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일직차사가 영서를 마지막으로 보러 온 것은 영서가 이곳으로 전학을 오던 날이었다. 물론 그것도 꿈속에서 본 것이니 실제로 본 것이라고 하기도 민망했지만, 영서는 당연히 저승사자 정도 됐으면 인간의 꿈 정도는 마음껏 드나들 것이라 치부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괜히 변명을 했다. 정말 그가 꿈을 매개로 영서를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에 대한 꿈을 꾼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만난 일직차사는 평소처럼 흰 얼굴로 영서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꿈속에서 영서는 어째서인지 아직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분명 퇴원을 했기 때문에 꿈인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왠지 나른해서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누워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봐, 꼬맹이. 안 자는 거 알아.
“또 왜요.”
눈을 감으며 불퉁하게 대답하자 그는 낮게 목을 긁으며 웃었다. 그런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그가 애초에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나?
-중요한 얘기를 하러 왔어. 앞으로 바빠질 거라 당분간 얼굴은 못 보겠군.
“무슨 얘기요?”
또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꿈 얘기라든가. 영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기억해 내라고 해도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참나.
-꿈 얘기는 아냐.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주고는 떠나야 할 것 같아서.
“떠난다고요? 저승사자도 출장 같은 게 있나?”
남자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분명 편안한 상황인데도, 그 순간 왠지 눈을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뜨면 눈이 마주치겠지. 왠지 좀 부끄러웠다.
-시간이 별로 없네. 간단하게 말하자면, 권영서 너는 앞으로 많은 영혼들을 만나게 될 거다. 그중에는 악령도, 단순한 잡귀들도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귀신들 중에는 절대 ‘착한 귀신’은 없다는 거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해요?”
-인간들은 참 단순하지. 자기들이 죽어서 남은 영혼 부스러기들이 귀신이 된 건데, 자기를 해치면 나쁜 귀신, 도와주면 좋은 귀신. 귀신에 좋고 나쁨은 없어. 그저… 전부 우주의 섭리대로 한시바삐 관할지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고 육도를 돌게 만드는 것, 그게 우리 사자들의 일이지. 그것에 아무런 유감은 없다.
“…”
-너는 아직도 마음이 너무 여린 게 탈이야. 아마 네 기준에 불쌍한 귀신이라고 생각되면 그저 못 본 척 지나치겠지. 하지만 그렇게 네가 지나친 귀신은 언젠가 다른 사자의 손에 퇴마당해 더 고통스러운 길을 돌아가게 될 뿐이야. 잊지 마렴.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힘’을 가졌으며,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의 경계는 지엄하니까.
영서는 눈을 뜰 수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 남자가 차가운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덮는 것이 느껴졌다.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을 떠 보렴.
뜨기 싫은 영서의 맘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영서의 이마에서 손을 거뒀다. 신기하게도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눈이 스르륵 열렸다. 예상대로 머리맡에 앉아 영서를 내려다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승사자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는 것은 알고 있지?
남자는 정장 재킷 안쪽으로 오른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 보였다. 어딘가 낡은 기색이 보이는, 그러나 더럽거나 훼손된 부분은 없어 보이는 두꺼운 책이었다. 겉 부분은 더 낡은 갈색의 표지로 되어있었는데, 박물관에서나 봤을 법한 실로 꿰매 만들어진 옛날 방식의 책 같았다. 영서는 그 책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이건 네 거다.
“네? 제 거요?”
-그래. 원래는 주인이 따로 있던 거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네가 쓰게 될 명부다. 앞으로 권영서, 네가 할 일은 이 명부를 가득 채우는 것.
영서는 눈을 끔벅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대체?
“제가요? 이걸요?”
-그래. 네가, 이걸.
“아니, 잠시만요, 아저씨! 전 이게 뭔지도 잘 모르고, 애초에 저승사자도 아닌데 명부를 채우라느니 뭐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래서 그걸 가르쳐 주러 온 거다. 애초에 네가 기억도 못 하는 꿈속에서 한 약속의 일부기도 하니까.
환장할 노릇이다, 정말. 영서는 대번에 상체를 일으켜 폴짝 앉았다. 남자가 내민 책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왠지 책장마다 먼지가 가득할 것 같았다-마지못해 받아들었다.
“어?”
영서가 손을 댄 순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낡은 책의 표지에 갑자기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먹이 번지듯 진해진 글자는 낯선 한자들이었다.
“이게… 뭐라고 써진 거예요?”
-그건 곧 알게 될 거다. 원래 개인 명부는 다른 차사나 사자가 이름을 알아서는 안 되거든.
“아니, 한자라도 알려줄 순 있잖아요!”
저 한자 점수도 60점인데! 영서가 항의하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팔짱을 끼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안 된다니까. 알아도 내가 알려줄 수 없어. 정확히는 내가 ‘읽어선 안 되는’거다.
“진짜 치사하네.”
영서는 책의 표지를 만지작대다가,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질감과 누렇게 바랜 것이, 확실히 예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어딘가… 신비한 느낌이 차오르는 것도 느껴졌다.
“아저씨, 이거…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데요?”
-맞아. 복잡한 이유로 그건… 음… 주인이 사라져서, 일종의 초기화가 된 거지.
“그래도 되는 건가…”
-명부를 채우는 법은 간단해. 저승사자는 죽은 영혼을 데려갈 때, 이름을 세 번 부른다는 얘기는 들어봤지?
“아, 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지. 세 번 부르는 건 맞지만 무조건 죽을 이를 데려갈 때 부르는 것도 아니고, 세 번 호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그 영혼이 성불하는 것도 아니야. 게임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럼, 이 명부에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이 죽어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영서를 쳐다보았다.
-만화 좀 그만 봐라.
“치…”
-치는 무슨.
데X노트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영서는 조금 머쓱한 기분에 뒤통수를 긁으며 종이를 팔락팔락 넘겼다.
-영혼을 성불시키려면, 먼저 그 영혼의 이름을 알고 있어야 해. 단순한 별명은 안 된다. 영혼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본인의 진명이어야 해.
“영혼의 이름…”
-그리고 보통 영혼들은 자신의 이름을 까먹은 상태일 확률이 높아. 귀신이 되면 생전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죽기 직전에 강렬하게 맺힌 자신의 한 때문에 그것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상태가 돼. 그래서 보통은 무력을 쓰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게 좋지.
“무력이라면, 얼마 전에도 그냥 제가 써버린 것 같은데…”
-아, 그놈? 그거야말로 부처 흉내 내는 사독한 잡귀라 할 수 있지. 가끔가다 그런 지독한 놈들이 있어. 잡귀 주제에 신물에 들어가서 무당이나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고 초나 향을 피우면, 지들이 정말 신이라도 된 양 착각하고 힘을 얻거든.
그런 놈들은 그냥 대화할 필요도 없이 보내버리면 된다. 남자가 가볍게 말하자 영서는 왠지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성불시켰다고 혹시 일이 꼬인다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영혼의 이름을 알아내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요?”
-보통 그 정도 단계까지 되면 영혼도 생의 기억을 어느 정도 떠올리게 될 거다. 그때 이 명부를 펼치고 영혼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돼.
“그런데 아저씨는 명부, 없어요?”
-나? 내 건 여기 있지.
남자는 가벼운 손짓으로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예전에 중환자실에 있던 귀신들을 한 방에 사라지게 해 준 것 같은 그런, 가벼운 손짓이었다. 그의 흰 손가락이 튕겨지자 순식간에 투명한 기운들이 모이더니 그의 앞에 푸르게 빛나는 책 한 권이 생겨났다. 둥실둥실 뜬 책은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가 책을 보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책장이 차르륵 넘어가면서 날갯짓하듯 가볍게 종이가 팔랑거렸다. 우와, 하며 입을 벌린 채 그 모양을 지켜보자 남자가 약간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이건 차사들이 쓰는 명부야. 차사끼리는 내용을 공유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허가를 내렸을 때의 일이고, 평소에는 다른 차사나 사자들이 읽을 수 없도록 개인화된 암호로 쓰인 책이지.
확실히 빛나는 책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쓰여 있긴 했던가? 하지만 분명 한자도, 한글도 아닌 이상한 글자들이었다. 꼭 그림 같기도 했다.
-권영서, 네가 할 일은 바로 이 명부를 전부 채우는 것, 하지만 풀어 말하면 수많은 귀신들을 만나고 그들을 성불시켜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네가 새로운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귀신들을 얕잡아 봐서는 안 돼. 오히려 너의 힘 때문에 함정에 빠질 때도 올 거다.
남자는 엄한 얼굴로 영서를 바라보았다. 영서는 양손에 쥔 책을 내려다보았다. 꽉 쥘수록, 이상하게 반가운 힘이 스멀스멀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충고는 이것뿐이야. 내가 더 알려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알려주겠지만… 일단 다시 되찾은 삶을 좀 더 즐기는 것도 좋겠지. 앞으로도 차차 알게 될 거다. 꼬맹이, 앞으로 얼마나 하는지 지켜보마. 난 너한테 걸었으니까.
의미 모를 말을 한 남자가 싱긋 웃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영서도 눈을 뜨며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확실히 악몽은 아니었지만, 영서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꿈인가, 아니면 정말 찾아왔던 건가. 영서는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닦다가, 왠지 어색한 기분에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맞은편에 놓인 책상 위에, 어슴푸레하게 뭔가가 보였다.
영서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불은 켜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두 발로 선 그 앞에는,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낡은 책이 조용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