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21화 (21/166)

21화

“야! 권영서, 나 이거 사과 먹는다?”

“그러니까 몇 번 말하니, 엄마가 항상 학교나 학원 외에 어디 갈 때는 꼭 연락을…”

“영서야, 고모할머니 오랜만에 보니까 뭐라고 하시디?”

-꼬맹이, 아직도 명부를 하나도 못 채웠네? 너 이래서 어디 맘 편히 제명대로 살기나 하겠냐?

영서는 말 그대로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고. 대체. 영서는 애써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저마다 남의 고막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영서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하, 여기에 차라리 주해강이 없는 게 다행이지. 그날 새벽에 날 입원시키고 그 뒤로 얼굴도 안 비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서가 아는 인간 중 제일 부산스러운 해강이 없는 쪽이 그나마…

우당탕- 쾅-

“아니 학생, 복도에선 정숙이라니까요?! 정말 계속 그러면 보안 팀에 연락하는 수밖에 없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영서야! 왜 병실 옮겼어! 한참 찾았잖아!”

….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영서는 차라리 혀라도 깨물고 다시 기절해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서가 손의 화상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손의 화상이었기에 손만 치료하고 퇴원하려던 영서의 계획이 무색하게도, 영서의 주치의는 특유의 안경을 들어 올리는 손동작으로 영서의 차트를 넘겨보며 말했다.

“영서 학생, 지난번에도 무척 빠른 회복력으로 수술 후 약 2주 만에 퇴원했었죠. 지금 보면 손의 화상은 전형적인 외상이라 상관없다 치더라도, 신체의 모든 수치가 정상인보다 약간씩 내려가 있어요.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친구의 말로는 코피도 자주 쏟는다고 하던데. 후유증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 입원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보고 다시 진찰 한 번 해 봅시다.”

“네?! 그, 그치만 코, 코피는 한 번 났었고… 자주는, 아닌데…”

“친구 말로는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코피를 쏟았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교복 상의를 적실 정도로 줄줄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하던데. 평소에 어지럼증이나 빈혈 기운을 자주 느끼는지?”

주해강, 이놈의 주둥이를 진짜…!

영서는 속으로 이를 득득 갈면서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부모님한테 먼저 연락부터…”

“이미 보호자분들께 연락은 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이 다시 검사를 하길 희망하세요. 전체적으로. MRI든 CT든 뭐든지.”

“…뭐든지요?”

“네. 뭐든지. 전부.”

영서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서는 퇴원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멀쩡한 상태였고ㅡ물론 겉으로는ㅡ영서는 스스로를 ‘나이롱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다시 익숙한 환자복을 입고 링거의 주사를 꽂은 채 느릿느릿 병원을 걸어 다니다 보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정말 환자가 될 것만 같다고 영서는 멍하니 생각했다. 게다가 병원은 밥도 맛이 없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아직 18살. 한창 맛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넘쳐날 나이인데 내일 검사를 위해 오늘 저녁을 굶으라니. 어차피 맛도 하나 없는 병원 밥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안 먹고의 차이가 크지 않은가. 영서는 간신히 아침상을 물리고는 힘없이 딱딱한 병원 침대에 누웠다.

“야, 권영서~!”

“어, 유혜리. 너 아직도 안 가고 여기서 뭐하고 싸돌아다녀?”

“말하는 뽄새하고는. 너 심심할까 봐 이 누나가 친히 병실까지 찾아와서 놀아주는 거잖아.”

병문안 몰라, 병문안? 혜리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병문안 왔다는 놈이 환자 냉장고를 뒤지냐?”

“에잉~ 뭐 어때? 어차피 난 귀신이라 실제로 먹지도 못하는 건데.”

“그러니까 실제로 먹지도 못하면서 왜 뒤지는 거냐니까.”

“이 짜식이, 야, 눈치가 있으면 발딱 일어나서 아이고 누님! 오셨습니까~ 하면서 제사상을 차려도 모자랄 판에! 귀신이 과일 좀 먹는다고 과일이 없어지길 하냐, 썩기를 하냐?”

혜리는 투덜대며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작은 냉장고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물론 냉장고의 문은 닫힌 채였다. 가볍게 문을 통과해서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더니, 혜리가 손을 꺼내자 그 손에는 새빨간 사과 한 알이 들려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꺼낸 거야?!”

“실제로 꺼낸 건 아니야. 난 몸도 없는데 뭐. 아무튼 어찌 된 일인지는 너도 죽으면 알 것이다, 캬캬.”

“말을 해도 꼭…”

“됐고! 냉장고 안에 사과가 실하다? 꺼내서 윗뚜껑 좀 따 봐.”

혜리의 등쌀에 못 이긴 영서가 눈을 흘기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몸을 숙여 냉장고를 열자 정말, 윤기가 반지르르한 붉은 사과가 들어있었다. 사과뿐이랴, 포도, 배, 망고, 키위같이 다양한 과일들이 예쁜 리본이 매인 바구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가 사다 놓은 건가. 영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뒤 사과를 한 알 꺼내 세면대로 가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문질러 닦았다.

“위에를, 뭐 어떻게 하라고?”

“제사 안 지내봤냐? 제사상에 사과나 배, 수박 같은 거 올릴 때 하는 것처럼 하면 돼.”

“…진짜로 그런 게 먹히는 거였어?”

“그냥은 우리도 못 먹지. 인간이 이렇게 해서 제사상에 올려주면 그때부터 먹을 수가 있더라고. 아무튼 빨리 깎아줘! 사과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 말야, 그동안!”

이미 죽었으면서 말도 많다. 영서는 들리지 않게 투덜대면서 과도를 들어 사과의 윗부분을 동그랗게 깎았다. 빨갛게 광이 나는 사과의 윗부분에 흰 원이 하나 둘러진 모양새였다. 대충이지만 그렇게 깎아 접시 위에 놓아 주자, 혜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혹시 향 같은 건 없겠지? 향냄새 맡으면 더 맛있는데.”

“여기 병원이거든? 간호사 쌤들한테 맞아죽을 일 있나.”

“하긴 그렇네. 아무튼 이제 접시를 여기 서랍 위에 잘 올려놔줘. 그리고…”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서 이 사과를 바치는 거라고 생각해.”

“에엑…그렇게까지?”

“아, 빨리~!”

“으음…”

영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손은 모으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듯한 상상을 했다. 뭐라고 빈담. 음, 유혜리가…이 사과를 먹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과를 유혜리한테 주세요? 오랫동안 먹고 싶었다고 하니까…아무튼. 영서는 눈을 감고, 혜리가 사과를 받아들고 기쁘게 웃는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꽤 귀여운 상인 얼굴이지만, 항상 화를 내거나 삐죽대던 그 얼굴이, 이 사과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얼굴을 상상했다.

“고마워!”

영서가 눈을 뜨자, 상상하던 대로였다.

혜리는 밝게 웃으며 사과를 들고 와삭와삭 베어 물고 있었다. 기쁨으로 담뿍 솟아오른 뺨에는 정말로 행복의 빛이 가득했다. 사과 하나로도 저렇게 기뻐하다니.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고, 게다가 먼저 죽었던 사람이지만, 지금 짓는 웃음 하나는 정말 단 한 톨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영서도 그저 함께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번에 말했던 거, 나한테 해줄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그게 뭐야?”

“응? 무슨 얘기?”

“너 성불시키려던 날에, 그 얼굴 없애주면 나한테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주겠다며.”

“아~…그랬었나?”

혜리는 사과 하나를 기어코 다 먹은 채 기분 좋은 얼굴로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던 혜리를 보며 문득 생각난 약속에 영서가 입을 열자, 혜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진짜로 해 준다 그랬거든? 먹튀아냐 이거?”

“으음… 나, 난 한낱 지박령이라, 내가 뭘 알겠니, 헤헤…”

“뭐?!”

혜리가 시선을 피하며 에둘러 말하는 것이 느껴지자, 영서는 팩 쏘아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눈치가 이상해. 분명 그때는 정확하게 내 눈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나의 과거에 대해 알려줄 것이 있다고 했는데. 영서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혜리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머쓱한 얼굴로 벽의 무늬를 세는 듯한 혜리의 얼굴이, 영서의 의심을 거두기엔 아직 어수룩해 보였다.

“…진짜야, 난 모른대도.”

“…휴우, 그래 뭐. 너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헤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혜리가 갑자기 영서에게 얘기를 해주고 싶지 않아졌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영서는 스스로 추측했다. 적어도 그동안 봐온 혜리의 성격으로는, 빚을 지면 갚지 않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기에 만약에 그걸 기억했다면 영서에게 이미 말해주었을 거고, 잠시 사이에 전부 까먹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혜리의 성불이 보류된 직후 일직차사가 혜리와 잠시 볼 일이 있다고 데리고 갔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영서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혜리가 그 남자를 따라간 후, 나는 그동안 혼자 다니다가 며칠 전에 주해강에게 휘말려 정신없이 지냈었지. 그리고? 혜리가 갑자기 병원까지 직접 이동해 나를 보러 왔다. 지박이 풀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지박령의 지박이 풀리는 경우는 단 하나, 성불할 때뿐.

그렇다면 혜리는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게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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