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남자는 팔짱은 낀 채 난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역시 이 학교,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아. 그리고 하필 그 시기가 유혜리가 자살하고 난 뒤에 바로 남학교로 바뀐 것과도 겹치는 것 같고.
“아, 맞아. 이 학교 원래는 여고였다고 했죠.”
-그래, 듣기로는 전쟁 직후에 한 선교사가 설립한 고등학교였다지. 세운 지도 오래된 학교여서 족히 60년은 됐을 텐데, 갑자기 여고에서 남고로 바꾼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혜리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적으로 상관은 없겠지. 네가 원인인 게 아니라, 너도 어떠한 원인에 얽혀든 결과 중 하나일 테니까.
“알기 쉽게 좀 말해줄 수 없어요, 진짜?”
영서가 툴툴거렸다. 남자는 대답 없이 난간 앞에 내려와 서더니, 바지 정장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점심 간이 끝나가는 데도, 여전히 공을 차는 남자아이들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그중 눈에 띄는 녀석도 하나.
-그건 차차 밝혀지면 설명해주지. 그것보다, 권영서.
“예이….”
-다음 타깃을 알려주지. 일단 유혜리는 보류다.
“에? 타깃이요?”
“저, 전 보류라고요?”
영서와 혜리가 동시에 되묻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기울이며 그 둘을 번갈아보았다. 얼마나 지냈다고 닮아 가냐, 닮아가기는.
-그래. 유혜리는 잠깐 나 좀 따라오고. 해치진 않을 거니까. 권영서, 다음 타깃은 방금 처리한 얼굴하고 비교도 안 되게 센 놈인 것 같다. 긴장하는 게 좋아.
영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남자를 따라 난간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까 전 축구공을 높이차 준 축구부의 주장이 옥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눈이 마주친 걸까? 영서는 오후의 더운 바람이 뒷덜미를 식혀주는 것을 느꼈다.
***
“야, 그 얘기 들었어? 미리가 어젯밤에, 진짜 거기에 가봤대.”
“거기라면, 미리가 가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거기?”
“그래~! 하여튼 무서운 지지배, 담도 세지. 거길 혼자 어떻게 가?”
영서는 볼펜을 굴리며 책상 위에 칼로 새겨진 낙서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노란빛으로 코팅된 책상은 꽤 이리저리 사용된 듯 크고 작은 흠집들이 자잘하게 새겨져 있었다. 풀던 문제지의 17번 문제의 답이 선택지에 없어, 이걸 어디서부터 다시 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영서가 남중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한 달이 지났다. 얼마 전 ‘얼굴’을 퇴치하고 나서 혜리는 일직차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남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딱히 혜리가 다시 돌아오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쨍알거리는 목소리가 없으니 왠지 허전한 것도 사실이었다.
벌써 시간은 흐르고 흘러 4월 중순이었다.
학교에 꽤 그런대로 적응하며 잘 다닌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영서의 몸이 다시 괜찮아졌다고 안심한 것인지, 영서의 부모는 다시 제각각의 직장으로 바삐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 먹듯 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바쁜 분들이었으니 딱히 서운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중간고사에 영서를 가만히 놔둘 분들이 아니었으니. 중학생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영서는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학교 근처에 자리 잡은 학원을 두어 개 끊을 수밖에 없었다. 기타 과목들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래도 주요 과목들은 학원이나 과외를 붙여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었다. 영서는 딱히 성적이 낮은 편도 아니었지만ㅡ오히려 상위권에 속했다ㅡ그렇다고 공부에 열심인 타입도 아니었다. 게다가 사고를 겪은 후 그 무기력 증상은 더 커져만 갔다.
지금 당장 인생이 뒤바뀌어 저승사자 대신 귀신을 잡으러 다니게 생겼는데, 내신이니 수능이니 하는 것은 영서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물론 엄마나 아빠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ㅡ말한다면 그들의 부모는 영서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가서 뇌 검사를 하자고 할지도 모르니ㅡ.
이미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 같은 건…. 이젠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걸.
영서는 왠지 모르게 가라앉는 기분에 샤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톡, 하고 부러져 튕겨나간 샤프심이 신경 쓰여 아예 연필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심지어 그게 가족이라도, 영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서 본인도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영서가 자신의 목숨과 거래한 대가니까.
적당히 성적이나 유지하지, 뭐. 한숨을 쉬고 다시 눈을 또렷하게 뜬 영서가 지우개를 들고 풀이 과정을 슥슥 지워나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권영서. 그래도 이왕이면 귀신같은 건 맘대로 퇴마 시킬 수도 있는 무지막지한 힘이 생긴 건데, 굳이 우울해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뭐, 대학도 가고, 직장도 잡고, 아니면 유명한 무당이 돼서 부자들한테 복채나 쏠쏠하게 받고, 뭐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암. 영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17번의 답을 찾기 위해 연필을 움직였다.
“그런데…. 미리 오늘 상태 좀 이상하던데.”
“어디 아픈 거 아냐? 아까 보니까 학교에서도 표정이 안 좋던데.”
“내일부터 영어랑 수학은 4월 모의고사 성적으로 반 나눠서 수업한다고 했잖아. 미리한테 연락해 줄까?”
“하여튼 권미리, 쓸데없이 밤에 나가서 감기에나 걸리고.”
아까부터 영서가 앉은 자리 앞쪽에 모여 앉은 학생들이 신경 쓰였다. 교복을 보니 남중고등학교 바로 근처에 위치한 남중여고 학생들 같았다. 남중고가 여고에서 남고로 바뀐 뒤, 근처에 있던 헌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여고였다. 본래 의도는 남중고를 공학으로 바꾸려고 했다던데, 이사장의 완고한 반대로 인해 굳이 학교를 나눠 남고와 여고로 분리된 학교였다.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재단을 끼고 설립된 학교여서인지 이 동네에 사는 남중고, 남중여고 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 동창이었다. 자연히 동네에서도 서로 마주치면 아는 얼굴들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새로 전학 온 영서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영서가 다니게 된 학원은 규모가 꽤 큰 고등부 전용 입시학원으로, 여러 학교가 섞였지만 아무래도 제일 대다수는 남중고와 남중여고 학생들이었다. 자습시간에 따로 남아 학원 숙제를 미리 하는 영서의 귀에, 하하 호호 떠드는 여학생들의 대화가 단편적으로 들려왔다.
“그런데 그거, 소문이 진짜면, 미리 큰일 난 거 아냐?”
“큰일은 무슨…. 그거 오히려 남자애 쪽이 부정 타는 거 아니었나?”
“어? 남자애가 누군데? 나 아직 몰라!”
“그 왜, 있잖아, 남중고에….”
머리를 높게 묶은 새침하게 생긴 여학생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영서를 발견하곤 고개를 낮춰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영서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시선을 문제집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영서가 귀를 막아도 아마 영서에게만은 들렸을 테니까. 영서가 새로운 영안을 갖고 되살아난 후부터, 이상하게 가끔씩,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영서는 주변에 있는 어느 영이 장난을 치느라 영서의 귀에 그들의 말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러나저러나 진짜 귀찮은 능력이라니까. 그런 능력으로 수능 답이나 알려주면 좋으련만. 영서는 혀를 차며 샤프의 뒷부분을 찰칵 찰칵 눌렀다. 귀신 좀 보고 퇴마 좀 한다고 해서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영화나 소설은 다 거짓말이야. 그게 밥이 나와 쌀이 나와, 맨날 다치고 위험한 거나 보고, 귀신이 대학 보내주는 것도 아닌데.
영서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도 모른 채, 영서의 눈치를 보던 여자아이 무리 중 한 명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남중고 2학년에 주해강 있잖아.“
“뭐~?!! 진짜??!! 미리 생각보다 눈 높네?”
“아, 목소리 좀 낮춰! 귀청 터지는 줄!”
“근데 걔 인기 되게 많잖아. 여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었나?”
“몰라? 1학년 때까지는 우리 학교에 3학년 언니랑 사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언니 대학 가고 깨졌을걸? 지금은 그럼 없는 거 아닐까?”
“걔 페북 한 번 보자.”
뭐야, 그냥 단순한 짝사랑 얘기일 뿐이네. 영서는 괜히 곤두세웠던 신경을 다시 누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주해강이라면 영서도 아는 인물이었다. 남중고등학교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지. 심지어 전학 온 지 일주일도 안 됐을 무렵부터, 영서는 유독 눈에 띄는 학생 하나를 발견했었다. 그 애 이름이 주해강이었지? 그리고 아마….
영서는 17번의 답을 3번으로 체크하곤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아마… 그때, 얼굴을 퇴치할 때,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날 도와준 그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