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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6화 (16/166)

16화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 일이 끝나면 꼭 와서 전부 설명드릴게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제가 지금 어떤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단다. 재혁이가 말하지 않던? 네가 태어나기 전, 내가 영서 너의 태몽을 꾸었다고 말이다.”

“저의 태몽이요?”

“그래. 이런, 내 정신 좀 봐. 너도 나도, 지금 당장은 긴 얘기를 할 수가 없겠구나. 네 말대로 시간이 얼마 없지 않니. 아이구, 그걸 어디에 뒀더라…”

노인은 에구구, 하며 앓는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굽은 허리를 일으켜 방 한구석에 있던 불단의 앞으로 다가갔다. 모형인지 진짜인지 모를 금빛의 불상이 인자한 미소를 띤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불단이었다. 그 밑에 난 서랍 중 하나를 연 노인이 무언가를 꺼내 영서의 앞에 내려놓았다.

“한 달 전부터 영서 너에게 주려고 준비해뒀던 것이다. 내가 사흘 밤낮을 기도하고 쓴 것이니, 네 영력을 담을 그릇으로 어느 정도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게야.”

“이게… 뭐예요?”

“열어보렴.”

노인이 내민 것은 빛바랜 빨간 주머니였다. 금실로 무언가 모를 글자가 수놓아져 있는 주머니의 입구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지만, 영서가 집어 들자 마치 가위로 끈을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륵 풀어졌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자 영서는 마치 정전기가 오르는 듯한, 섬찟하면서도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이건…?”

영서의 손에 들린 것은, 얇은 노란색 한지에 검푸른 먹물로 글자가 쓰인 부적 다발이었다.

***

“절했는데. 이제 뭐 하면 돼?”

“음… 잠깐만. 분명 이쯤에서…”

어리둥절한 해강의 얼굴을 뒤로하고, 영서는 눈을 감더니 발을 들어 몇 발자국 이동했다. 정확히는 좌로 세 걸음, 앞으로 다섯 걸음이었다. 눈을 뜬 영서는 발밑을 내려다보더니, 쪼그려 앉아 강아지마냥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앗, 영서야, 도와줄까?”

“움직이지 마!”

해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서가 소리쳤다. 해강은 기죽은 얼굴로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잠자코 영서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영서가 이 밤에 무덤 앞으로 자신을 데려와 무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 무덤 밑에요?”

“그래, 정확히는 그 근처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게야.”

“그렇지만, 그럼 제가 그걸 파내야 해요? 그거 불법 아닌가…?”

“홀홀홀, 농담도 잘하지. 이 할미가 지금까지 사람 살리려고 해온 일이 전부 합법적인 일은 아니었단다, 영서야.”

너는 역시 재혁이를 너무 닮아 탈이야. 노인은 부적 다발을 쥔 영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영서는 문득, 자신의 고모할머니가 무시무시한 인물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어색하게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영물이란 게 대체 뭐예요? 뭔지는 알려주셔야 제가 알아보고 사용하죠.”

“아마 영서 네가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을 게다. 물론 그걸 쓰기 전까지 그 삿된 것이 너희를 가만두고 보지는 않겠지. 그러기 위해서 영서 너의 힘과 이 부적이 필요한 거다.”

“……”

영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쥔 부적 다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낡은 주머니 안에서 꺼낸 부적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얇고 평범해 보였다. 뭔가 엄청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영서는 해강과 미리를 덮고 있는 그것을 퇴마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고모할머니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것이 해가 지기 두 시간 전쯤의 일이었다. 시 외곽으로 빠지는 산기슭에 위치한 고모할머니의 절까지 가려면 버스로 한 시간은 넘게 걸리기 때문에 이미 전화를 걸면서 버스에 몸을 실은 상태였다. 영문 모를 목소리로 아버지는 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세 번의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고모할머니는 전화를 받아 딱 할 말만 하신 뒤 끊어버리셨다.

‘영서 너에게 필요할 영물靈物을 가지고 있다. 해가 지기 전에 내가 있는 곳으로 오너라. 그 애도 같이.’

할머니가 거처하신 절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해강은 마냥 창밖을 보며 신나 보이는 상태였고, 영서는 그런 해강을 보며 그의 단순함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영서도 같이 창밖의 짙어지는 녹음을 보며, 어릴 때 한 번 만났던 고모할머니를 다시 만난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고모할머니가, 자신이 사고를 당한 직후에 먼저 연락이 오셨다는 것 얘기를 지나가듯 들었다는 사실도. 물론 그때는 자신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 때라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분명 아버지가 그렇게 전했던 것 같았다. ‘영서가 의식을 찾으면 자신을 한 번 찾아오라고’ 말이다. 그게 이렇게 큰일이 닥친 뒤에야 찾아뵙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영물인데 그런 곳에 묻혀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애초에 그런 물건이면, 그 악귀가 자신의 약점이나 다름없으니까 벌써 훔쳐다 파괴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내가 십 년 전에 지리산에서 수행하다가 마주쳤던 벼락 맞은 나무의 가지로 만든 물건이다. 아마 그놈이 그것에 손을 직접 댔다면 바로 타죽었겠지. 그러니 계속 그렇게 기회만 엿보고 맴돌았을 게야. 내가 계속 이 불단 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글쎄 일주일 전에 웬 도둑이 들었지 뭐냐. 다른 것들은 그대로지만 그 영물을 담은 상자만 없어진 것을 보아하니, 분명 그놈의 힘이 커져 다른 인간을 조종해 이 절에서 빼돌린 게 분명해.”

일주일 전이라면 분명, 미리가 그 묘에 찾아간 날이었다. 뭔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기분에 영서는 입맛이 썼다. 역시 단순한 잡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놈이군. 영서는 부적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 영물을 찾아내, 방금 알려주신 순서대로 한 뒤 완전히 파괴하면 되는 거죠?”

“그래.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없어야 한다.”

“…할머니, 그 악귀 말이에요.”

영서의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본 노인은 주름진 손을 뻗어 영서의 팔을 두드려 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원귀의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간에, 이미 인간에게 해를 끼친 놈이다. 그 이상 그건 이미 악귀에 지나지 않아. 산 자에게 해를 끼치는 죽은 자를 걱정하면 안 돼.”

“…”

“영서야, 명심하거라. 우리 같은 사람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죽은 것들도 한때는 산 것이었지. 하지만 이미 죽은 이상 그들만의 불문율이라는 것이 생긴단다.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 혹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따라야만 하는 것. 그건 우리 인간들이 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더 위에 계신 분들께서 정하시는 일이지. 우린 그분들의 힘을 나눠 받고 그 일을 행하는 것뿐이야. 너무 하나하나 심려치 말거라.”

“…네.”

“이 일을 무사히 해낸다면, 너에게 해줄 얘기가 아주 많겠구나. 그리고 영서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기억하거라. 절대 방심해서는 안 돼.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는 일을 끝내도 끝낸 것이 아니다.”

“새벽닭이요?”

“요즘 말로는 일출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네가 해치웠다고 방심한 그 순간에, 그것은 다시 되살아나려고 안간힘을 쓸 거다. 절대 끝까지 방심하지 말거라. 그 영물에 그 녀석을 잡아넣은 뒤,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그러니까 해가 뜨기 전까지는 네 품에서 떼어 놓지도, 그걸 파괴해서도 안 돼.”

영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은 인자한 손길로 영서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팔이 조금 아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우리 영서가 이렇게 장성했을꼬. 정말 시간의 흐름이란 우스울 만큼 빠르구나. 재혁이가 어렸을 때랑 똑 닮았어.”

“…할머니.”

“너에겐 힘이 있다, 영서야. 자신을 믿거라. 네가 아니면 네 친구를 구할 사람은 없으니까.”

노인은 너무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한 탓인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제 할 얘기는 끝났다는 듯 손을 내저은 노인은 불단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아 향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영서도 그 작은 등에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별채를 나섰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해강과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것은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본디 귀신들이 다니는 시간은 새벽 2시부터이기 때문에, 영서는 조급한 마음을 참고 해강과 밖에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혹시 해강에게 씐 저 삿된 것이 그의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으니까. 둘은 마치 비행청소년처럼 교복과 가방을 그대로 입은 채 시내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자정이 가까워오면서 해강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어렸다. 그것이 단순히 하루 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녀서인지, 아니면 다가오는 ‘그것’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서는 마지막으로 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리는 받지 않았다.

“이제 곧 새벽 2시네.”

“그래.”

“있지, 영서야.”

“왜.”

“내가 왜 너한테 데이트하자고 했는지 혹시 알아?”

이 자식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왜 이딴 소리를 하는 것인지, 영서는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인 줄 알고 귀 기울였던 자신마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몰라. 지금 너한테 엮여서 지금까지 이런 생고생까지 해야 하는 내가, 굳이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에이, 매정하게 굴지 말고.”

“내가 알 바야?”

둘은 새벽 두 시를 앞두고 장희빈의 묘 근처에 있는 풀밭에 망연히 걸터앉아있었다. 누군 지금 손에 땀을 쥐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이 녀석은 태평해 보이네. 해강은 영서가 간신히 짜증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희낙락한 얼굴로 강아지풀을 뜯어 영서의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진짜 아는 척도 안 해야지. 아니지, 비싼 밥이라도 한 번 얻어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자식 집도 부자라던데. 그래, 초밥이 좋겠어. 장어덮밥도 추가다.

“뭐야, 별로 안 궁금해?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지.”

“시끄러워.”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나한테 조금은 호감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미쳤냐고. 아까부터 히죽대면서 옆에 찰싹 붙어 앉아있는 꼴이 짜증 났다. 영서는 조금만 참자고 되뇌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곧 새벽 2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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