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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7화 (17/166)

17화

때가 왔다.

영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은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잡아먹힐 듯한 어두컴컴한 사위를 휘 둘러본 뒤 영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강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서늘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가 영서의 흘러나왔다. 아까 전 그의 고모할머니가 일러준 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영서는 차분히 순서를 외웠다.

“축시. 묘를 바로 놓고 북서쪽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린다. 이때 귀에 씐 자가 깨끗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절을 올릴 것.”

“에, 내가?”

“의식을 행하는 자는 영물을 준비해 제단 위에 올린 뒤, 귀에 씐 자의 눈을 가릴 것. 그리고 준비해온 피를 영물의 위에 뿌린 뒤 칼로 찔러 주문을 욀 것. 이때, 주변에 두 사람 외에 살아있는 것은 없어야 한다.”

“피라고?! 여, 영서야, 너 피 갖고 온 거야?”

“조용히 좀 해! 너는 얼른 여기서 절 올려.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하지 말고.”

영서는 핀잔을 준 뒤 어색하게 묘 앞으로 다가서는 해강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산 자의 기운은 없는 듯했다.

영서는 또 꺼지듯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준비해 온 모종삽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절을 다 했는지 멀뚱멀뚱 서서 영서를 쳐다보는 해강이 보였다.

“아마 이쯤이지 않을까 싶은데…”

팍 팍 팍-

해강과 묘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부분에서, 발밑부터 따스하면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쭈그려 앉아 발밑을 파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무언가가 삽에 걸렸다. 이건가?

“영서야, 그게 뭐야? 나도 보여주면 안 돼?”

“조용히 하랬지. 너, 이제부터 한 마디도 꺼내지 마.”

“너무해…”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 해강을 무시한 채 영서는 손끝으로 축축한 흙을 살살 헤치고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꺼냈다. 검은색의 조그마한 상자였다.

영서는 심호흡을 한 뒤 흙에서 파낸 상자의 뚜껑을 조심히 열었다. 오래되어 낡았는지 철제 접합 부분이 삐걱대는 소리가 두 명의 조용한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어딘가 멀리서 풀벌레가 우는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이건…”

상자 안에 담겨있던 것은 작은 목각인형이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게 이거였구나. 벼락 맞은 나무로 할머니가 직접 깎아 만든 투박한 나무인형. 인형은 간신히 사람의 형태만 흉내 내고 있을 뿐, 세밀하게 조각되지는 못했는지 뭉툭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흐릿한 이목구비의 흔적만 남은 목각 인형은 어딘가에 사용된 적이 있는지, 그다지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을려 거뭇한 것이, 벼락 맞은 나무로 만든 것은 확실해 보였다. 벼락 맞은 나무와 이 귀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그냥 듣기만 해. 대답하지 말고.”

해강은 뭐라 입을 열다가, 합 하고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쓸데없이 말은 또 잘 듣는 녀석.

“내가 가져온 천으로 네 눈을 가릴 거야. 모든 게 끝나면 다시 풀어줄게. 그때까진 한 마디도 해선 안 돼. 숨소리도 크게 내지 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 천을 풀고 앞을 보면 안 돼. 알겠어?”

해강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서는 양손으로 상자를 들고 해강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흰 천을 꺼내 해강의 눈을 가린 뒤 풀리지 않도록 꼭 매듭을 묶어주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말라는 말을 신경 쓴 것인지, 평소의 그와 달리 정말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오히려 영서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해강의 눈을 가린 영서가 복잡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가려도 여전히 높이 솟은 콧대와 가지런한 입매가 눈에 띄게 반듯한 얼굴이었다. 왠지 어색해진 영서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러났다.

“어떤 소리가 나도, 나를 끝까지 믿어줘. 다 너 살리려고 하는 거니까.”

해강의 고개가 다시 한번 느리게 끄덕여졌다.

“잠깐 손가락 좀 줄래?”

해강이 오른손을 뻗자, 영서가 그 손을 받아들었다.

움찔, 하고 해강의 몸이 떨리더니 그의 검지에서 선홍빛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영서는 해강의 손가락을 그은 작은 칼은 추스르고는, 해강의 손가락을 타고 뚝 뚝 떨어지는 피를 작은 목각 인형에 묻혔다. 투박하게 조각된 얼굴 부분에 피가 스며들면서, 이상하게 인형의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미묘하게 해강의 인상과 닮아 보였다. 남은 천으로 해강의 손가락을 덧대어 꼭 묶은 영서가 피 묻은 목각 인형을 든 채 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시작해 볼까.

영서를 입술을 깨물고 묘 앞에 놓인 제단에 목각 인형을 올려두었다.

“하늘과 땅이 창조된 이래 존재하고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여, 반야바라밀다의 전언을 말하나니 모습을 나타내어 내게 그 뜻을 보이라. 피안의 너머에서 거슬러 온 자여, 원해오던 제물을 바치나니 모습을 나타내어 내게, 그 뜻을 보이라.”

영서의 낮고도 또렷한 음성이 주문을 외자마자, 둘의 주변으로 강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이 걷히는 순간, 영서는 목이 죄어오는 듯한 압력에 급하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놈은, 보통 잡귀 따위와 견줄 수조차 없는 놈이다.

터주신인가? 아니, 그보다 더했다.

신神급이다.

지금 영서가 불러낸 것은, 이 커다란 능에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하나의 ‘신’이었다.

영서는 충격으로 커다랗게 뜬 눈을 간신히 깜박였다. 턱을 타고 식은땀이 또륵, 굴러떨어졌다.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원한을 가지고 봉해진 원령이라니.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남자도, 할머니도 없이, 나 혼자?

그 순간, 영서의 뒤통수에 무게감 없는 손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이, 꼬맹이.

착각인가? 아니면, 진짜로?

-오랜만에 와 봤더니, 재밌는 걸 하고 있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영서의 뒤통수와 어깨를 잡은 채 킥킥 웃고 있었다.

“아저씨…!”

-제법인데.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영서가 깜짝 놀란 얼굴로 숨을 들이켜자, 일직차사는 쿡쿡 웃으며 영서의 어깨와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묘 앞에 둥실둥실 커져가는 원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남자는 태평한 얼굴로 눈을 가린 해강과 원혼을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

-오오, 최근에 이 주변에 자꾸 그림자가 낀다고 하더니, 이놈 때문이었구만.

일직차사는 턱을 문지르며 선선한 말투로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지금 감탄할 때냐고요, 진짜! 영서는 혹시라도 해강에게 들릴까 싶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질책했다.

“아저씨, 지금 저 바쁜 거 보이시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중에 얘기해요, 나중에!”

-별일이네. 명부 건 아니면 다른 인간들한테 관심 한 톨도 안 주던 놈이, 지금 쟤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혼자 저런 거물을 소환한 거냐?

“치, 친구예요! 그리고 딱 봐도 사람 죽게 생긴 일인데, 명부가 중요해요?”

-저런 잘생긴 친구도 있었냐, 네가?

내가 알기론 없는데. 남자는 얄미운 말투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제 풀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어, 쟤 움직인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서는 반사적으로 부적을 꺼내 들고 고개를 돌렸다.

“저…게 뭐야?”

묘 앞에는 어느덧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묘는 물론 묘를 둘러싼 잔디밭과, 아까 영서와 해강이 앉아 있던 정자, 묘로 들어오는 입구 언저리까지 사방이 모두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중심을 바라보자, 둥글게 솟은 봉분 앞에 높인 제단 위에, 가지런한 두 발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안개 사이로, 흰옷자락, 긴 소매, 긴 머리칼이 드러났다.

“……저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셨군.

원혼,이라고 짐작되는 그것은 고개와 팔을 푹 떨어뜨린 채 제단을 밟고 올라서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영서는 한눈에 그것이 바로 해강과 미리를 좀먹던 귀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바닥에 닿을 듯이 긴 머리칼. 그 뒷모습은 마치 숨이 턱턱 막히는 사람이 몸을 뒤트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어깨와 등을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주변을 감싸던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같은 것들이, 지금은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고요했다. 그저 저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영서의 모든 오감은 저것에 사로잡혀 다른 것에는 감각을 나눌 수도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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