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누가 이딴 걸 가져다 놓은 거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방금 전에 수줍게 몸을 비비 꼬던 해강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누가 봐도 화난 기운을 풍기며 창틀로 다가간 해강이 꽃병을 들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물 한 방울 들어 있지 않은 꽃병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꽂혀 있던 국화는 이미 말라죽은 상태였다.
“아, 하하, 아마 꽃이 선물로 들어온 걸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꽂아 놔주신 게 아닐까? 내가 오늘 자리를 좀, 오래 비워서…”
“환자 선물로 누가 국화를 들고 와.”
해강이 불쾌하다는 듯 마른 국화의 줄기를 꺾어버렸다. 힘없이 떨어진 꽃대와 꽃잎들이 창틀에 가볍게 내려앉더니,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하나 둘 살랑살랑 날아갔다.
아무렴 병원에 입원한 사람에게 국화를 선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가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말이다. 게다가 국화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일 정도로 깨끗했으나, 손을 대며 금방 바스러질 정도로 바싹 마른 상태였다. 자연히 시들었다기보다, 누군가가 직접 꽃을 손질해 정성껏 말려 일부러 준비한 쪽이 더 일리 있었다. 그러나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영서는 약간 기분이 나쁘기야 하겠지만, 해강이 저토록 강한 불쾌감을 내비치며 국화 잎을 짓이기는 것을 보니 왠지 꽃을 받은 쪽이 자신이 아니라 해강인 것 같았다.
“해강아,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가 착각해서 잘못 둔 거겠지.”
“…영서야, 여기 병실은… 너 혼자 쓰고 있어?”
“그렇지? 2인실이긴 한데 지금은 나만…”
“그렇구나.”
해강은 잠시 뭔가를 헤아려보는 듯 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밝은 웃음을 띤 채 영서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저녁 나올 시간이네. 계속 말 시키고 귀찮게 해서 미안. 나 이만 갈게. 푹 쉬어.”
“아냐, 괜찮은데…”
“내일도 올게. 그래도 되지?”
“내일? 내일은 오후에 산책이…”
산책?
내일 오후?
영서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해강이 의아한 얼굴로 영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영서야, 내일 바빠?”
“…아니, 괜찮아.”
…분명 그건, 꿈이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그럼 내일도 같은 시간에 올게. 내일 봐.”
“응, 잘 가.”
왜 이렇게, 약속을 깬 듯한 기분이 들까.
***
“영서야, 오늘 우리 산책하기로 한 거, 미안한데 내일로 미뤄도 될까?”
“응? 왜?”
영서가 입을 열자 순간 불어온 바람은, 적당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봄은 이미 다 갔는데도, 여전히 그 부드럽고도 미약한 온기가 이마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영서는 왠지 간지러운 이마를 왼쪽 손등으로 문지르며 파던 흙을 다시 파기 시작했다. 세모난 모종삽 끝에 걸리는 돌들은 살살 흙을 긁어 파낸 뒤 대충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응… 별 건 아닌데, 주치의 쌤이 검사 가짓수를 좀 늘리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어제 내 검사 결과가 안 좋았나 봐.”
“정말?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데?”
“그건 나한테도 말 안 해주셔서 모르겠어. 최근에는 수치도 안정적이고, 다 괜찮았는데…”
“혹시 어디가 갑자기 아프거나 그래?”
“전혀. 오히려 난 멀쩡한데, 아니 거의 이전하고 똑같은걸. 선생님만 괜히 심각해진 걸지도.”
“뭐야 그게~너도 완전 나처럼 꾀병 환자 아니냐?”
“하하, 그런가.”
웃음소리는 길지 않았다. 금방 멎을 듯 이어지던 작은 웃음소리가 이내 한숨으로 바뀌었다. 영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열심히 흙을 판 뒤, 두 주먹쯤 깊이로 흙을 파낸 구덩이 안에 옆에 두었던 꽃을 뿌리부터 조심스레 묻었다.
“아무튼, 그래서 산책은 못 가겠다. 미안해, 자꾸 말 바꿔서. 나도 영서 너랑 산책 나가고 싶은데…”
“신경 쓰지 마. 산책이야 매일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가…”
영서의 이마로 구슬땀이 방울져 흘렀다. 이마가 간지럽던 게 땀 때문이었나? 눈썹을 적시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은 영서가 꽃을 다 묻었는지 흙을 꼭꼭 다져 눌렀다. 양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흙을 누른 후 삽으로까지 반듯하게 주변을 깎아 정리했다. 열심히 묻는 것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챈 영서는 고개를 들었다. 분명 여전히 해가 떠 있었는데, 누가 물어가기라도 한 듯 해는 사라지고 어둑한 하늘만 가득했다. 벌써 해가 질 리가 없는데. 영서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제 옆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분명 방금까지 여기서 나랑 얘기했는데, 그…
“…어라…”
이름이 뭐였지?
분명 내가 먼저 인사하고, 같이 여기로 나와서 대화를…
“…이름이…”
순간 눈앞이 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를 싸쥐자 흙이 묻은 양손이 보였다. 그래, 화단에서 내가… 꽃을 다시 심으려고…
꽃?
영서의 시선 끝에 자리한 것은, 방금 전에 손수 흙을 파 다시 심어 둔 꽃 한 송이었다.
분명 아직 생생하게 뿌리까지 살아있던 푸른 줄기와 이파리, 건강한 꽃대와 흰 꽃잎이 순식간에 바스락거리며 말라있었다.
국화였다.
“이, 이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등 뒤로 누군가의 무릎 같은 게 툭, 하고 닿는 느낌이 났다.
영서는 그대로 멈춘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등을 돌려 정체를 확인하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분명 고개를 들면 안 되는데, 등 뒤에 닿는 무릎이 이렇게 차갑고 마른 나뭇가지같이,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데. 왠지 영서는 고개가 점점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머릿속의 목소리가, 뒤를 보면 안 된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영서는 뒤에 선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야, 권영서!
영서가 눈을 뜬 것은 오전 6시 15분경이었다. 그것도 자연히 잠에서 깬 게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는 어떤 목소리 때문에.
“…이름… 이름이…”
-자다 깨자마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야, 정신 차려봐 임마.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채 진지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는 영서를 보며, 남자는 이 놈 보게,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갖고…쯧쯧… 벌써 정신을 놓아버렸구만. 하긴 한두 달이면 많이 버티긴 했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뭐야, 아직 멀쩡하네.
“지금 방금 기억날 것 같았는데…! 아…윽… 뭐였지?”
다시 머리가 은은히 울려오는 고통에 영서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 막 해가 떴는지 아직 아침 바람이 쌀쌀하게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람…?
“어, 창문…!”
-그래, 창문. 그리고 여길 좀 봐.
남자는 정장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느지막한 걸음으로 벽에 다가가 기대섰다. 턱 끝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바닥 쪽을 가리키는 몸짓에 영서도 시선이 따라갔다.
“…이건…”
-…이번 꿈, 어땠는지 소상히 말해봐.
남자가 귀찮게 됐네~ 하며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영서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서의 침대 앞바닥에는, 이전 밤과 같은 방식으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맨발이었다.
단순히 뭉뚱그린 모양새로 찍혀 있던 흙 자국과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것도 검붉은 무언가가 질척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선명한 발바닥에는 작게 발가락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해가 뜬 후인데도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누가 다녀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뭐? 또?”
“응…”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랬다는 건 잘못 본 게 아니잖아! 간호사 누나들한테 얘기는 해 봤어?”
“병실 바닥 더럽히지 말라고 나만 혼났지, 뭐… CCTV에도 안 찍히고 경비 아저씨도 새벽에 출입한 사람은 없다고 하시니까…”
영서는 한숨을 내쉬며 손안에 쥔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유리잔 겉면에는 상온에 둔 지 꽤 돼서인지 송골송골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끝부분이 잘근잘근 씹힌 빨대를 다시 입에 물고 에이드를 마시는 영서를 보며 해강은 난색을 표했다.
“병실 바닥에 발자국… 게다가 이번에는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면 이건 정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 아냐?”
“지난번에 난 자국은 분명 아침이 되니까 사라졌는데 말이지. 이제는 다 닦아버려서 다시 볼 수도 없지만.”
“이번에도 귀신의 소행인가…?”
해강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앉았다.
주해강. 영서를 다시 입원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명성황후의 능에서 업혀온 원혼과 한 여학생이 벌인 강령술로 어찌저찌하다 보니 영서의 비밀 아닌 비밀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당사자였다. 영서가 뭐라고 변명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해강은 영서의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ㅡ사실 전부 말한 것도 아니었으나ㅡ또 그 부담스러운 감동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영서를 도와주겠다며 자처한 것이다. 해강의 첫인상은 사실 영서에게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긴 것도 빤지르르하니 행동거지도 좀 양아치 같고, 음… 오히려 남중고에서는 해강을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인 것도 걸렸다.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항상 웃고 쾌활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호감을 사는 타입. 영서는 남들의 눈에 띄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조용히 살고 싶어도 이미 해강과 엮여버린 이상, 전학 온 뒤 그렇게 다짐하던 ‘조용하고 평범한 남고생의 일상’은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해강의 태도에 있었다.
“그래도… 영서 네가 나한테 이렇게 고민 상담도 해주고 나는 좀 감동…”
“고민은 아니야! 아니지 그럼!! 하하하! 나는 괜찮으니까!!”
그래, 바로 이런 점! 영서는 진땀을 흘리며 바로 말을 가로챈 뒤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주해강, 이런 점이 바로 걸린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