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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20화 (20/166)

20화

혜리가 영서를 다시 찾아온 것은 영서가 다친 손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였다.

“얍! 권영서!”

“아악!!! 아 씨, 깜짝이야! 야, 너는 이렇게 자꾸 나타나지 좀 말라고!”

“뭐 어때~ 오랜만이다? 이 누나 없는 동안 명부는 좀 채웠냐?”

혜리는 방글방글 웃으며 영서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찔러댔다. 지난번에 거의 성불하기 직전에 일직차사의 방해로 거의 끌려가다시피 한 것치곤 혜리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그래, 게다가 학교 밖에서 보니 안색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엥?!

“유혜리, 너, 너 왜 여기 있어?”

“왜,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냐?”

그때, 둘의 뒤로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환자복을 입은 환자 여러 명과 평상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렸다. 조용하던 복도가 인기척으로 가득해지자 영서는 입을 꾹 다문 채 혜리에게 턱짓을 한 뒤 복도 옆 비상구 계단의 문을 열고 몇 걸음 내려갔다.

“왜 굳이 이런 어두침침한 곳까지 오냐? 어차피 네가 허공에 대고 말한다고 해도 여기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걸?”

“난 정신병자로 보이기 싫거든? 아니 그건 그렇고, 너는 우리 학교 지박령 아니었어? 어떻게 이렇게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거야?”

실제로 그랬다. 유혜리는 몇 년 전에는 살아있는 학생이었으나ㅡ게다가 전교 1등의 모범생이었다ㅡ일련의 사건들과 오해로 학교에서 투신한 뒤 깊어진 원한으로 학교에 매인 영혼이었다. 분명 지박령은 자신이 죽은 장소에서 떠나질 못하고 그 부근을 배회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자신이 죽어야 했던 이유, 자신이 죽은 그 순간, 그런 과거의 기억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얽매여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들이 바로 지박령이었다. 귀신 중에서는 그 힘에 따라 위험한 놈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는 놈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힘이 약한 놈들이 대다수. 영서는 더욱이 그런 영혼들을 많이 보고 지냈기에, 그들에 대해 약간의 애도를 가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혜리는 당당한 얼굴로 학교도 아닌,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은 와야 하는 이 큰 대학 병원 3층 복도에서 불쑥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영서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이 병원이니만큼 귀신이 득실득실한 곳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서가 경계할 만큼 강한 귀기가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던 영서를 멀뚱하게 올려다보던 혜리가 아 맞다! 하며 손뼉을 쳤다.

“나, 이제 학교 밖으로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됐어! 신기하지?”

“그게 가능해?”

“나야 모르지. 그런데 그때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왔는데, 이상하게 그 뒤부터 학교에 별로 있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교문에 몸을 댔는데, 그대로 통과하는 거 있지? 학교 주변은 예전이랑 그대로더라. 변한 게 없어~”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째 학교에 매어있던 혜리가, 단숨에 지박이 풀려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그 아저씨라면…그 남자, 일직차사를 말하는 거겠지.

지난밤 장희빈의 묘에서 그것을 봉인한 뒤, 손을 다친 영서와 기운이 쭉 빠진 해강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모든 긴장이 풀려 택시에 몸을 기댄 영서는 바로 잠에 곯아떨어진지라 일직차사에 대한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해강은 영서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뛰어들어 왔고,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영서와 눈물과 먼지 범벅인 해강의 모습은 이제 막 출근한 주치의의 평안을 깨지게 만들기에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영서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침 10시쯤이었고, 이미 영서의 부모가 한 번 얼굴을 보고 출근한 뒤였다. 새벽에 하나뿐인 아들이 양손에 큰 화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입원했다는 전화를 주치의로부터 받은 영서의 엄마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연락을 받은 영서의 부모는 울면서 새벽에 달려왔다가, 옆에 있는 해강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영서 친구니? 우리 영서, 대체 어디서 이런 꼴이 된 거야? 너도 같이 있었니?”

“아…그, 그게…”

“혹시…! 싸, 싸웠다거나, 그런!”

“그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해강은 과연 방금 일어난 일을 말해야 하는지 속으로 갈등했다. 말한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건지. 해강이 대답을 미루던 그 순간 영서 아빠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화면에 ‘고모’라고 뜬 것을 해강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 네, 고모, 제가 지금 영서 병원에…예…예? 정말요?”

“여보, 고모님이셔?”

“응, 그게…아…네…네…. 아… 그랬군요.”

“새벽에 갑자기 무슨 일이신 거래?”

의아한 아내의 물음에도 영서 아빠는 진지한 얼굴로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더니, 곧 알겠다는 답만 짧게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때 봤던 그 고모할머니 시구나. 해강은 눈을 깜박이며 부부의 눈치를 보았다.

“영서가 고모를 뵈러 갔나 봐. 자기 심부름을 하다가 다친 거라면서, 보기엔 그래도 크게 다친 거 아니고 그냥 피곤해서 잠깐 쓰러진 거니까 푹 재우고 수선 떨지 마라,라고 하시던데…”

“…수선 떨지는 않았는데…”

“영서 친구, 그래, 해강이라고 했나? 해강이가 마침 영서를 업고 병원까지 데려다줬다고 하시는구나. 영서 고모할머님 같이 뵈고 오는 길이지? 할머님이 해강이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라고 하셨어. 고맙고, 수고했다.”

“아하하,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해강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부부가 영서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영서의 양손에는 붕대를 감아놓아 발 안쪽에 굵은 주사 바늘이 박혀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영서의 얼굴은 평소의 영서보다 훨씬 창백하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해강은 잠자코 그런 영서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부부가 집에 돌아가고 나서도, 간호사가 다시 영서의 혈압과 수액을 체크하러 들렀을 때도 해강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영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씩 해가 뜨면서 따뜻한 햇살이 싸늘한 병실 안을 살금살금 채우고 있었다. 창가를 등진 채 영서의 침대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해강은 몇 시간 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강의 큰 키에 가로막힌 햇살이 그림자로 변해 길게 영서의 침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2인실의 병실은 다른 환자가 없어 영서와 해강뿐이었고, 복도도 아직 아침을 맞지 않았는지 어수선하면서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이따금씩 슬리퍼를 끌며 지나가는 수간호사의 발소리와, 속삭이듯 말하는 당직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의 대화소리뿐이었다. 영서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해강은 병실 안이 어느덧 아침 햇살로 가득 차오른 것을 느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이미 훤한 병실이었지만, 해강은 커튼을 칠 마음이 없었다. 그저 굳은 얼굴로 영서의 침대 옆에 목석처럼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해강은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겨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들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해강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고, 해강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옆 비상구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갔다.

지이잉- 지이잉-

“…여보세요. 응.”

해강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낸 뒤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흔들었다.

“응, 예상외던데. 생각보다 더 장난 아니더라.”

“아니, 아직 몰라.”

“…진짜라니까? 아직은 괜찮아. 그리고 지금은 자고 있어.”

“…그러는 형은?”

전화 너머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커졌다. 피곤한 듯 해강이 굳은 미간을 다른 손으로 문질러 폈다.

지긋지긋해.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해강이 그의 말을 잘랐다.

“알겠다니까. 사람 바보 취급 하지 마. 나도 이 정도 아니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어. 그리고 그러는 형은…”

“……어. 알겠어…. 응…. 응.”

“…알겠다니까. 문자로 사진 보낼게.”

몇 번의 대답을 더 한 뒤 해강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해강의 주변 친구들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해강은 불쾌하고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강이 이런 얼굴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으니까.

통화를 끝내고, 억눌린 한숨을 겨우 내뱉은 뒤 해강은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바꾸려 노력했다. 다시 말간 평소의 웃음을 지은 채로, 해강은 어딘가로 문자를 몇 통 전송한 뒤 휴대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았다.

그저 비상등만이 켜진 어두침침한 계단을 타고, 해강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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