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요즘 여자애들한테 유행하는 건데… 아, 쪽팔리게 진짜. 도화살이라는 게 있으면 이성이 많이 꼬이고, 연애도 잘 된대. 벌레가 꽃에 모이는 것처럼, 인기가 폭발하는 거지.”
“뭐? 그런 게 그렇게 쉽게 생길 리가 없잖아.”
“나도 좀 의심스럽긴 했는데, 뭐 그런 거 좋아하는 애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남자가 꼬이는 주술이라든가, 뭐 그런 미신적인 거긴 한데…”
“그래서?”
여학생은 다음 말을 잇기가 어려운지 한참을 망설였다. 뜸을 들인 끝에 대답한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올라온 방법인데,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과 이어질 수 있도록,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지는 방법이 있었어. 바로… 장희빈의 묘에 가서, 새벽 2시에 흰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돌아오면 된대.”
영서는 충격에 빠졌다. 그런 짓을 애초에 인터넷에 퍼뜨린 인간도 문제지만, 그걸 정말로 실행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춤을 추고 와서 인기가 엄청 많아졌다는 후기들이 올라와서, 일주일 전쯤에 애들하고 얘기하다가 미리도 알게 된 거야. 미리는 조금 소심하고 조용한 애인데, 우리랑 친해진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런데 미리가 그런 미신들에 관심이 많아서, 우린 그냥 얘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구나, 했지…”
그러자 여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해강에게 집중됐다. 영서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해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외치며 모두의 얼굴을 둘러볼 뿐이었다.
“주해강, 권미리 몰라, 너? 학원 수학 시간에 네 앞자리잖아. 네가 수업 시간에 지우개나 샤프도 빌리고, 모르는 거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다며.”
“글쎄…음…아! 그 안경 쓴 애?”
“그래! 네가 자꾸 미리한테 말 걸고 웃어주고 그러니까 미리가 널 좋아하게 됐잖아!”
영서는 해강을 보며 참 뻔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놓고 온 필기구를 빌리거나, 학원 선생의 감시망을 피하려 모르는 문제의 답을 묻는 용으로 그냥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주해강이란 사람은 단순하고 뻔한, 마냥 해맑은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반나절만 같이 있어도 영서는 해강에 대해 완전히 파악이 된 기분이었다.
“왠지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네…”
“그렇지?! 우린 잘못 없어! 미리가 주해강을 한참 짝사랑했는데, 얘는 미리가 누군지도 몰랐다니. 진짜 잘생긴 남자는 얼굴값 한다지만 완전 재수 없네, 주해강?!”
여학생들은 친구의 수모를 마치 자신이 당하기라도 한 양 주해강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해강한테 다들 호감 있던 거 아니었나…? 영서는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미리가 주해강을 짝사랑하다 못해서, 너희가 알려준 방법대로 실행했다는 말이지?”
“우리도 정확히는 몰라. 며칠 전부터 미리가 말수도 더 없어지고 안색도 나쁘긴 했는데, 그냥 걔가 몸이 약하니까…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지. 오늘은 아예 학교에서 엎어져만 있길래 캐물었더니 그제야 말해주던걸. ‘지난주에 장희빈 묘에 다녀왔다’라고…”
이미 그 애한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거겠군. 영서는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여학생들이 알려준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권미리는 받지 않았다. 영서는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의 기운을 가진 령이라면… 역시, 예상은 했었지만.
장희빈의 능에서 미리에게 꼬인 귀신이, 해강에게까지 옮아온 것이 분명했다.
죽은 자의 묘 앞에서 산 자는 예우를 갖춰야 한다. 그게 바로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산 자로서의 도리니까. 하지만 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니. 그건 무당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보통의 묘도 아니고 장희빈의 묘라니. 터도 문제고, 터주도 문제고, 심지어 묘의 기운마저 문제였다. 모든 것이 변수로, 어떻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영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해 보았다. 차라리 이름 없는 잡귀가 악해진 것이면 모를까. 정말로 그 명성황후의 혼이 씐 것일까.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인데.
영서는 해강과 미리에게 씐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퇴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해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퇴마해도 되는 걸까? 퇴마가 가능한 존재라면, 퇴마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영서는 문득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영서야, 너 얼굴이 창백해. 괜찮아?”
“으…머리가, 아파.”
“야, 너 코피 나!”
한 여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서의 턱을 잡아 얼굴을 들게 했다. 희게 질린 영서의 얼굴에 검붉은 피가 한 줄기 입술과 턱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해강의 눈이 커지면서 영서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해강의 어깨너머로, 반쯤 솟은 흰 얼굴이 눈이 휘도록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코피를 닦아주며 호들갑을 떠는 해강을 보며 영서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두면, 이 애는 죽는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저 정도의 기운을 가진 악령이 붙어 있는데도 이토록 밝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게다가 미리라는 애는 이미 몸부터 상해 가고 있을 게 뻔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그냥 묻고 넘어갈 수 없어. 더 늦기 전에 내가 뭐라도 해야만 해. 영서는 기운을 집중시켜 해강의 어깨에 매달린 그것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영서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 얼굴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흩어져 버렸다. 저게 본체가 아니었던 건가. 그래, 내 눈도 가릴 줄 아는 놈인데 저렇게 순순히 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겠지. 해강은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영서의 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영서야, 괜찮아? 화장실 가서 일단 물로 좀 닦자. 옷에도 다 묻었다.”
“아, 괜찮아 이제. 조금 어지러워서.”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렇게 코피를 쏟아? 너도 미리처럼 건강이 안 좋은가 보네?”
“미리라는 애도 코피가 자주 나?”
“음, 그렇지. 친해지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같이 다니면서 코피 쏟는 걸 자주 봤어. 몸이 원래 약해서 그렇다곤 하는데,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그런데 그렇게 자주 코피가 나는데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한숨을 폭 내쉬며 친구를 걱정하는 여학생들을 보며, 영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리라는 그 애, 이 애들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코피를 쏟게 되었구나.
그 말은 즉, 이 애들이 지나가듯 알려준 삿된 미신들이나 강령술 따위를 하면서 몸에 허주가 들락날락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자주 코피가 나는 애라면 학교에서 유명하지 않았겠는가. 이 애들과 친해지기 전부터 그랬다면 또래의 남중여고 학생들이 미리의 상태에 대해 거의 알고 있었을 텐데. 아직 거기까진 의심이 닿지 못했는지 여학생들은 그저 미리가 단순히 몸이 약해서라고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영서는 아까 피를 쏟는 자신을 보며 입이 찢어져라 웃던 반쪽짜리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저주인지, 잡귀 나부랭인지 상관없어.
본체에게 쳐들어가서 전부 퇴마 시켜 주지.
***
영서가 해강의 팔을 끌고 도착한 곳은 동네 외곽에 위치한 작은 절이었다.
이미 시간은 5시가 넘어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영서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절? 여기는 왜?”
“조용히 하고 따라 들어오기나 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해강이 영서의 뒤를 따라 절의 입구를 통과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 이 정도로는 꿈쩍도 않는군. 오히려 귀기가 더 살벌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 해강의 어깨 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서는 느낄 수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스티커 사진을 꺼내보았다.
사진에 찍힌 해강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손가락들이, 이제는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팔이 해강의 목을 감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들이 나무뿌리처럼 해강의 목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통은 까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고, 얼굴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영서는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해강의 어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놈이다. 분명 사진을 찍었을 때에는 손가락만 희미하게 걸쳐져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숨을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다. 시간이 없었다.
“여기 주지 스님하고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리고 네 일이니까 집중 좀 해라.”
이리저리 기웃대며 절의 마당 구석에 있는 돌부처를 건드리던 해강이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쪼르르 따라왔다. 영서는 거침없이 걸어 마당을 가로질러 위치한 별채 앞에 다다랐다.
“이런 곳에 스님이? 아까 기도드리는 법당 있던데 거기 계시지 않을까?”
“여기 계셔.”
작고 구석진 별채의 문은 고요히 닫혀있었다. 입구 쪽에 있던 큰 법당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구석진 별채로 걸어가는 영서를 해강은 갸우뚱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스님은 아마 여기 계시겠지. 우리가 오는 것도 알고 계실 테니까.
영서는 별채의 창호지 문 너머로 느껴지는 맑고 잔잔한 기운에, 잔뜩 날서있던 신경이 약간이나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