 태화의 팔을 어깨에 짊어졌다가 얼이 빠진 얼굴로 베테랑 쪽을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긴 정적이 흘렀다. 눈을 굴리던 동료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당황한 선배를 두고 환자를 부축해 들것에 눕혔다. 태화를 단지 무게가 나가는 상자를 운반하듯 쉽게 해내는 것에서, 유현은 이들이 센터에 나왔음을 확신했다. 정신을 차린 선배 쪽도 그를 따라 동료의 반대편에 자리했다.

들것의 뒤를 유현이 따랐다. 입구 옆에 못 보던 사람이 서 있었다. 들것이 드나들기 쉽도록 열어둔 게 이 사람인 듯싶었다. 빙그르르 둘러싸고 관람하던 사람들과 달리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준 사람이었다. 어딨지. 유현이 감사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간 건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겨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불행 중 다행으로 태화의 안색이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겉모양은 앰뷸런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에 태화를 무사히 태우고, 뒷문을 탁 닫자 긴장이 풀렸다.

유현이 한숨을 돌리는데 선배라고 불리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거 같아서…."

"네?"

어리바리했던 대처에 불만과 경계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유현은, 그가 머뭇거리며 꺼내는 말을 듣고선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신기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런 눈빛을 보내는 백이면 백, 팬은 아니지만 유현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알은체를 하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었다. 제가 술을 왕창 마셨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유현은 얼른 입을 막았다. 삐딱하던 자세도 고쳐 섰다.

"혹시―"

"죄송한데 사인은 못해 드릴 거 같아요. 상황이 이래서. 사진도 못 찍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손까지 내젓는 유현의 단호한 거절에 남자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벙긋거렸다. 때마침 동료가 운전석을 열면서 소리쳤다.

"선배님, 출발 안 하십니까?"

주춤주춤하던 남자는 아쉬움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유현을 자꾸만 돌아보다가 조수석으로 사라졌다.

차의 뒤꽁무니가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유현은 하늘을 보면서 숨을 내쉬었다. 훅 입김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제야 제가 외투도 없이 나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뒤늦게 찾아오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고 건물의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따라 나와보지도 않던 가족들이지만 어쨌거나 경과를 알리긴 해야 할 듯싶어서였다.

돌아선 그곳에 언제부터였는지 태화의 형제들이 나와 있었다. 빨리도 나오셨네들.

"방금 보셨는진 모르겠지만, 아까 그 사람들이 무사히 데려갔습니다. 아마도 센터인 것 같아요."

둘 다 대꾸가 없이 보기만 했다. 태영은 제 동생은 걱정되지 않는지 오히려 유현을 자세히 뜯어보는 관찰자의 눈이었고, 태인은 왜인지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늘 할 일은 끝낸 것이니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몇 걸음 걷자 뒤에서 태인이 다가와 유현을 붙잡고 말했다.

"데려다주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한데, 혼자 가도 충분해서요. 그럼 이만."

태인은 더 붙잡지 않았다. 유현은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고는 택시가 선 쪽으로 걸었다. 긴장이 풀린 걸음이 비틀거렸다.

***

"난 이거 말고 다른 거 했으면 좋겠어."

언제 왔는지 지호가 뒤에서 볼멘소리를 냈다. 태영이 돌아보자 불만스럽게 태영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말곤 딱히 내놓을 게 없어서."

"그건 우리 결혼식 때 입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더 의미가 있는 거지."

굳이 하겠다니 말리진 않겠지만 별로 달갑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태영은 지인의 부탁으로 호텔 자선 경매에 기증할 드레스를 찾고 있었다. 꽤 오래 고민 중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선 경매에 붙이는 것들이라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어야 비싸게 팔리는 법이고, 귀찮다고 아무거나 내놨다가는 기증을 하고도 욕먹기 십상이었다. 뭘 내놓는 게 좋을까.

"이 드레스는 어디서 입은 거야?"

태영이 돌아보았다. 지호의 손에 들린 건 금빛의 이브닝 드레스였다.

"아, 그거. 약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네."

"약혼식? 누구 약혼식? 누나 약혼식?"

지난번 태화의 남자를 만난 후로 지호는 걸핏하면 눈을 치떴다. 의심하고 추궁하는데도, 놀리는 재미가 있어 애매하게 말을 돌리며 애간장을 태웠다. 요 며칠 태영의 낙이었다.

잠깐, 약혼식? 뭔가 중요한 게 떠오를 듯 말 듯했다.

"약혼식이라…."

"누구 약혼식이었는데. 어?"

"조용히 좀 해 봐."

태영은 손을 뻗어 보채는 남편의 입을 막은 뒤 몇 걸음 멀어졌다. 머릿속에서 사라지려는 잔상을 좇았다.

용기가 없어서요.

"아.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호는 한참 심각한 태영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찌푸린 미간을 허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엘리베이터?"

"어디서 본 거 같다 했더니."

"응? 뭘?"

태영은 지호 손에 들린 드레스를 뺏어 들어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태화가 데려온 그 남자 말이야. 언제 봤는지 기억났어."

"언젠데?"

"태화 약혼식하던 날."

몇 년 전이었다. 짧게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날, 태화의 약혼식이 있던 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독단적인 태화의 선택도 선택이지만, 동생의 약혼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약혼식에 빠지겠다고 선언한 쌍둥이 형제인 태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뭣들 하는 거야? 집안 걱정하는 건 나뿐이지? 전화로 짜증스럽게 쏘아붙였지만, 태화도 태인도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호텔로 오는 길에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가라앉혔더니 호텔 주차장에 내려서는 더 가관이었다. 태영을 열 받게 하기로 작정을 한 건지, 태화는 약혼식이 끝나면 곧바로 센터로 돌아가 보겠다는 통보까지 해 왔던 것이다. 진작에 와서 누나를 에스코트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태영은 간만에 보는 태화의 면전에 가장 먼저 어떤 말을 뱉어야 속이 시원할지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이 짜증스러운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영의 눈앞에 울고 있는 미청년, 아니 미소년이 나타났다. 아무리 간소하게 진행한다고 해도 엄연히 예식이니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어른들께 인사를 할 시간까지 고려하면 도착이 아주 이르지는 않았다. 태영은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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