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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22화 (22/166)

22화

영서는 섬찟한 생각에 혜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혜리는 창밖으로 병원의 뒤뜰을 내다보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때 혜리의 이름을 내가 가져왔지만, 명부에는 적히지 않았다. 중간에 그 남자가 개입했지. 그리고 그 남자가 혜리를 데려가고, 며칠이지만 내가 혜리와 떨어져 있던 기간 후에 혜리의 지박이 풀려났다.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해. 영서는 복잡해지는 머리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나의 죽음, 그리고 나의 ‘계약’에 대해 알려주는 쪽이 나쁜 쪽인가?

아니면 숨기는 쪽이 나쁜 쪽일까?

일직차사의 말로는 내가 스스로 알게 될 거라고 했지. 하지만 혜리가 그 남자의 영향으로 뭔가 달라졌다는 건 분명하다. 게다가 나에 대한 얘기들을 함구하라는 명령도 받았을 터. 어디까지나 영서의 추측이지만 그랬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게 대체 뭘까. 둘 사이의 모종의 거래? 아니야, 일직차사 급이나 되는 남자가 한낱 지박령에게 그런 행동을 할 리는 없고. 역시 혜리가 명령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럼 그 남자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

아, 모르겠어~!!!!!!!!!

영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얼굴을 양손으로 싸쥐고 이불에 푹 얼굴을 묻었다.

“…너, 머리는 괜찮니?”

혜리가 한심함 반, 측은함 반이 섞인 눈으로 혀를 차며 절규하는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혜리야, 혹시 너, 내가 없는 사이에 일직차사가 뭔가를 시켜서 그랬다거나…”

“응? 무슨 소리야, 그 아저씨가?”

“그래, 뭔가 수상해, 그 아저씨. 명색에 일직차사나 되는 인간이, 자꾸 일도 안 하고 불쑥 불숙 병실이나 찾아와서 사람 놀래키고…”

-내가 뭘?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 건, 정말로 놀랐다. 진심으로.

영서는 퍼드득 놀라 이불을 던졌지만, 던져진 이불은 남자의 몸을 가볍게 통과해 바닥으로 풀썩, 착지했다.

“아니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요!!!!”

-너는 저승사자가 노크하고 들어오는 거 봤냐?

“진짜 프라이버시가 없어, 프라이버시가!”

-꼬맹이들끼리 뭘 그렇게 쑥덕거려, 내 욕했지 방금.

“아, 아니거든요? 하여튼 귀만 밝아가지고…”

-짜아식이, 야, 권꼬맹이. 유꼬맹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하랬지. 네 손 떠난 일이라고, 쟤는. 너는 다음 영혼이나 성불시켜서 명부를 가득가득 채워도 모자랄 판에 또 손이나 다쳐서 입원이나 하고, 엉?

“꼬맹이라고 하지 마세요! 내가 유혜리보다 한 뼘은 크구만…”

“너는 그게 중요한 거냐고…”

“아, 아무튼! 아저씨도 좀 도움이 될 만한 일 좀 소개해 주든가, 뭐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잡귀들은 손만 대도 흩어지고, 그렇다고 이번에 주해강 일처럼 너무 거물급은 힘들어요. 게다가 악귀라서 이름도 못 얻었고.”

-명부 확인해 봤어? 이름 없는 거 확실해?

“네? 그치만…”

-열어봐.

영서는 마지못해 명부를 꺼냈다. 정말로 주머니 같은 곳에서 꺼내 든 게 아니라, 작고 보송보송한 기운이 영서의 명치 부근에서 솟아나더니 곧 동그랗게 뭉쳐 명부가 된 거지만. 혜리는 지난번에도 봤던 장면이지만, 지난번보다 힘의 흐름이 훨씬 매끄럽고 안정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자 영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꺼낼 때마다 부산 떠는 것도 귀찮아서 연습 좀 했어.”

영서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낡은 명부의 종잇장이 선풍기 바람이라도 맞은 듯 팔락거리며 날아갔다. 두어 장 넘어가자 영서의 어깨가 멈칫, 하며 종잇장도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름…”

-그래, 뭐,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고들 하잖나.

“…그러게요, 전혀 확인해 볼 생각도 못 했네.”

낡고 바랜 종이의 한 면에는, 약간 휘갈겨 쓴 듯한 필체로 진하게 이름 석 자가 한자로 쓰여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름이지, 이건? 이, 이…

“이 영 복. 이라고 써져 있네요?”

“뭐, 뭐야. 혜리 너 한자도 읽을 줄 알아?”

“전교 1등을 뭐로 보는 거야. 게다가 이런 쉬운 한자도 못 읽니?”

“으윽…”

혜리의 핀잔에 영서는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금세 다시 착잡한 얼굴로 골똘하게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영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왜, 생각하던 이름이 아니라서 안심했냐?

“예, 예에?! 아, 뭐… 그건…”

-권영서 너, 예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귀신에 대한 동정과 주제넘은 이해심은 버려야 해. 죽어서까지도 원한이 남아서 이승에 떠도는 것들은, 보통내기하고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걸 혜리 앞에서 말해도 되는 거냐고요… 영서는 괜히 혜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그들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네가 뭘 걱정했는지 알아. 그리고 네가 걱정했던 그 대상이 아니어서 안심했겠지. 아마… 묘의 주인은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 겠죠?”

장희빈의 묘. 아무리 해도 한 나라의 왕비였던, 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영서만한 나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영서는 은연중에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한때 이 나라의 국모였던 자의 영혼이 그토록 망가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다행이에요. 정말로.”

-…앞으로 이런 것보다 더한 것들도 볼 텐데, 아직 멀었구만, 권꼬맹이.

“푸학, 꼬맹이래~”

“웃지 마!!!”

일직차사의 말투를 따라 하며 영서를 놀리는 혜리의 웃음소리가 맑게 터지고, 영서 또한 분해하다가 이내 같이 웃음을 흘리고 만다. 오랜만에 큰 걱정 없이 십 대 다운 웃음을 터뜨리는 둘을 보면서, 남자는 잔잔한 웃음으로 그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

“…그래서 아빠는 엄마랑 할머니를 뵈러 갔다 온다고 하시더라구. 나는 아직 입원 중이라 퇴원하면 뵈러 가기로 하고.”

“그렇구나. 2인실에 혼자 입원해 있으면 심심하진 않아?”

“별로. 어차피 손만 다친 거지 다른 몸은 멀쩡하니까, 평소엔 병원 주변을 산책하고 그래. 심지어 학교랑 학원 숙제를 고스란히 엄마가 갖다주는 바람에 밤마다 골치 아파 죽겠다니까.”

“아하하, 그건 하나도 안 부럽네. 나는 적어도 공부는 안 해도 되는데.”

“어? 너는 학교… 안 다녀?”

“응. 어쩌다 보니 매일 병원 신세라 중학교까지는 간신히 졸업했는데, 고등학교는 결국 중퇴했어. 해가 갈수록 검사할 일도 많아지고, 어차피 학교에 출석도 거의 못하게 돼서…”

“그렇구나…”

“그래도 영서 너는 다시 학교에 가겠구나. 지난번에는 정말로 다시는 못 깨어날 줄 알았는데.”

“지난번?”

“왜, 네가 이 병원에 처음 실려 왔을 때. 간호사 누나들이 전부 어린 학생이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고, 다시 소생할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얘기하는 거 듣고 좀 안타까웠었거든.”

“아, 맞다, 그랬지.”

“그런데 이렇게 다시 다쳐서 오기나 하고 말이야. 부모님이 속상하시겠다.”

영서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웃어 보였다. 아직 양손에 남은 큰 반창고 때문에 펜을 쥐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확실히 새 살이 돋고 있었다.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며 주치의가 혀를 찼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 혼자서는 심심하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영서 네가 다시 와서.”

“…응, 그럼 오늘부터 같이 산책할래? 점심 먹고 항상 뒤뜰을 돌거든.”

“정말? 좋아! 아, 그치만 오늘은 안 돼. 오후 1시부터 정밀 검사가 있어서 수간호사 쌤이 어디 가지 말고 있으라고 하셨거든.”

“그래, 그럼 다음에 가지 뭐, 그…”

영서는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중간에 목이 콱 막혀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목을 가다듬었다.

“….”

“…응? 왜?”

“…어, 근데…”

영서는 문득 드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황망히 눈앞에 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넌 누구야?”

소년은 아무 대답 없이 활짝 웃을 뿐이었다.

헉-

눈을 뜨자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

시간조차 짐작 가지 않았지만, 쥐 죽은 듯한 고요함과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싸늘한 밤바람이 어느덧 새벽의 중간쯤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킨 영서가,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면서 상체를 구부리고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서서히 익숙해진 눈에는, 텅 빈 맞은편 침대 하나와 둥근 시계, 꺼진 TV와 작은 냉장고의 틈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창문이… 어느새 열려있던 거지. 자기 전에 분명 닫지 않았나? 영서는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흐릿한 머리로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잠시 열었을 수도 있다. 물론 환자가 자는 틈에 머리맡 창문을 열어 두는 간호사는 없겠지만… 어쨌든.

영서는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커튼 자락이 가볍게 살랑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광경이었다. 고요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서는,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벗어둔 슬리퍼를 발끝으로 더듬어 찾았다. 부드럽고 가벼운 면이 발에 닿자, 영서는 발을 꿰고 이불을 걷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영서는 얼어붙었다.

자신의 실내화의 바로 한 발짝 정도 되는 거리에서부터, 병실 문으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어떠한 발자국.

마치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걸음걸이로 걸어 영서의 침대 옆까지 와 서있던 모양새였다. 발자국은 흙인지 아니면 젖은 무언가인지 모를 것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국에서는 비에 젖은 냄새가 쿰쿰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영서의 시선이 숨을 죽이며 촘촘하게 찍힌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 발자국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들어온 발자국은 남았지만 나간 발자국은 없었던 것이다.

영서는 해가 뜨고 간호사가 수액을 확인하러 올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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