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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8화 (8/166)

8화

유혜리는 우등생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곧고 올바른 성격에 약간 까칠하긴 해도 모두와 별 문제 없이 잘 어울렸고, 게다가 머리까지 좋아 성적으로도 단연 탑이었다. 가끔 너무 입바른 소리를 해서 싫어하는 또래들도 몇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혜리는 항상 정의를 갖고 사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는 생각을 품고 사는 아이였다.

그런 정의를 곧이곧대로 관철시키며 자라온 탓일까. 혜리는 점점 클수록 세상의 부조리함과 자신의 정의관의 충돌을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 특히 고등학생이 되고 자신과 기말고사에서 같은 점수를 받았던 옆 반의 어떤 애가 교무 회의 끝에 전교 석차 1위를 달성하고 자신은 2위로 밀려났을 때, 그 충돌감은 이내 혜리의 안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요즘 잘 나가는 모 국회의원이라는 여자애였다.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부는 잘 하지만 입버릇도, 장난기도 저질급인, 흔한 ‘일진’의 부류에 드는 애. 게다가 집까지 잘 사니 그 애가 사고 친 것은 항상 그 애의 친구들이 대강 뒤집어쓰곤 했다.

혜리의 집은 평범했다. 아니, 적어도 어려서 이혼한 부모 때문에 일하느라 바쁜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집이니 세간에서는 평범한 집으로 대우받긴 어려웠다. 그래도 혜리는 항상 바르고 단단하게 살았다. 작은 키와 체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바락바락 맞서 싸웠고, 이렇다 할 ‘빽’도 없었지만 있는 것처럼 굴며 살았다.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면 자리에 죽치고 앉아 공부를 했고, 또 내신 점수에 도움이 될까 싶어 온갖 학생회장 일과 봉사활동, 각종 대회까지 휩쓸었다. 어른들의 제멋대로 판단하는 시선이 싫었다. 어른들은 항상, 혜리가 99만큼을 완벽하게 해내도 1을 실수하면 ‘역시 편부모 가정의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시선으로 혜리를 대했다. 제멋대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엄마를 불쌍히 여기는 세상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공동 1등으로 끝났어야 할 기말고사가 결국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단 1점이 더 깎인 이유는 영어 서술형 마지막 문제에서 온점 하나를 찍지 않아 감점이라며 영어 선생이 혜리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어물거리며 통보했을 때, 혜리는 폭발하고 말았다. 혜리는 그날, 누군가가 지워버린 자신의 문장 마지막의 희미한 온점 자국을 들여다보며 30명의 반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참아야 했다.

영서는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혜리의 머리카락은, 세찬 바람에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문 혜리의 옆에서 영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뛰어내린 거야?”

“내가 시험 하나 2등 했다고 자살할 애로 보여? 그 정도야 내 완벽했던 성적에서 요만한 티끌에 지나지 않았거든?!”

게다가 시험 외에 봉사나 학생회 활동 점수는 내가 더 높았으니까. 혜리는 반쯤 농담조로 말했지만, 영서는 웃지 않았다.

“…그 얼굴 말야, 사실 나, 알고 있었어.”

“뭘?”

“……내가 아는 얼굴이었어.”

옆 반의 그 애가 정장을 차려입은 그 애네 엄마와 교장실을 들락거리는 걸 봤을 때, 혜리는 쎄한 기분을 뿌리칠 수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아니면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혜리는 몇 번 더 정황을 포착했고, 심증은 깊어져 갔으며, 그 애가 교장실에서 나오며 뭔가를 꼭 쥐고 나왔을 때 혜리의 예리한 직감은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안 돼 하면서도 혜리는 옆 반과의 합동 체육시간 때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겠다며, 이럴 땐 반장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몰래 했었다. 옆 반 그 애의 가방은 바로 티가 났다. 학교에 들고 다니는 것조차 규칙에 위반할 정도로 고가의 학생 가방이었다. 가방을 열어보자 조금 전에 넣어둔 작은 USB가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한편으로는 누가 볼까 무서워 당장 가방을 두고 문을 잠그고 나왔다.

점심을 거르다시피 하고 달려간 컴퓨터실에서 몰래 열어본 USB에는, 이번 학기 중간고사 예상 기출문제들이 들어있었다. 상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진 현실에 기가 찰 뿐 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돌아온 교실에는, 옆 반의 그 애가 잔뜩 씩씩대며 자신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유혜리, 내가 모를 줄 알아? 내 가방에서 도둑질한 거 너지?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네가 내 가방 뒤졌잖아!

그 애는 빨개진 눈으로 반쯤 울면서 외쳤고, 그 애의 친구들은 그 애를 위로해주며 혜리에게 날선 눈빛을 보냈다. 혜리의 반 친구들마저 혼란스럽고도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내가 뒤지긴 뭘 뒤져? 증거도 없이 이렇게 사람 잡아도 되니?

-증거? 네가 반장이라서 마지막으로 체육시간에 반 문 잠그고 갔다며. 내가 자리 비운 거 체육 시간뿐인데, 그럼 그 때 사라진 거니까 범인은 너겠지!

-애초에 내가 네 가방을 왜 뒤져? 생사람 잡지 마. 그리고 도난당할만한 금품 같은 건 학교에 가져오면 안 되는 거 몰라?

-너는 집이 가난하니까 그랬겠지! 거지같은 게 평소에는 고상한 척 다 하더니, 내가 저번에도 너보다 성적 잘 나와서 앙심 품은 거 아냐?! 지금 정황상 내 물건을 훔칠 게 너밖에 더 있어?!

혜리는 숨이 탁 막혔다. 어쩜 아직 어린 애가 이런 못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마음을 들쑤시는 법은 언제 이렇게 배운 걸까. 구경 온 옆 반 아이들까지, 수 십 명은 되는 반 아이들 앞에서 혜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해명해야 하는데.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때, 교내 방송으로 낮고도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학년 1반 유혜리 학생, 유혜리 학생은 지금 교장실로 와 주십시오.

교내 방송이 울려 퍼지자 어수선하던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혜리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턱을 치켜들고는 눈을 깜박였다. 눈물을 참을 때마다 하는 그녀만의 버릇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반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복도로 나온 혜리는 복도를 이어서까지 서 있는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때다 싶었는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킥킥대는 애들도 몇 몇 보였다. 그러나 그런 애들의 헛소리쯤은 상관없었다. 무엇보다도 상관있는 건, 지금까지 혜리와 살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 가벼운 수다도 떨며 항상 웃는 낯으로 혜리를 대하던 학생들의 급변한 태도였다. 누구보다도 남들의 인정과 정당한 칭찬을 받아내기 위해 바르고 올곧게 살아온 혜리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아무도 나를 ‘나’라는 온전한 대상으로 봐주길 원했으니까. 내 배경이나 집안에 관해서 말고, 그냥 유혜리라는 사람 그 자체로 봐줬으면 했다.

그렇게 믿어온 주변의 신뢰나 우정, 평판 등은 혜리의 생각보다 부질없는 것들이었나 보다.

혜리는 주머니에 든 USB를 꾹 쥔 채 단호한 얼굴로 무거운 걸음을 뗐다.

학교 건물의 4층 중앙에 위치한 교장실은 여느 때처럼 갈색의 두꺼운 문으로 닫혀있었다. 막상 교장실로 오라고 해서 오긴 했으나, 각종 행사나 대회 수상 때에나 얼굴을 봤던 교장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미심쩍은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아마 내 주머니에 든 USB와, 방금 전까지 울면서 자신을 비방하던 그 애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했다. 더욱더 들어가기 싫어졌지만, 혜리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갈색의 커다란 문에 두어 번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그 얼굴이…누군데?”

혜리는 잠시 목이 아픈지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멈췄다. 영서가 조용히 되물었지만 혜리는 가만히 난간 밑을 내려다 봤다. 아마, 이 정도였을까, 혜리가 뛰어내린 곳은. 영서는 괜히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 교장 새끼, 나한테 쥐죽은 듯 모른 체하면 졸업은 시켜주겠다고 하더라? 어이없지. 내가 학교에서 얼마나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고, 모두를 도와주고, 전교생 중에 날 모르는 애가 없을 정도였는데. 선생님들도 다 날 좋아했어. 공부면 공부. 대회면 대회, 나를 질투하는 애들이 있긴 해도 그래도 난, 상관없었어. 어차피 내가 열심히 살면 되는 거니까. 날 무시하는 애들, 다 나보다 멍청하고 못나서 그런 거니까.”

혜리의 시선은 여전히 난간 밑으로 고정된 채였다. 무게가 없어 난간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세상은 떠난 존재라는 걸 알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은 내가 잘 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더라. 돈, 빽, 좋은 부모, 집안, 인맥…그런 게 있어야지 잘 살 수 있는 거더라.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거야. 계급 자체가 달랐던 거야. 교장이 나한테, 내 앞길 하나쯤 막는 건 일도 아니래.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봐야, 기껏해야 열여덟 먹은 여자애 말을 누가 믿어주겠냐고 하는 거 있지.”

영서는 말문이 막혔다. 혜리의 담담한 어조 뒤로, 그때 교장실에 들어서면서 느꼈을 열여덟 소녀의 중압감과 공포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그러면…

“응, 맞아. 교장이야. 살아있을 때는 돼지같이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고 가발까지 써서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까 그 새끼도 죽어서 학교 지박령이 된 거 있지? 살아있을 땐 그렇게 떵떵거리며 살더니, 자기가 그렇게 뺏기기 싫어하던 자기 학교에서 제일 힘도 없는 잡귀가 되어 있더라고. 심지어 날 기억도 못해.”

혜리가 손을 들어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 한 점도 그 애의 머리카락을 움직이진 못했지만, 그냥 버릇같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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