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해강이 영서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날, 그때는 분명 그 악령의 기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황당할 일이었다. 서로 얼굴은 알지 몰라도, 학교에서는 반도 다른 데다 이렇다 하게 말을 섞어본 적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유혜리와 그 ‘얼굴’을 퇴치하던 날, 옥상에서 공을 던져달라는 영서의 외침에 군말 않고 들고 있던 축구공을 뻥 차준 정도. 나중에 그게 주해강인 것을 알고 조금 의외이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난데없이 찾아와서 ‘데이트’를 하자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이란 말인가. 게다가 난 남자라고!! 영서는 자신의 외모에는 항상 별다른 유감을 갖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그러나 사춘기를 겪는 대한건아인 만큼 영서도 자신의 외형이 그다지 남자답거나 위협적인 모습이 못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보통의 신장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딱 대한민국의 평균인 키,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라 몸에 근육이 붙을 새도 없었다. 영서는 정말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반절씩 똑 닮은 얼굴이었다. 문제는 엄마는 그렇다손 쳐도, 영서의 아빠인 권재혁 또한 아주 유순하고 곱상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활달하고 외향적인 엄마와는 아주 반대인 타입이랄까.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면이 있었던 영서의 아빠는, 고모의 손에서 홀로 크면서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한다. 사고 치는 법 없이 순하게 큰 영서의 아빠는 첫사랑인 엄마를 대학에서 만나 5년의 짝사랑 끝에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큰소리 한 번 내는 법 없이 항상 웃으며 엄마와 영서를 대하는 아빠의 모습은, 영서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이기도 했다. 큰 소리 내지 않고, 남들 이목을 끄는 것보단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처리하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기. 그게 바로 영서가 불같은 성격의 엄마와 유순하기 짝이 없는 아빠를 보며 18년 동안 배운 삶의 모토였다.
그런데 해강은 어떤가. 목소리를 크게 하며 떠들거나 하지는 않지만, 해강은 워낙 말이 많고 활발하게 얘기하는 편이었다. 목소리는 딱 듣기 좋은 정도로 낮았지만 그의 말투에는 항상 은은한 웃음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스며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 자체가 밝고 명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또 어떤가. 해강이 특유의 웃음으로 부드럽게 부탁을 건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매몰차게 뿌리치진 못할 것이라고, 영서는 입을 삐죽 내밀고 에이드를 끝까지 빨아 마셨다. 이상하게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다니까, 쟤는. 주해강이란 인간은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나름 영서의 기준으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저런 타입과 가까이 엮여서 좋았던 적이 없을 정도로. 그래서 매사에 인간관계에 있어 선을 세우는 영서였다.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해강은 영서가 그간 봐왔던, 그리고 영서가 ‘생각했던’ 그런 타입과는 볼수록 거리가 멀었다. 얘는 이렇겠구나, 이런 말을 하겠구나, 생각했던 것들도, 모두 해강과 대화를 하게 될수록 전부 해강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영서는 문득 알게 되었다. 선을 긋고 싶어도 어느새 웃는 얼굴로 선 안으로 한 발짝 들어와 있는 녀석. 그러나 영서도, 사실은 그런 해강의 다정함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하, 그래. 영서 네가 괜찮다면 나도 좋아.”
해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카페 로고가 찍힌 티슈를 들어 영서가 쥐고 있는 유리잔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었다. 느낌도 나지 않을 정도로 슬쩍 손가락이 닿았다가 떨어져 나간다. 영서는 왠지 목뒤가 간질거리는 감각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잔을 쥐었던 손을 테이블 밑으로 숨기며 웃었다.
“아하, 하… 그, 그런데 별일이네,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났어?”
“응, 오늘 조퇴를 해서.”
“엑, 조퇴?!”
마시던 에이드를 뿜을 기세로 되물어보는 영서의 반응에, 해강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난 조퇴도 하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어디가 아파서?”
“아파서라기보단 볼 일이 있어서. 물론 선생님한테는 배탈이 났다고 하고 나온 거지만?”
그럼 그렇지. 해강이 조퇴를, 그것도 병결로 조퇴를 한다는 것은 꽤나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뭘 먹고 자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해강은 축구부 활동 중에 무릎인대가 늘어나 전치 2주 판정은 받아도 1주일도 안 돼서 깁스를 풀고 공을 차던 인간이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지각이나 결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감기에 걸려 조퇴 한 번 한 적도 없었다. 같은 반 학생의 반절이 유행성 감기에 걸려 앓아도, 해강만큼은 항상 건강하다 못해 웃는 낯으로 매일매일 학교 정문을 지나곤 했던 것이다. 영서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보통 사람의 회복력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괴물 같은 건강이었다. 물론 이전의 그 사고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나 회복한 영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난번에 얘기해 줬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 왜, 옥상으로 내가 공 차준 날 있잖아. 그때 새총 같은 게 아니라 좀 더 괜찮은 무기가 있었으면 상황이 위험해지기 전에 영서 네가 바로 처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그런가…으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영서 네가 싸우는 대상이 정확히 뭔지 나한테는 보이질 않아서 모르지만… 그래도 새총 장난감 같은 걸로도 그런 위력을 지닌다면, 그보다 더 강한 걸 갖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해서.”
더 강한 것?
영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강이 의자 뒤로 걸쳐놨던 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총이잖아.
영서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자 해강이 당황한 기색으로 영서의 안색을 살폈다.
“여, 영서야, 괜찮아?! 왜 그래?”
“초, 초, 총을… 어, 어디서 난 거야, 이런 건?!”
“어라, 지, 진정해, 영서야.”
누가 볼까 무서워 일단 테이블 위로 자세를 숙인 뒤 매섭게 따져 묻자, 해강의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쭈, 웃어?!
“아니, 애초에 이런 걸 어떻게 네가…!”
“잠깐, 잠깐만, 영서야. 그, 흡, 흠…자, 자세히 봐.”
방금 웃으려고 했겠다, 어?! 해강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ㅡ하지만 더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될 뿐이었다ㅡ총을 들어 영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몸이 절로 굳어졌다. 총의 감촉은 단단하면서도, 그리고… 생각 보다 가벼웠다…?
“…이거…”
“그래, 비비탄 총이야. 장난감.”
…아.
아… 쪽팔려!!!!!!
영서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방금 전 떤 호들갑이 너무나도 창피해 앞에서 웃음을 참는 해강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누가 봐도 진짜 총으로는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장난감 총 특유의 뭉툭한 마감과 떨어지는 완성도에 영서는 더 창피해지고 말았다. 그래, 애초에 한국 고딩이 총은 무슨 총이람.
“아씨… 쪽팔리게… 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난 진짜 총이라고 한 적 없는데…”
“시끄러!”
괜스레 짜증을 부리는 영서를 보며 간신히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아낸 해강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키들키들 웃어버리고 말았다. 영서는 얼굴이 빨개진 채 테이블 위로 총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팔짱을 꼈다.
“그, 그런데 이건 왜?”
“말했잖아. 만약에 영서 너한테 좀 더 강한 무기가 있었다면, 좀 더 네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거, 이래 보여도 꽤 비싸고 정교한 제품이라 진짜 총까진 아니어도 엇비슷하게 효과는 낼 수 있을걸?”
특히 네가 힘을 쓸 수 있는 대상에게 말야. 해강이 에둘러 말하는 것을 단박에 이해한 영서가 말없이 남은 에이드를 빨아 마셨다. 이미 남은 에이드와 얼음이 녹아 음료의 맛은 밍밍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입안이 시원하고 달달한 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비비탄 총이라… 뭐, 새총보단 훨씬 낫네.”
마지못해 대답하며 장난감 총을 만지작거리는 영서를 보며, 해강은 담뿍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주는 호신용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호신용은 무슨. 네가 업어온 그때 그 어마무시하게 이상한 악령들만 아니면 조무래기들은 쨉도 안 된다고. 나보단 네가 더 필요한 거 아냐?”
“어라,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은 무슨…”
“영서야…”
“으, 그런 느끼한 얼굴 좀 하지 말라고 했지!!”
해강에게 말은 그렇게 했을지 몰라도, 영서는 꽤나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걸 안 쓰는 편이 더 좋은 것 아닐까. 만약 이걸 써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땐 더 상황이 귀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해강에게는 고맙지만 일단 총은 서랍에나 넣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영서는 남은 얼음을 입안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영서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그 총을 써야 할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