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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2화 (12/166)

12화

“그렇지만 나, 여자 친구는 작년에 한 번 사귀어 본 게 다인 걸.”

해강은 웃는 얼굴로 큰 키를 숙이고 부스로 따라 들어오며 대답했다. 왠지 피하고 싶은 본능적인 마음에 아무 부스나 들어온 건데, 안 그래도 좁은 부스 내부가 더 꽉 차는 기분이었다. 이 자식은 쓸데없이 등치만 커가지고…! 영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을 쳐 부스 안에 설치된 의자의 가장 구석으로 붙어 앉았다. 전면에는 동그란 카메라와 네모난 화면이 있었다. 영서의 옆에 걸터앉은 해강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몸을 굽혀 부스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게임기 같은 소리와 함께 화면에 발랄한 음악과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해 사진 찍는 법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이것만 대충 장단 맞춰주고, 얼버무리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 아니, 그냥 집으로 가버리자. 영서는 가방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왠지 모를 위압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걸까, 정말로 해강의 옆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기운이 조금씩 빠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전력으로 달리기를 하고 나서의 상태처럼, 조금씩 숨도 가쁘고, 이상하게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 감기 기운이 있나? 아니면 긴장해서인지도. 영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영서야, 화면 봐. 아니 거기 말고 이 위쪽. 그렇지.”

해강의 말을 따라 카메라를 응시하자, 카운트다운과 함께 찰칵, 하는 셔터 음이 들렸다.

“거기는 화면이라 그쪽을 보면 눈이 이상하게 나와. 이 위쪽을 봐야 잘 나와.”

해강의 말이 맞았다. 해강은 능숙하게 카메라의 각도를 따라 시선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총 6번을 찍는 동안 해강은 포즈를 잘도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고, 영서는 내내 어색한 얼굴로 있다가 마지막에서야 조금 긴장이 풀어져 소심하게 브이를 했다.

“하하, 이게 뭐야! 눈 감았네! 다시 찍자, 다시!”

눈을 감은 채 찍어버린 영서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해강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 해강을 가만히 보던 영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해강. 너 스티커 사진 처음 찍는다고 하지 않았나?”

웃음소리가 멈췄다.

별생각 없이 캐치해낸 부분에, 영서는 스스로도 어라,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상하잖아. 처음 해봤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능숙하게 동전을 넣고, 카메라의 위치를 알고, 타이밍에 맞게 포즈를 잡는 거야. 영서는 별안간 아까 느꼈던 한기가 다시금 도는 것을 느꼈다.

해강이 고개를 들어 영서를 쳐다보았다. 가까웠다. 이 부스 안은 생각보다 좁았고, 해강과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는 정반대로 너무 공간이 없었다. 영서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 같았다. 뭐였지, 방금은? 방금 것도 그저 기분 탓? 영서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손끝에 기가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아냐, 뭔가… 이상해.

귀신도 아닌 주해강을 보고… 이런 기운을 느낀다고?

굳어지는 영서의 얼굴을 보며, 해강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소름이 삐쭉 돋으려던 순간, 갑작스레 해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 표정은 뭐야? 꼭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네.”

영서는 뜨악한 표정으로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뒷걸음질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좁디좁은 부스 안에서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게다가 영서는 안쪽 자리. 입구는 해강이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주해강, 이 자식 아무래도 수상해. 영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기이잉-

“어, 영서야, 여기 사진 나왔다. 볼래?”

그런 영서의 긴장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해강은 평소처럼 말갛게 웃는 얼굴로 상체를 숙여 출력된 스티커 사진을 꺼내들었다. 지금 그딴 거 볼 정신이 어디 있겠냐고! 영서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굴려 해강의 주변을 살폈다. 뭔가, 내가 놓친 게 있었나?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주해강은?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아니면 단순히 장난?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 눈 감았다, 진짜 웃겨.”

해강은 가뿐한 손짓으로 스티커 사진을 쥐고는 부스 밖으로 나갔다. 영서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또 찍게?”

“어? 어…아니.”

영서는 가방을 들고 주춤주춤 부스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학원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별다른 기운을 느끼진 않았었다. 물론 길 곳곳에 잡귀들이 일렁이긴 했지만 구태여 집중해 쳐다보지 않는 이상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해강이 바싹 붙어 수다를 떨며 오는 바람에 다른 귀신들에게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영서의 신경을 긁기는 충분했다. 왜 이러지, 오늘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평소처럼 정신이 맑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영서는 맘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계속, 영서의 기운 중심으로 끼어드는 것 같이, 무언가가…

“영서야,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

해강이 걱정스럽다는 듯 영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손을 뿌리친 영서와 해강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영서는 급히 사과했다.

“아, 미안, 누가 얼굴 만지는 거 싫어해서.”

“아냐, 내가 맘대로 만진 게 잘못이지. 미안해, 나만 너무 편하게 생각했나 보다.”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영서는 해강이 한껏 눈가를 늘어뜨리고 기죽은 얼굴을 하자 양심이 콕콕 찔리는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을 더 유순하게 만들고 영서의 눈치를 보자, 조금 전까지 영서가 느꼈던 불협화음 같던 이상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방금 주해강에게서 느껴졌던 기운은 뭐였을까. 단순한 기분 탓? 영서는 골똘한 표정으로 해강이 건네는 스티커 사진을 받았다.

“어때? 눈 감아서 별로면 우리 저 소품도 써서 다시 찍어볼래? 저런 것도 웃기겠다.”

“……”

영서는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두세 개 너비의 길쭉한 4컷짜리 사진이었다. 비슷비슷한 표정의 영서와 컷마다 각기 다른 표정을 한 해강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영서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그 둘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영서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사진에서 봤던 똑같은 지점을, 해강의 뒷목과 어깨 사이의 그 뒷부분을 건너다보았다.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해강의 어깨에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희미한 손가락들이 걸쳐져 있었다. 미묘하게 각도가 가려져 해강의 어깨너머가 잘 보이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 했던 걸까. 영서보다 훌쩍 큰 해강의 어깨에 흐릿하게 손 모양이 비쳤다. 확실해, 저건…

여자의 손가락이었다.

“영서야, 이거 별로야? 나 가발 쓰면 웃길 것 같지 않아?”

해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는, 핑크색 뽀글이 가발을 자기 머리에 얹어보더니 거울 너머로 영서를 쳐다보았다. 가게 벽에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에는 언제부터 붙여져 있었는지 모를 온갖 사람들의 스티커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교복이나 스타일로 보아하니 아마 10년도 전부터 이곳을 지킨 가게 같았다. 영서는 찬찬히 그 사진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정신을 집중시켰다.

벽을 따라 도배라도 한 듯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진들 속에는, 이미 생生의 기운이 다 닳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 젊은 목숨들도 저마다 인생을 가지고 살았을 텐데. 그리고 이곳에서 친구들과 저렇게 웃는 얼굴로, 자신이 요절할 줄도 모른 채 기쁘게 사진을 남겼겠지. 남들의 눈에는 그저 사진들일지 몰라도, 영서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몇 명의 모습은 마치 불에 그슬린 듯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본디 그런 속설이 있다. 무당은 금방 죽을 사람을 알아챈다는.

영서는 자신이 무당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게 마냥 터무니없는 속설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영서는 가끔 길을 걷다가 종종 멈추고 자신의 옆을 지나쳐 간 사람을 돌아보곤 했다.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바쁘게 등교하는 학생, 이제 막 퇴근한 지친 직장인,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학생,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음마를 뗀 아기와 그 뒤를 따라가는 젊은 부모.

누구보다도 평범해 보였던 사람들이, 영서의 눈에는 그렇지 않게 보였다.

영서의 눈에는 그들의 얼굴이 까맣게 칠해져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는 보였다. 하지만 짙은 그림자라도 드리운 듯, 아니면 정말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 한가운데에서부터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영서는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의 죽음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영서는 그럴 때마다 마구 달려서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으니까.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영서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억지로 영서의 고개를 돌리게 해 그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 봐라. 이제 저들을 죽을 것이다. 곧 죽을 인간들의 얼굴을 잘 봐둬라. 하는 것처럼. 영서는 차라리 이미 죽어 흘러 다니는 귀신들을 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강아.”

“응?”

“우리 사진은 그만 찍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이스크림 좋아해? 선선하게 묻는 영서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해강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서의 손에 들린 사진 속 해강의 어깨 뒤로, 손가락들이 움찔거렸다.

조금씩, 조금씩… 팔이 해강의 목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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