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화 (1/166)

1화

꼭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영서는 그 순간 생각했다.

지난 주말 저녁에도 친구 녀석과 영화관을 나서며 시시덕거렸던 영화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영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교통사고의 주인공들은 대체 왜 멈춰 서서 차를 피하질 않느냐며 불만 섞인 비웃음을 토해내는 타입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하듯이.

-꺄아아아악!!

-으아악! 누가! 누가 119 좀 불러요!

-세상에, 세상에…

너 나 할 것 없이 영서를 둘러싼 사람들이 삽시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비로 젖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 구겨진 체육복처럼 힘없이 내동댕이쳐진 영서는, 온몸을 불로 태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나, 나는… 왜… 굵은 빗방울인지, 핏방울인지 모를 것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 쓰라렸다. 느리게 눈을 감으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퀴가 뒤집힌 채 옆으로 쓰러진 승용차 한 대와, 자신이 들고 있던 책가방, 부서진 핸드폰, 그리고 사람들의 동동거리는 신발들뿐이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한 여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고, 단화를 신은 어떤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막 퇴근을 한 참인지 구두를 신은 정장 바지 차림의 남자의 발은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들 진정하라고 나름 침착한 척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 하나 달싹일 수 없었다. 맞다, 나, 교통사고 당한 거지. 그래서 이렇게 걸레짝이 된 몸으로 누워있는 거지. 영서는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어떤 발이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회사원? 남자인가? 자동차의 잔해 때문에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 발은 영서에게 곧장 뚜벅뚜벅 걸어 다가온다.

의문도 잠시, 그 발은 자동차 잔해를 가볍게 통과해 영서의 얼굴 앞에 멈춰 선다.

어라, 방금…

‘권영서, 18세. 뭐야, 왜 이렇게 어려?’

영서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발의 주인을 올려다보려 노력했다.

‘어, 아냐 아냐, 힘들게 눈 뜰 필요 없어. 어차피 금방 갈 거거든? 눈 좀 붙이고 있어, 아가, 알겠지?’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젊은 남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것이 거슬렸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영서의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야자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너무나도 졸렸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피로했다. 으스러진 몸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듯, 영서의 눈꺼풀은 침잠하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영서가 눈을 뜬 것은 꼬박 열흘을 자고 일어난 뒤였다.

물론 정말로 잠을 자고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영서의 부서진 몸을 치료하자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은 것인지. 하지만 영서는 최근 들어 이렇게 푹 잤던 적은 처음이라고 느낄 정도로, 할 수만 있다면 깁스가 둘러진 팔을 쭉 뻗어 기지개라도 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까지 오를 정도로 컸던 그날의 사고는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영서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형 추돌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년, 이 병원 내에서 유명한 영서의 별명이기도 했다. 물론 누구보다도 기뻐한 것은 영서의 부모였다. 영서의 엄마는 거의 탄성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영서의 아빠 또한 연락을 받고 직장에서 바로 병실까지 달려와 영서의 마른 손을 조심스레 잡고 눈물을 떨군 것이다.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것도 모자라 뇌사 상태까지 선고받았던 18세의 권영서는, 평소처럼 반쯤 뜬 눈과 유순한 입매를 달싹이며 어리둥절한 눈으로 모두를 둘러봤다.

“나, 살았어요?”

“그래, 그래 아이고 영서야, 우리 아가,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서야! 우리 아들! 아이고…”

아가…영서는 어렴풋하게 아파오는 머리에 눈을 가볍게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온몸이 깁스 투성이었다. 이건 무슨, 미라도 아니고. 영서의 시선이 제 엄마와 뒤늦게 달려온 아빠, 그리고 놀란 얼굴의 간호사와 의사를 차례대로 거쳐 도달한 곳은.

병실 문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낯선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

그리고, 분명 알 수 있었다.

이 남자, 그때 나를 아가,라고 불렀던 그 남자다.

영서는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박였다.

남자도 그런 영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저씨는, 누구, 세요?”

“…아저씨라니, 영서야, 무슨 말이니?”

“저어기, 문, 옆에…”

기자인가? 아니면 날 구해준 생명의 은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취향 한 번 참 고약하다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색으로 빼입은 남자의 얼굴은 꽤 훤칠했다. 생명의 은인이다 쳐도, 죽었다 살아난 환자가 있는 병원에 저렇게 입고 와도 되는 거야? 자기가 무슨 저승사자도 아니고.

“영서야, 문 옆에 누가 있다고 그래? 응?”

“어머님, 영서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막 깨어난 환자를 그렇게 건드리시면…”

“선생님! 우리 영서, 이제 산 거 맞죠? 지금 아직 정신이 제대로 안 든 거죠?”

“일단 환각이나 환청 문제는 뇌의 문제일 수 있어서 CT를 찍어봐야…”

어른들이 하는 대화의 말소리들은 이미 영서의 귀 너머로 뭉개져가고 있었다. 영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손가락을 들썩거렸다. 아직 손을 들기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긴, 지금의 난 붕대에 칭칭 감긴 미라나 다름없는 꼴이겠지, 싶었다. 수상하게 생긴 남자를 눈으로나마 힘껏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직도 내가 보이는구나.’

무슨 소리야,라고 말로 내뱉기도 전에, 생각은 이미 영서의 뇌를 타고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남자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크게 웃는데도, 병실 안의 그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긴, 임마. 너도 좆 된 거지, 이제.’

영서는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다시 살아난 게 맞나?

아니, 그보다 지금, 나…

눈을 뜬 순간부터 영서는, 그제야 병실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람이 아닌, 그런 모습을 하고 흉내를 내는.

‘귀신’들이.

***

영서는 눈을 굴려-사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그밖에 없긴 했다-문가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먹으로 그린 것 같은 이목구비와 희게 질린 피부를 가진 사내였다. 언뜻 보면 유약해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지만, 그린 듯이 짙은 눈썹과 훤하게 드러난 반듯한 이마 밑으로 부리부리하게 생긴 눈매가 사뭇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거의 문의 높이와 엇비슷한 키와 그에 걸맞은 덩치는 안 그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복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정말 아무도 저 남자를 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는 남자였다.

내가 좆 된 거라니, 대체 그게 무슨 무례한 망발인가. 영서는 나름 상식이 있는 소년이었다. 아무리 나보다 어른이라지만, 나 지금 죽었다 살아난 거 같은데, 지금 중환자실에 저렇게 입고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어 불퉁하게 입안으로 불평을 삼키는 찰나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좀 보게, 그럼 내가 천 살은 어린애 병문안 오면서 뭐 꽃다발이라도 들고 오길 바라냐?

…아무래도, 이상했다. 저 남자, 나한테만 보이는 것도 맞지만…

-이제야 눈치챘나 보네.

남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팔짱 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한 번 딱, 소리 나게 튕기자 영서의 시야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그림자 같은 것들이 일순간에 증발해버렸다. 어딘가 멀리서 미약한 비명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약간 찌르르하며 귓가가 울리고, 잠시 뒤 꼭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치워내기라도 한 듯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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