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서, 권영서!
“……”
-이봐, 권영서! 일어나!
영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권영서! 내 말 들리나? 어이!
“으…으으…”
-목숨은 건졌군. 나 참, 그렇게 무식하게 매개에 몸을 붙인 채로 퇴마를 진행하면 어떡하나? 너까지 말려들어 해를 입을 뻔했잖아.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하지 마.
“…성공, 했어요?”
-아, 그런 모양이다.
“……하, 하아….하하하…”
-왜 웃어?
“그냥…… 안 될 줄 알았거든요.”
연기와 흙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나자, 영서는 묘 앞에 쓰러져 있던 자세 그대로 눈을 떴다. 잠시 기절했던 건지, 바닥에 대자로 누운 영서가 가물가물한 눈을 끔벅거렸다. 남자는 다시 웃음을 비식비식 흘리면서 영서의 볼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하여튼 저 둥둥 떠다니면서 사람 머리맡에서 내려다보는 버릇 좀 고치라고 해야지. 멍한 영서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영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픽 웃음을 흘렸다.
-그만한 힘을 가진 놈이 그런 생각을 해? 이놈 자식이, 그러면 될 일도 안 되는 거 몰라? 스스로를 믿어야지, 안 그러면 누가 믿어?
“그렇지만… 그 악령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에, 나… 순간 진짜로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무서운 놈은 처음 봐서……”
-한 번 죽다 살아난 놈이 무서울 게 뭐 있나. 그래봤자 죽기 밖에 더 해?
“말을 해도 꼭. 으…으윽!”
영서는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다, 날카로운 통증에 다시 형편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은 건지, 피부 겉면이 빨갛게 부풀어 올라 진물과 피가 엉겨 붙어 흐르고 있었다. 이 손으로 흙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으니, 당연히 상처가 벌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영서는 이마를 찡그리며 우는소리를 냈다.
“아아~! 진짜!! 개 아파!!”
-거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병원 신세 지게 생겼구만.
“짜증 나 진짜!!!! 아오오!!”
영서는 최대한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폭발을 직격으로 마주해서인지 교복과 얼굴도 흙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잔뜩 튀어 있었다. 이거 빨래는 또 언제 한담. 엄마한테 들키면 엄청 혼날 텐데. 게다가 몸까지 욱신욱신하고 힘이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힘이 빠질 일인가. 조금 졸리기도 하고. 아, 이건 밤을 새워서 그런가……영 서는 아득해져오는 정신에 머리를 흔들면서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흙먼지가 걷히고 사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악귀가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벌레 우는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던 그 고요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벌레 우는소리와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싸르르하게 울려 퍼졌다. 상쾌한 새벽바람이 화끈거리는 손바닥과 뺨을 차게 식혀주고 있었고, 일찍 잠에서 깬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눈을 끔벅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영서는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잊은 느낌이… 아! 주해강!”
영서는 고개를 돌리다가, 묘 옆쪽에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고 있는 해강을 발견했다. 절뚝거리는 발을 끌어 해강에게 다가가자, 영서의 인기척을 느낀 건지 해강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그의 눈은 아직도 가려져 있었다.
“주해강, 이제 다 끝났어. 눈… 풀어줄게.”
영서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소리 내어 해강에게 말을 걸었다. 해강의 얼굴에서 천천히 흰 천을 걷어내자, 발갛게 부은 그의 눈이 드러났다. 조금 울었는지, 천도 조금 축축했다. 영서가 털썩 주저앉으며 힘없이 웃자, 해강은 주변을 빠르게 살피고는 영서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영서구나.”
“뭐야, 너 울었냐? 안 그렇게 생겨서는, 겁은 많아가지고.”
“…진짜 영서야. 이번엔… 진짜 영서지…?”
“뭐? 무슨 소리야?”
영문 모를 말에 영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을 없애고 손에 화상을 입은 건 난데 왜 이놈의 정신이 나간 것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영서는 해강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툭 쳤다. 그러나 장난스러운 영서의 반응과 달리 해강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끝난, 건가?”
“다 끝났어. 말 잘 듣네. 답답하다고 안대 벗지도 않고.”
“……있잖아, 중간에, 영서 네 목소리가 들렸어.”
“응? 내가?”
“응.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들리는 거야. 엄청 상냥한 목소리로, 이제 다 끝났으니까 안대를 벗어, 라고 했어.”
“뭐? 그 자식이…!”
“그래서 안대를 벗으려고 했는데, 영서 네가 한 말이 떠오르는 거야. 자기가 벗겨줄 때까지는 자기 말도 믿지 말라고. 절대 내 손으로 안대를 벗지 말고, 영서 네가 벗겨주겠다고.”
해강은 힘없는 말투로 웅얼거리는 듯싶더니, 눈물 젖은 뺨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예쁘게 파인 보조개와 서글한 눈매가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해강과 영서의 머리 위로 한 줄기 햇빛이 올라왔다. 영서는 해강이 웃는 얼굴은 여러 번 보았지만, 지금 그가 짓는 웃음은 평소의 웃음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고 지랄이야, 진짜. 영서는 속으로 입을 삐죽대며 딴청을 부렸다.
“그래서 그냥 귀를 아예 막고 있었어! 싫다고, 저리 가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나 잘했지!”
“으… 그래, 잘했다.”
마치 나 칭찬해 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해강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결국 영서는 어쩔 수 없이 잘했다, 하며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 위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잘생긴 놈들은 울어서 눈이 부어도 잘생겼구나.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영서는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똑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울어서 눈이 부어도, 주해강은 역시 주해강이다. 쓸데없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해사하게 웃기는. 영서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리자, 그 순간 해강이 멀어져 가는 영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헉, 여, 영서야, 괜찮아? 왜 그래?!”
“으…아, 스읍…괜찮아. 그냥 손이 좀 까졌어.”
“이건 다친 정도가 아니잖아…!! 어, 얼른 병원…! 이 시간이면 응, 응급실로…!”
해강의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바지 주머니를 뒤지며 휴대폰을 찾기 시작했다. 항상 빙글빙글 웃으며 여유만만하던 해강의 얼굴이 저렇게 사색이 돼서 말까지 더듬는 모습을 보자, 영서는 왠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단 지혈이라도 하자. 여기서 얼른 나가서 내가 택시를 부를 테니까…”
“아, 알겠어. 호들갑은. 뭐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화상 조금 입은 거야.”
“그렇지만…”
해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묘안이라도 떠올린 듯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흰 천을 쭉쭉 찢어 영서의 손바닥을 꽁꽁 묶어주었다. 진지한 얼굴로 영서의 손을 꼼꼼히 감싸는 그의 얼굴에, 영서는 다시 기분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좀……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새삼, 무슨 남자가 이렇게 속눈썹이 길지. 웃는 것도 그렇긴 한데, 이렇게 정색하고 있는 얼굴도 또 다른 느낌으로 잘생겼다 싶고…… 그런데 난 왜 자꾸 잘생겼다는 말만 하는 거지. 미쳤나?
“앗, 뜨뜨…! 야, 살살해, 좀!”
“미안, 그렇지만 이래야 지혈이 잘 되니까.”
해강의 눈을 가리고 있던 흰 천은 이제 영서의 손바닥을 감싸고 있었다. 고등학생 치고 꽤 능숙한 솜씨였다. 얘는 어디서 또 이런 걸 배워왔대. 축구부 주장 같은 걸 하다 보면 피가 날 정도로 많이 다치나? 영서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얼얼한 손바닥을 살짝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피로 천이 붉게 물들었지만, 영서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로등 불빛은커녕 햇빛 하나도 제대로 닿지 않는, 나무와 덤불이 우거진 어두컴컴한 묘 앞에서, 영서와 해강은 서로 피를 닦아주니 마니 하면서 얼마간을 그렇게 있었다. 잠시 후 해강이 가방 두 개를 든 채 택시를 부르고 영서를 부축해서 묘를 벗어나는 뒷모습을, 일직차사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새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남자는 눈썹을 찡그려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마구 파헤쳤다. 분명, 어디선가… 어디선가 봤단 말이지. 그것도 엄청,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야. 하지만 남자는 곧 고민하기를 그만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일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저승사자란 것들은 다 그 모양이다.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하는 법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