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래서, 누가 간밤에 침입했던 것 같다?
“아저씨는 그런 거 알 수 있지 않아요? 뭐, 사이코메트리 같은 거 있잖아요. 물건에 손대면 과거가 보이고 어쩌구…”
-저승차사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사기꾼 놈들하고 날 동급 취급해?
“아니면 말고요.”
툴툴거리는 남자를 뒤로 한 채 영서는 식판을 정리해 병실 앞에 잘 치워두었다. 후식으로 나온 복숭아 맛 젤리의 뚜껑을 열면서 영서는 한숨을 쉬었다. 간밤에 분명 목격했던 그 발자국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데, 차사 씩이나 되는 양반이 도움이 안 된다니.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된 건가 싶어 영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발자국이 있었다며. 지금은 깨끗하다?
“아침 해가 뜨니까 증발해버렸어요. 그래서 아무도 제 말을 안 믿어준다니까요?”
-누가 믿겠냐, 그런 걸.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네가 잠결에 잘못 봤다고 하겠지. 어차피 CCTV 같은 거에도 안 찍혔다며. 누가 네 병실에 들어왔겠어?
“보통 사람들이라면 안 믿겠죠.”
남자의 눈썹이 실룩, 올라갔다.
-…그래서, 귀신의 소행이다?
“분명 사람이 한 짓은 아니에요.”
확실해. 영서는 확신에 찬 눈으로 복숭아 맛 젤리를 한 스푼 떠 입에 가져갔다. 달달하고 향긋한 복숭아 조각이 입안에 맴돌다가 목구멍 너머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뭔가 느껴진 거라도 있었어?
“제 기억이 맞다면.”
어느덧 복숭아 젤리의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이건 몇 스푼 먹으면 없다니까, 감질나게. 병원 편의점에 복숭아 젤리 팔던가? 영서는 또렷한 눈으로 스푼을 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이 병원 안에 있는 환자 중 한 명이 한 짓이에요.”
***
“삼천 육백 원입니다~”
“여기요.”
안녕히 가세요~ 판에 박힌 듯하게 살가운 알바생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 숙인 영서가 편의점의 문을 어깨로 밀며 나왔다. 준다는 비닐봉지도 마다하고 양손에 복숭아 맛 젤리를 하나씩 달랑달랑 든 채 입에는 쭈쭈바를 문 채였다. 병원의 지하 1층에 있는 편의점은 그동안 몇 번이나 들락거려서인지, 병원 복을 입은 채로 슬리퍼를 직직 끌며 드나드는 폼이 꽤나 안정적이었다. 왠지 요즘 단 게 땡긴단 말이지. 얼마 전에 혜리가 사과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봐서인지, 최근의 영서는 갑자기 달달한 간식이나 과일 같은 것들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원래는 어려서부터 단 거라면 질색이었는데. 입맛도 커가면서 변하는 걸까. 벌써 거의 다 녹아버린 쭈쭈바를 우물대며 끝까지 털어 삼킨 영서가 쓰레기통에 빈 쭈쭈바 껍질을 버리려던 찰나였다.
“선희 씨, 501호실 환자 차트 인수 좀 제대로 해요. 이게 몇 번째에요?”
“…죄송합니다.”
이크, 이게 말로만 듣던 태움이라는 건가. 영서는 저도 모르게 쓰레기통이 있는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영서의 맞은편에서 복도를 돌아 나타난 두 명의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기며ㅡ이유는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ㅡ엘리베이터 앞에서 간호사들이 나누는 짧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딱히 단 간식을 달고 사는 모습을 간호사들에게 보여서 좋을 건 없었으니 말이다.
“죄송하다고 할 필요 없어요. 일을 제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네.”
“처음에 들어올 때도 말했죠, 501호는 장기 입원 환자인데다가, 보호자분들도 예민하셔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고. 곧장 컴플레인 들어온다구요. 이번에는 다행히 제가 먼저 알아보고 수습해서 망정이지, 아이고…”
“저, 선배님, 그런데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뭔가요?”
“501호실 환자분, 원래 그렇게…”
간호사는 순간 헙, 소리를 내며 제 입을 막더니 말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귓속말이라도 하는지, 작게 속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라고 불린 간호사가 뭐라고 입을 여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그들을 반겼다.
“…제가 했다는 얘기는 혹시 어디 가서 하시면 안 돼요, 그 환자…”
간호사들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명랑한 기계음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듣는 이가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대화하려는 건가 보군.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귀 기울여 듣던 얘기가 싱겁게 끊겨버리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쓰레기를 마저 버렸다. 쓰레기통에 쭈쭈바 껍질을 넣은 뒤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방금 전 그녀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지 계기판의 숫자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곧 5에 멈췄다.
가만히 서서 그 숫자를 올려다보던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영서는 대수롭지 않게 복숭아 젤리를 든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영서야~!”
-야, 이놈 자식은 뭔데 여기서 죽치고 있냐? 빨리 내보내.
“몸은 좀 어때? 손은 괜찮아? 아, 너 없길래 내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괜찮지?”
-보면 몰라? 그리고 주인도 없는 병실에는 혼자 왜 들어오는 거야? 음침한 새끼네 이거.
“아, 이거 선물. 요즘 네가 과일을 그렇게 찾는다고 아주머니가 그러셔서 나도 새로 사 왔어. 애플망고 좋아해?”
-애플망고가 뭐야? 야, 권영서, 애플이면 애플이고 망고면 망고지 애플망고가 뭐냐?
“영서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그냥 서 있어? 아, 내가 먼저 들어와 있어서 좀… 그랬나?”
영서는 텅 비어 있던 병실이 이상하게 꽉 찬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항상 같은 얼굴로 마냥 밝게 웃으며 영서를 반기는 주해강과, 그 옆에서 삐죽대며 해강의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일직차사의 목소리를 쌍으로 번갈아가며 듣고 있자니 기운이 쪽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둘 다 그냥… 같이 나가줬으면…
“어, 왔냐.”
일단은 산 사람이 먼저지 않겠는가. 영서는 머릿속으로 직접 쨍알쨍알 짜증을 내는 일직차사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한 뒤, 억지로 사회성 있는 웃음을 지으며 해강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편의점 다녀오는 길이구나? 복숭아 좋아해, 영서야? 애플망고 말고 복숭아로 사 올 걸 그랬나 봐.”
-아니 그니까 애플망고가 뭐냐니까, 야! 내 말 무시하냐, 꼬맹이!!
“아, 아냐, 괜찮아, 고마워.”
“요즘 복숭아가 되게 달잖아, 그치.”
그랬던가… 해강의 다정한 웃음에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헤헤하고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하게 웃는 자신을 깨닫고는 금방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의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기엔 영서의 낯짝은 그리 두꺼운 편은 아니었다.
“흠, 흠,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병문안이지. 학교도 계속 쉬고 있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 한 줄 알아?”
반쯤 장난조가 섞인 애교스러운 말에 영서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었다. 애가 착한 것 같기는 한데, 나한테 이렇게 이유 없이 살갑게 굴 때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하지 못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단 말이지. 근데 뭐…주해강은 원래도 다른 애들에게 친절하고, 잘 대해주니까. 영서는 문득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던 해강의 무작위적인 친절함과, 그에 낚여버린 권미리라는 소심한 여학생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해강은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금방 기운을 차린 것 같은데, 미리라는 애는 그 뒤로 연락도, 소식도 끊겨버렸다. 학원에 나간다면 그 친구들한테 어떤지 좀 물어보기라도 해볼 텐데…
“응? 영서야,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으응, 무슨 얘기 했지? 미안.”
“아니야, 내가 아픈 애 붙잡고 괜히. 나… 불편하면 일찍 들어가 볼게.”
엥?? 영서는 당황한 나머지, 육성으로 엥? 하고 내뱉고 말았다.
해강도 조금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뜬 채 영서를 내려다보았고, 남자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닫고 팔짱을 낀 채 영서와 해강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아, 그, 저…절대로 안 불편해, 괜찮아!”
“…정말?”
“그으럼! 안 그래도 나 혼자 심심했는데, 하하하…! 해강이 너라도 놀러와 주니까 다행이다!”
“…이제 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뭐 하지만, 그날 일은 정말 마음 깊이 고마워하고 있어. 영서야, 고마워. 내 일인데 그렇게 다쳐가면서까지, 나를 위해서…”
이…이 전개는 또 뭐냐. 이 자식은 대체 왜 이렇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거지. 영서가 어물어물 변명하며 해강을 다시 앉히자, 해강은 갑자기 안심한 듯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얘는 대체… 대체 뭐가 문제지.
“사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잖아, 그치? 그런데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뛰어다니면서 고모할머니 댁까지 들르고, 같이 그…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를 퇴치해 주고. 날 위해서. 맞지?”
“아, 그…그게, 그렇긴 한데…”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던 거야. 나 있지, 그날 너한테 반쯤 장난이었지만… 데이트하자고 끌고 나간 거, 사실 진…”
“우,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게 뭐어어지??!!!?!!!”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해강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여, 영서야, 얼굴이… 영서 너도 참, 이렇게 빨리 진도를…”
아니 아니, 그게 아니잖아 이 자식아!!!
“아, 아니이!!! 해강아!!! 우와!!!! 이게 뭐지??!!?! 이것 좀 봐!!!!”
“뭐, 뭔데, 영서야?”
“그, 그러게!!! 글쎄 대체 뭘까 저게??!!!”
“…저건… 국화네?”
“그래!! 국화!!! 국…! 어엉…?”
얼빠진 영서의 얼굴과 달리, 해강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영서의 손을 떼어낸 해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이 열린 창문에는 흰색의 실크 같은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틀에는, 새하얀 도자기 재질의 길쭉한 민무늬 꽃병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