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야 권영서~ 나 저거 과일 줘~”
-하여튼 말이야, 요즘 세상이 어느 땐데 그렇게 남의 말을 덥석덥석 믿고 나오란다고 따라오고, 엉? 아직 네가 세상의 쓴맛을 덜 봐서 그런가 본데…
“와, 이거 뭐야? 애플망고? 이거, 나 깎아 줘! 먹어볼래!”
-그 자식 이름이 뭐였냐, 그, 주해강인가 뭔가, 아무튼 내가 촉이 좋은데 말이지, 그놈 그거 수상해. 엉? 야, 꼬맹이, 듣고 있냐?
…시끄러워.
영서는 지금, 1시간째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자는 척이라기보다 주변의 시끄러운 잡소리들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하여튼 저 인간들은ㅡ참, 인간은 아니지만ㅡ내가 찾을 땐 없더니 자기들 맘대로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만 잘하고…!
-유혜리, 그거 먹지 마. 지지다 지지!
“아, 왜요~! 차사님은 어차피 공물 같은 거 바쳐도 못 먹으면서, 지금 뺏어 드시려고 그러는 거죠!”
-뺏긴 누가 뺏어 그딴 걸! 손대지 마! 무슨 부정이 탔을 줄 알고.
“으아아악!!! 저승차사가 내 과일 뺏어간다!!! 야, 권영서! 얼른 좀 도와줘!”
그러니까…
시끄럽다고!!!!
“시끄러워요 둘 다!!!!”
“영서 학생!! 병원 내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했죠!!”
“…죄송합니다…”
하여튼 저 귀신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지난밤, 병실 바닥에 남은 의문의 발자국 때문에 수간호사에게는 완전히 찍혀버린 영서였다. 또 지겨운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 난 뒤 간신히 자신의 병실로 돌아오게 된 영서는 잔뜩 기운 빠진 한숨을 쉬었다. 일찍 자려다가 웬 봉변이람.
“야~ 권영서~ 혼났냐?”
“…병실에선 조용히 좀 해라, 유혜리.”
눈치를 보며 곰실곰실 영서의 옆으로 다가온 혜리가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영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아챈 건지 아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던 과일 타령은 그만 둘 모양이었다.
“아, 미안하다니까~ 삐졌어? 미안해~”
“안 삐졌어. 괜찮으니까 이제 조용히 좀 해 줘.”
“안 삐졌으면 나 과일 깎아 줘.”
순간, 영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가!!!!”
“영서 학생!!!”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
왜 소리를 지르냐며 잔뜩 토라진 혜리가 벽을 통과해 사라지자마자, 영서는 한숨을 내쉬며 병실의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 밤 내가 과연 잠들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시 그 꿈을 꿔야 할 텐데. 대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영서는 아무튼 자신이 퇴원하기 전에는 모쪼록 아무런 사건도 터지지 않기를 비는 중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도중에, 갑자기 이마가 서늘한 기운으로 시원하게 식혀지는 감각에 영서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유혜리는 갔군.
아…깜짝이야. 이 동네 귀신들은 왜 자꾸 사람을 못 놀라게 해서 안달인지. 투덜거리는 속과는 달리, 마치 무더운 여름밤에 때맞춰 부는 밤바람같이 서늘하면서도 편안해지는 감각에 영서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점점 스며드는 잠 기운에 영서는 눈을 감은 채 입만 달싹여 대답했다.
“…혜리는 아까 갔어요. 그나저나… 아저씨는 어디 있다가 다시 나타난 거예요?”
남자의 기척이라면 영서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혜리의 기운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병원 건물 아래쪽을 맴돌고 있었다. 아마 1층 로비에서 티비를 보러 나와 앉아있는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혜리의 기운의 보통의 귀신들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잡귀나 기타 것들이 득실거리는 병원에서도 혜리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ㅡ물론 너무 멀어지면 희미해서 잡아내기 어렵지만ㅡ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기운은… 영서조차도 분명히 잡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보통 귀신은 아니라 이건가. 이래 보여도 저승차사 씩이나 되는 남자니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는 걸지도. 영서가 망연한 상상을 하는 동안 이마 위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가볍게 흘러나왔다.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건 잘 알겠다. 나야 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존재 아니겠냐.
“웃기 시네… 뭐 신도 아니고…”
-뭐, 내가 만물을 창조할 만한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신을 찾게 될 상황이 오면 내 생각이 나긴 하겠지.
“또 이상한 얘기만 하네. 저 이제 진짜 잘 거니까 다시 가세요… 흐아암.”
이마를 사락사락 쓸어주는 손길이 꽤 시원하고 편안했다. 눈에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워 뜨고 싶어도 뜰 수가 없었다. 너무…졸리네. 오늘 별거 안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이봐, 꼬맹이. 내가 아까 말한 거. 그냥 흘려듣지 말고 조심해. 그놈, 진짜로 수상하니까.
“…누구…요?”
-왜 그, 맨날 히쭉하니 쳐웃고 다니는 놈.
주해강 말이군…
“걔가 뭐 어쨌다고 그러세요… 걔는 귀신도 못 보고…하아암… 아무튼 나쁜 애는 아닌데.”
-나쁘다는 아니라, 수상하다고. 분명 뭔가를 숨기는 놈의 얼굴이야. 내가 이 일하면서 얼마나 그런 놈을 많이 봤는데. 500년 경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와, 진짜 할아버지다.”
-이 자식이 근데.
“아무튼 저 진짜 잘 거예요. 나중에 얘기해요…”
이제는 정말 못 버티겠다. 스스로 뭐라고 웅얼대는지도 모른 채, 영서는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분 가지 않는 정신으로 고개를 돌려 누웠다. 몽롱한 의식 너머로, 남자가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감은 눈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벌써 아침인가? 그렇지만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에 들었더니, 그만큼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든 모양이었다. 영서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상하게 몸이, 날 듯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와, 진짜 푹 잤나 봐.”
고개를 돌려 침대 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도 안 깨운 건가. 아침 안 먹으면 그 무서운 수간호사 쌤이 잔소리를 하면서 이불을 걷어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영서는 눈을 비비며 슬리퍼에 양 발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상하다…”
병실 문을 열자, 복도는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항상 복도를 조금씩 걸어 다니면서 운동을 하시는 옆 호실 할아버지도,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일정 시간마다 차트를 확인하며 회진을 도는 의사 무리도,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기계음도, 분주한 걸음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간호사들도. 모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서가 문을 열고 나온 병실 바깥의 모습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한 병원의 모습이라니. 낯설다 못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영서의 마른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텅 빈 병원 로비에는 영서의 외침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에서 깬 후부터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영서는 일단 계단을 타고 이층 저층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엘리베이터의 버튼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전은 아닐 텐데. 마지못해 어두컴컴한 비상구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병원의 1층 로비는 항상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1층 정도 되면 누군가 있지 않을까? 영서는 맨발로 슬리퍼를 끌며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내려가 보았으나, 위층과 똑같이 1층 로비에서도 아무런 인기척조차 나질 않았다. 바쁘지만 차분한 태도로 보호자와 환자를 대하던 원무과와 안내 데스크에도,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경비 아저씨가 터줏대감마냥 앉아있던 경비실도,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대체…”
영서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도, 기묘하리만큼 아무런 인기척이나 소음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영서가 스스로 내는 숨소리나 옷깃이 스치는 소리,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크게 외쳐본들 무언가가 달라지진 않았다. 영서가 더욱 기묘함을 느낀 것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깨달은 한 가지 사실에 영서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많던 귀신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이 병원에는 사람의 수보다 귀신의 수가 더 많다고 느꼈을 정도로, 영서는 항상 사람들이 내는 소음뿐 아니라 귀신들의 속살거림, 중얼거림, 우는소리를 들어왔다. 소리를 내지 않고 멍하니 있는 귀신들도 많았다. 병원의 특성상 없을 리가 없지 싶으면서도, 이 많은 영혼들이 결국 병원에서 사망하고, 이 건물에 발이 묶였을 것이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더 입맛이 썼다. 그냥 길거리에 널린 이유 모를 지박령들이나, 사고사 피해자들을 보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이곳의 영혼들은, 대부분 큰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와 결국 사망했거나, 아니면 오래 병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이라는 곳은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공간이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은 그들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깨끗하게 나아서 이 병원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과연 이 병원을 거쳐 간 그런 환자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그리고 결국 낫지 못한 채 목숨을 다한 환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왠지 영서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몇 달 전만 해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었을 텐데.
단순히 내가 운이 좋아서였던 걸까.
아니면 그 무당의 말대로 내 팔자가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영서는 지금의 권영서와 사고 전의 권영서는 완전히 달라진 인간임을 뼈저리게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서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현실이 아니구나.
이번에는, 정말로 이상한 꿈속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