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자, 이제 어쩐다.
영서는 제 손에 들린 소프트아이스크림을 가만히 내려다본 채 생각에 잠겼다.
해강은 뭐가 기쁜지 방긋방긋 웃으며 영서의 옆에 앉아 3가지 색의 큰 덩어리가 얹어진 아이스크림을 한입씩 먹어치우고 있었다. 쟤는 먹기도 잘 먹네. 입도 크고. 영서는 도저히 아이스크림 따위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스티커 사진에 찍힌 ‘그것’을 보고 난 뒤부터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괴기는 처음인데.
애초에 영서의 눈도 흐리게 만들 만큼 기운이 센 놈이었다.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기운을 가진 귀신을 등에 업은 채로 멀쩡히 돌아다니기는 힘들 터였다. 게다가 영서가 지금까지 봐왔던 귀신들과는 어딘가 분명, 다른 령인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 존재를 알고 기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아까와는 다르게 정신이 말짱했다. 하지만 해강은? 보통의 인간이, 그런 것을 어깨에 두르고 아무렇지 않게 웃고 걸을 수 있다니. 영서는 도대체 그런 걸 어디서 업어온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영서의 눈을 잠시나마 가릴 만큼 기운이 세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공격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놈이라니. 아마 해강에게 들러붙은 게 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한 한을 품은 것 같았다. 본디 귀신이란 것들은 한이 강할수록 힘도 세지는 법. 죽은 자는 산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불문율을 어기고 우주의 섭리를 어그러뜨리고자 하는 것이니, 필시 자신이 추후에 받게 될 그 어떤 벌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력한 원혼이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일까?
영서는 골똘히 생각했다.
해강은 친구가 많으니 평소에도 혼자일 새가 거의 없었다. 항상 누군가와 웃고 떠들고 노는 녀석이다. 아까 학원에서도, 영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아이들도 있었고. 그러나 단순히 해강의 옆에 있었다고 해서 그들에게까지 원혼의 힘이 미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뭘까.
영서가 다른 가설을 세우는 동안, 흰색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녹아 손등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영서야,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 안 먹고 뭐해?”
“어? 앗, 그렇네…”
해강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영서의 손을 잡고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스크림은 언제 다 먹어치운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오래 멍을 때린 것인지 영서는 조금 민망해졌다. 아이스크림은 입도 대지 못했지만, 이미 거의 다 녹아 물컹해질 정도였다. 날이 이제 더워져서 그런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아무것도… 하하…”
“에이~ 아까부터 계속 멍 때리고 있었잖아. 뭔가 고민 있는 거 아냐? 아니면 혹시…”
혹시…?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해강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자식아, 너야말로 어디를 싸돌아다니다가 이런 걸 업어왔는지 얘기나 들어봐야겠다.
“혹시, 나랑 있는 거 재미없어서 그래?”
엥???
“이상하다, 애들이 나랑 놀면 재밌다고 했는데. 아, 영서 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매일 학원에서도 자습실에만 있고, 학교에서도 앉아서 공부만 하고. 좀 얌전한 타입이라 그런가?”
이,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정말. 해강은 정말이지, 오늘 하루 종일 뜻 모를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영서로서는 갑자기 자길 끌고 나와 버린 해강이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갑자기 어마 무시한 일감을 떠맡게 된 것 같아 골치가 아파 죽을 노릇이었다. 그런데 주해강이란 녀석은 계속 의뭉스러운 태도로 사람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얘는?
“그, 해강아.”
“응?”
“일단 손 좀 놔줄래…?”
해강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스윽 시선을 내려 제 손과 그 손이 잡고 있는 영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다닥 손을 치운 해강이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하하! 아, 미안. 닦아준다고 하다 보니까…”
해강의 뺨이 미묘하게 붉어진 것 같았다. 왜 저러는 거지. 수상하게 왜 얼굴을 붉히고 난리야. 날은 아직 그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아냐…… 됐어, 이해하려 들지 말자. 안 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영서는 고개를 작게 흔들다가, 아,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해강아, 혹시 최근에 어디 이상한 곳 다녀온 적 있어?”
“이상한 곳?”
“그래, 뭐 남들이 하지 말라는 걸 했다거나… 뭐를 밟았다거나… 아니면 뭔가를 부수거나… 아니면…”
“뭐야 그게~ 내가 그런 사고치고 다니는 애로 보여?”
해강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삐진 척 입술을 내밀더니, 영서의 진지한 얼굴에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런데?”
“어? 아니, 그냥… 하하. 요즘 어깨가 무겁고 그러진 않고?”
“아니 전혀! 나야 워낙 건강 체질이잖아~”
짓궂게 웃은 해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해강의 다부진 어깨 위에 아까와 같은 흐릿한 손가락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분명 몸을 숨기고 있는 거다. 내가 자기를 본 걸 안 거야, 그것도. 영서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나 지난번에 축구부에서 발 다쳤었거든. 그런데 그 뒤로 좀 자잘하게 다친 건 있어. 손가락을 베거나 공에 머리를 맞거나 하는 정도지만.”
“그래? 정말 뭔가 잘못 건드린 건 없어?”
“정말 없다니까.”
진짜인 모양이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시작이 된 걸까. 분명 저 원혼은 보통 놈이 아니다. 누가 저주라도 걸지 않는 한… 하지만 해강같이 무해한 웃음을 뿌리며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녀석이 저렇게 강한 사념 덩어리에 사로잡힌 저주에 걸릴 일은 0에 가까웠다. 대체 뭘까. 저주가 아니라면?
‘그런데 그거, 소문이 진짜면, 미리 큰일 난 거 아냐?’
순간 영서는, 학원에서 떠들던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큰일은 무슨… 그거 오히려 남자애 쪽이 부정 타는 거 아니었나?’
‘어? 남자애가 누군데? 나 아직 몰라!’
설마… 영서는 해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왜, 있잖아, 남중고에…‘
해강이 의아한 얼굴로 영서와 눈을 마주쳐왔다. 빤히 그 얼굴을 바라보자, 왠지 그의 얼굴이 또 붉어지는 것 같았다.
“주해강!”
“어, 어?!”
“너, 남중여고에 권미리라고 알아?!”
“아, 아는데?”
이거다.
영서는 마침내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의 답을 찾은 것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
“여기서 절하면 되는 거야?”
“응.”
“우와, 신기하다. 나 이런 거 처음 해봐.”
해강은 신이 난 얼굴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비석 앞에 대고 두 번 절을 올렸다.
영서는 긴장된 얼굴로 비석 너머를 살펴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결국 자신의 오지랖이 문제라며, 영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품 안에서 챙겨온 부적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영서가 사건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바로 전날, 해강과 이른바 ‘데이트’를 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학원에서 들었던 대화를 기억해 낸 뒤 해강을 앞세워 학원으로 다시 돌아간 영서는, 아까의 여학생들을 찾아내 자초지종을 말하게 했다.
“…그래서, 아까 들은 얘기가 있으니까, 발뺌하지 말고 소상히 얘기해 줘.”
“그, 그게 진짜라는 법이 어딨어? 애초에 네 말을 어떻게 믿고 미리 연락처를 알려주니?”
“은영아, 얘 저번 달에 전학 왔다는 애 아냐?”
“그러게, 못 보던 얼굴이야.”
여학생들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영서를 경계했다. 그러나 영서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비장의 카드, 주해강…!
“너희 친구가 벌인 일 때문에 지금 주해강이 피해 보게 생겼는데 그럼, 그냥 놔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야, 주해강, 얘 뭐야? 뭔데 우리한테 지랄이야?”
“하하, 글쎄, 나는 잘…”
“아까 다 들었어. 권미리라는 애가 어딘가 가지 말라는 곳을 갔지? 그리고 하지 말라는 걸 했고. 그게 주해강 때문이라며. 그거 때문에 얘한테 뭔가 영향이 갈 거라며! 지금 시간 없으니까 얼른 아는 대로 다 말해!!!”
영서가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다그치자, 여학생들은 찔끔한 표정으로 영서와 해강을 번갈아 보았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얼굴이 확실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애들은!
“우린 몰라, 그냥… 미리가 진짜 그걸 할 줄은 몰라서…”
“뭘 한 건데?”
여학생 중 하나가 깊은 한숨을 쉬더니 꼈던 팔짱을 풀며 대답했다.
“너희, 도화살 끼는 방법이 뭔지 알아?”
“도화살?”
‘도화살’이라면, 내가 아는 그 사주 살 중 하나란 말인가. 영서는 의외의 대답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영서와 해강이 퍽 진지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이들 중 제일 많이 떠들던 여자애 한 명이 결국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