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9화 (9/166)

9화

“그럼 교장은 왜… 그렇게 갑자기 커진 걸까?”

“내가 죽고 나서 3년 동안은 사실 본 적이 없는데, 얼마 전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어. 교사들 사이에 소문으로 보니 전 교장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나야 뭐, 똑같이 힘이 없으니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놔뒀는데, 갑자기 눈에 띄게 자주 돌아다니는 거야, 그 자식이.”

“언제부터 그 얼굴이 생겼어?”

“글쎄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2주 전쯤이니까… 아, 네가 전학 왔을 때랑 비슷한데?”

“나도 그 비슷한 얼굴 귀신을 보긴 했는데, 워낙 기운도 희미해서 그냥 지나쳤거든.”

“처음엔 정말 그 정도였지.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거야. 계속 그 징그러운 입을 벌리면서 공중에 떠다니는 뭔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어.”

역시 영서가 본 바가 맞았다. 혜리는 신력이 약해ㅡ사실 보통의 귀신이니 그럴 지도ㅡ아직 자신 같은 형태가 있는 귀신들만 보이는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커지는 얼굴, 계속 탐욕스럽게 학교 내에 떠다니는 학생들의 감정의 앙금과 기운의 잔여물들, 에너지의 자잘한 조각들, 그런 것들을 얼굴은 수집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영서는 왠지 단순한 잡귀가 할 행동은 아니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렇게 뇌물이나 쳐 받고 맘대로 운영하고 독단적으로 구니까 죽어서도 그런 볼품없는 귀신이 돼서 얼굴에 뒤룩뒤룩 살이나 찌지. 그에 비해 난 어때? 완전 살아있을 때랑 똑같이 깔끔하게 귀신이 됐다구. 뒤에 학교 연못에 있는 애 봤어? 걔는 죽었을 때랑 똑같이 온몸이 퉁퉁 불어서 연못 안에만 있던데.”

다시금 재잘대며 딴 길로 새는 혜리의 수다에 영서는 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수상했지만, 일단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이름 하나를 얻은 것이었다.

“유혜리, 내가 이 사건을 처리하면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지.”

“응.”

“난 퇴마사야. 너의 부탁을 들어주고, 네 이름과 기억을 되찾아준 건, 지상에 한이 맺혀 묶여 있는 너를 성불시켜주기 위해 한 거야.”

혜리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영서를 건너다보았다. 문득 영서는 정오의 해가 너무 따갑다 못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유혜리.”

“응.”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너의 이름을 부를게. 그러면 내 명부에 너의 이름이 적힐 거고, 넌 학교에서 풀려나게 될 거야.”

“있지, 권영서.”

“…응?”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거야 모르지.”

“…우리 엄마, 하나밖에 없는 딸 장례 치르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서 산다고 들었어. 아마 재혼했을 거야. 혹시 내가 성불하고 나면 우리 엄마한테 편지 하나라도, 아니 그냥 연락 한 번이라도 해줄 수 있어?”

영서는 살짝 난감해졌다.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제아무리 귀신에게 휘둘리지 않고 별 관심이 없는 영서라도, 이건…

“교무실 컴퓨터로 옛날 내 학적 조회하면 우리 엄마 번호가 나와. 부탁할게. 엄마한테… 아직도 혜리가 많이 사랑한다고 해줘. 그리고 꼭, 행복하라고.”

해맑게 웃는 혜리를 보며, 영서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유혜리.”

“응.”

혜리의 입에서 대답이 나온 순간, 영서의 앞에 투명한 기운들이 모여들면서 낯익은 책 한 권이 두둥실 떠올랐다. 약간 신기한 눈으로 그 책을 바라보는 혜리에게서 애써 시선을 거두며, 영서는 명부의 제일 첫 번째 장을 펼쳤다.

먹물이 흐리게 번진 듯한 한자가 적힌 표지를 넘기자, 제일 첫 번째 장에도 그날 영서가 꿈에서 봤던 것처럼 점점 글자가 떠오르듯 글씨가 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새겨진 이름 석 자에 영서는 고개를 들어 혜리를 보았고, 혜리도 그 이름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꼬맹이들.

“으아악!”

영서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책을 황급히 덮어버렸다. 까만 가루들이 모이듯 책장 위에 새겨지던 글씨가 그 기세에 삭 흩어져 버렸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듯 눈을 감고 있던 혜리가 어리둥절하게 영서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 진짜, 심장 떨어지게! 놀랐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새끼, 버르장머리 없는 건 여전하네.

일직차사가 빙그레 웃으며 영서의 뒤에 서 있었다. 혜리는 대체 뭐가 뭔지,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영서와 일직차사를 번갈아보았다. 영서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제 뒤에 서있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름 수집하라면서요! 너무 놀라서 닫아버렸는데, 아니 근데, 이거 괜찮은 건가?”

영서는 황급히 명부를 다시 펼쳤다. 분명 아까까지 스며들어있던 먹물 같던 글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유혜리의 이름이 써지고 있었는데…!

“이거, 이름 날아갔는데 다시 쓸 수 있는 거죠?”

-엥? 아니? 한 번 실패하면 끝인데?

“네에에에???!!!!!”

“네???!!!!!!”

영서와 혜리가 동시에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는 마당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남학생 몇몇이 옥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영서와 혜리가 합, 하고 입을 다물자, 일직차사는 실실 웃으며 팔짱을 꼈다.

-영혼의 이름을 수집했는데 명부에 올리는 걸 실패하면, 방금 본 것처럼 다시 날아가 버려. 보통은 없는 일이지만, 뭐 방금 같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야 있으니까 잘 기억해 두라구.

“아니 아저씨, 그게 할 말이에요, 지금?!!”

“맞아요!! 저, 저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네??”

억울해 미칠 지경인 영서의 얼굴과 잔뜩 울상이 된 혜리의 얼굴을 번갈아 본 남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안 그래도 이거 관련해서 해 줄 말이 있어서 온 거였지, 참.

“그게 뭔데요!”

-유혜리, 나 좀 따라와야겠다.

혜리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자들의 우두머리인 저승차사, 그것도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일직차사인 것이다. 보통의 사자들 눈도 피해서 꽁꽁 잘 숨어있던 혜리인데, 느닷없이 차사에게 붙잡히게 되다니, 아무리 해도 곱게 성불하기 그른 모양이었다. 혜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혜리는 제가 성불시키기로 했거든요? 이거 그, 그 뭐냐, 남이 다 잡아놓은 거 뺏어가는 그거 아냐? 권력 남용?”

“사람을 무슨 다 잡은 물고기마냥 취급하지 말아줄래, 권영서?”

-그런 거 아니다. 내가 뭐 하러 급 떨어지게 이런 약한 지박령들 하나하나 잡으러 다녀?

약한 지박령?! 혜리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인간들이…

“그, 그럼 갑자기 저를 왜…”

“맞아요, 혜리 관해서 할 말이란 게 뭔데요?”

남자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눈을 굴려 영서의 뒤에 숨은 혜리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아무런 온기가 없는 그 눈빛에 혜리는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제 기운이 모조리 흩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남자, 역시 위험해. 아무리 차사라지만 이렇게…?

-유혜리, 201x년 x월 xx일, 이 학교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더군.

“그…건, 왜요?”

-자살한 영혼은 성불을 할 수 없다.

영서의 눈이 커졌다. 혜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남자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뒷목을 긁었다.

-알아보니까 그동안 아주 쥐새끼마냥 잘도 저승사자들을 피해 다녔던데, 안타깝지만 너 같은 한낱 잡귀가 우리들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어. 네가 잘 숨어 다닌 게 아니라, 우리가 너를 잡지 않았던 거지.

“그, 저기요, 아저씨. 설명을 제대로 해 주세요. 혜리가 자살한 건 맞지만, 아저씨가 말한 대로 혜리는 자기의 죽음에 관한 기억도 다 떠올렸고, 자기 이름도 찾았잖아요. 그리고 제 명부에 올라갈 뻔, 하기도 했고요.”

영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혜리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입을 꼭 다물고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규율은 규율이야. 자살한 영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야. 엄연히 말하면 우주의 섭리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보통 이런 애들이 하릴없이 떠돌다가 악귀로 변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때 네가 퇴마한 놈들처럼 말이다. 남자의 무덤덤한 말에 영서는 어깨를 움찔, 굳혔다. 하지만 혜리는 아무 힘도 없는, 그냥 영혼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사악한 악귀가 될 거라고 함부로 매도하는 건지, 영서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저씨…!”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걸 발견했는데 말이야. 유혜리는 아직 자기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한 상태야.

“네?”

영서는 고개를 돌려 제 뒤로 숨은 혜리를 내려다보았다. 혜리도 혼란스러운지, 영서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영서 너랑도 관련이 있는 일이겠군. 유혜리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한 별개의 사건이 아냐. 유혜리 네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복잡하게 얽혔단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너도 눈치챘겠지만, 너희들이 방금 잡았던 악령, 이 학교의 예전 교장이지?

“네.”

-아직 더 조사가 필요하긴 한데, 살짝 알려주자면 말이지.

남자는 턱을 슬슬 쓸면서 몇 발자국 걸어 난간에 가까이 다가가 섰다. 그의 검은 머리칼 위로 펼쳐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러, 온통 검은 그의 몸과 흰 얼굴이 더욱 대조되어 보였다.

-원래대로면 이렇게 악령으로까지 변질될만한 영혼도 아니었어. 그런데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아랫놈들한테 조사를 좀 시켰거든. 겸사겸사, 영서 네가 다니게 된 학교기도 하고.

아랫놈들이라면, 아마 부하직원급의 저승사자들을 말하는 듯했다. 부하라면 저 인간이 상사란 거잖아. 저 인간이 직속 상사라니, 영서와 혜리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한 명복…이미 죽은 사람들이라 상관없나, 아무튼 그 비슷한 것을 빌어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