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끼익-
“이게 누구인고. 우리 영서 아니야.”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왜소한 노인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방에서 걸어 나왔다. 주름에도 가려지지 않는 인자한 눈코입이 살짝 놀란 얼굴로 영서와 그 옆에 선 해강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노인의 시선은 이내 해강의 등 너머로 집중되고 있었다.
“아이고, 이것 참. 젊은 아가 어쩌다 저리 됐누.”
“스님, 자세한 걸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번에 저한테 말씀하셨던 그게 필요해요.”
“아이고메… 내 정신 좀 보게. 재혁이 편에 보내준다는 걸 내가 까먹었구만. 일단 들어오시게. 그리고 거기 청년은 거기 가만히 있고.”
노인은 혀를 차며 뒷짐을 진 채 다시 느린 걸음을 떼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서가 신발을 벗고 댓돌 위로 올라서자, 해강이 황급히 영서의 팔을 붙잡았다.
“여, 영서야, 저분 누구야? 그리고 나 혼자 두고 가?”
“애도 아니고 잠깐 혼자 서 있는 게 무섭냐?”
“아니, 무서운 건 아니지만…”
어색하게 헤헤 웃는 해강의 손이 영서의 팔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자, 영서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댓돌 아래로 다시 내려와 섰다.
“저분은 이 정혜淨慧사의 주지 스님이셔. 다 너 살리려고 하는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나올게.”
“받는다는 게 뭐야? 재혁…?이라는 분은 누구고?”
“우리 아빠.”
가볍게 대답한 영서가 다시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자 해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너희 아버지?”
“어. 그리고 저분은 우리 고모할머니.”
“뭐?!?”
해강이 큰 소리를 내자 영서가 쉬이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는 눈을 흘겼다. 조용히 해, 바보야!
“그렇지만… 고, 고모할머니가 스님이셨어?”
“그럼 안 되냐?”
“아, 하하, 아니. 그냥 조금… 신기해서?”
“고모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출가를 하셔서 나도 자주는 못 만났어. 이 동네 쪽에서 절을 세우고 은둔하며 사신다는 얘기만 들었지. 나도 처음 오는 곳이야. 생각보다는 꽤 큰 절이네.”
별채의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노인이 영서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렸다. 영서는 해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물을 받아올 거야.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니 괜찮겠지. 잘 들어, 주해강. 너한테 씐 그거. 일반 부적이나 소금 뿌리는 것 따위로는 절대 해결 못해.”
“영물…?”
“그래. 나도 그게 뭔지는 몰라. 아무튼 할머니랑 일단 얘기를 해 보고, 최대한 빨리 너에게서 그걸 떼어내고 다시 장희빈의 묘에도 찾아가야 해. 그리고 미리도…”
영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수 있어. 권영서. 할 수 있다. 저 멀리 해가 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 안에 해결해야 해. 젠장, 왜 이럴 때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흰 얼굴과 먹으로 그린 듯한 눈썹, 단정하고도 차가운 인상의 남자. 이름도 모르는 저승차사가 괜히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필요할 때 안 나타나고 어디서 뭐 하는 건지. 하지만 일직 차사가 어디서 뭘 하든 영서가 알바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에, 영서는 왠지 모르게 조금 외로운 기분이었다.
애초에 내가 할 일은 명부에 이름을 채우는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일이 꼬였는지.
영서는 이 일이 끝나면 주해강에게 최대한 비싼 밥을 얻어먹기로 결정하고 별채의 문을 열었다.
어느새 진 땅거미가 스멀스멀 해강의 너른 등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
영서가 들어선 별채는 겉으로 봤던 것만큼 작은방이었지만, 겉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곳이었다.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오자, 방 한가운데에 있는 불단 앞에 앉아있던 노인이 고개를 살짝 돌려 영서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앉아보렴.”
“예.”
“아까는 저 애가 듣고 있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영서 네가 손대려는 그것… 그건 이제 손쓸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손댈 수 없지만, 과연 영서 네가 해본다면 또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르겠구나.”
노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떠 맞은편에 앉은 영서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눈은 그녀의 나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뿌연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눈에 어려 있는 이유 모를 총기와 맑은 기운은, 영서도 흉내 내지 못할 그 어떤 신기神氣와 같았다. 영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영서의 부친인 권재혁.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의 여동생이었던 고모의 손에서 큰 남자였다. 천성이 착하고 유순했던지라 그는 고모의 밑에서 말썽 없이 잘 자랐고, 그의 고모 또한 범상치 않은 여자였다. 그녀 또한 어려서부터 강한 신기를 타고난지라 빨리 영안을 뜨게 되었고, 그녀의 위로 줄줄이 아들만 있던 재혁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고모의 부친은 계집아이가 귀신을 본다며 재수 없어했다. 미묘한 부친의 차별로 눈칫밥을 먹고 자란 재혁의 고모는 다시는 자신이 귀신을 본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공부에만 몰두하며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한다. 재혁의 부친이자 막내아들은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매우 예뻐하며 항상 같이 데리고 놀러 다니려 했다. 물론 손위 형제들은 막내 여동생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타고난 아이라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껴 자연스럽게 멀리했지만.
그 후 형제들이 장성하고 나서 모두 장가를 들었으나, 재혁의 고모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며 선언했다. 그 당시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 있는 고명딸의 고집을 꺾기에는 그들의 부모는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다. 형제들도 모두 결혼해 손자들을 본 마당에 딸자식 하나쯤 없는 셈 치고 살겠다는 엄포에 재혁의 고모는 바로 납득하며 짐을 싸 출가를 했다. 그 뒤로는 소식이 온데간데없이 끊겼다는 것이다. 재혁의 부친이 계속 연락을 시도했으나 고모의 행적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재혁을 낳게 되면서 그의 부친도 가정에 힘을 쏟게 되었다.
재혁이 그의 고모를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재혁이 7살이 되었을 무렵 그의 부모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뒤 열린 장례식장에서였다.
‘네가 재혁이구나.’
분명 재혁의 아버지는 고모에게 재혁에 관한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했어도 그것은 재혁이 태어났을 무렵이었지, 이미 어린이가 된 재혁을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린아이여서 상주도 서지 못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큰아버지가 상주를 서고 있었을 때였다. 재혁은 너무 어려 부모의 죽음이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다시는,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없다는 말에 그제야 눈물을 터뜨린 것이었다.
한참을 울다가 장례식장 건물의 뒤쪽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지나가는 개미들을 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묘령의 여인이 나타나 재혁의 옆에 다가왔다.
‘누구세요?’
‘너는 오빠랑 정말 한구석도 닮지 않았구나.’
‘……’
‘난 네 고모야. 너, 나랑 같이 갈래?’
재혁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를 잃고 모르는 어른들만 득실대는 어두침침한 장례식장에 있는 것보단, 왠지 모르게 낯익고 편한 여자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7살짜리에게는 더 나은 길이었으리라. 그렇게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모의 손을 잡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이상하게 그 뒤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몇 번인가 고모의 집으로 전화가 걸려와 고모가 담담하고도 싸늘한 목소리로 한참을 통화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어린 재혁을 거두는 문제와 그에 딸린 재산권 문제 때문에 걸려온 친척들의 전화였을 거라고, 어린 영서의 머리칼을 넘기며 영서의 아버지는 씁쓸하게 말했다.
‘아빠의 고모는 아빠의 부모이자 은인이야. 아빠가 이렇게 멀쩡하게 잘 커서 너희 엄마와 만난 것도, 우리 영서를 가진 것도. 다 고모 덕이라고 할 수 있어.’
어렸던 영서는 그저, 얼굴도 모르는 고모할머니의 존재에 대해 그날 처음 알게 되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영서의 아버지는 외동이었기에 영서는 ‘고모’라는 단어도 그날 처음 발음해 본 것 같았다. 아빠에게는 고모가 있구나. 그 사람은 나한테 고모할머니구나.
영서도 감았던 눈을 떴다.
“할머니, 할머니라면 제 이야기를 믿어주실 것 같아요. 그만큼 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도, 말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할머니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영서 네가 사고를 당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겠구나.”
“네.”
영서는 무릎 꿇은 다리 위에 놓았던 양손을 주먹 쥐었다.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