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혜리야! 해강아! 아저씨!”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영서는 병원을 탐색하며 아는 이름을 반복해 불러보고 있었다. 만약 이게 내가 스스로 꾸는 꿈이 아니라 또 어느 놈의 농간에 빠져버린 거라면, 해강이면 몰라도 혜리나 아저씨는 내 꿈에서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특히나 영서는 일직차사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지난번 꿈에서도 날 찾아왔었지. 보통 귀신은 못해도 차사 정도면 인간의 꿈 정도는 맘대로 들락날락하는 것 같은데. 하긴 여기서 부른다고 해도 밖에 사정은 어떨지 모르니, 남자가 과연 부른다고 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 여기는…?”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돌아다녔을 뿐인데, 마침 영서의 발이 멈춘 곳은 5층의 한 병실 앞이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일반 입원실인데 반해, 병원의 5층은 중환자실만 있는 층이었다. 보통은 2인실이나 1인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호자나 그에 준하는 측근이 아닌 이상 의료진 외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도 없는 층이었다. 평소에는 5층 복도 입구에 잠금이 걸려있었을 텐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려 보니 복도의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그리고 복도의 가장 가까이 위치한 한 병실.
-501-
501호였다.
501호… 기억에 남는 호실이었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여길?
‘501호 환자 말이에요…’
‘거기 보호자분들이…’
문득 머릿속으로, 조심스러운 간호사들의 목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렇지.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501호… 대체 이 호실에 입원해있는 환자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왜 그녀들은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501호에 대해 함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걸까. 단순한 환자일 뿐인데. 아니면…
이 병실 너머에, 501호 환자가 있겠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자각몽이다. 어느 놈이 장난을 치건 아니건, 어쨌든 내가 의식을 갖고 있는 한 적어도 내가 맘대로 컨트롤할 수는 있겠지. 스멀스멀 파고드는 불안감에 영서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게 501호의 환자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언가 인지.
일단 확인해 봐야 알겠지.
영서는 괜히 목을 가다듬은 뒤, 병실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노크했다.
똑 똑-
….
뭐지…? 아무도 없나?
“시, 실례합니다~”
노크에 대한 답이 없자, 영서는 잠시 기다린 후 부러 크게 목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제발 아무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영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감 상 1시간 정도는 혼자 건물 전체를 돌아다닌 지라, 이제 제발 자신 말고 아무나라도 나타나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창문 너머에서 살랑살랑 넘어 들어오는 바람이 영서의 이마를 간질였다. 창문이 열려있나…? 꿈 속인 것도 순간 잊은 채, 영서는 이곳도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갔나, 하고 생각했다.
영서가 들어선 병실에는, 창가 쪽에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너는…”
영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커지며,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너는…”
말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앉아 영서를 마주한 사람은, 바로 그 애였다.
“…영서?”
“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야말로 여긴 어떻게…”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이유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흰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사람은 뭔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영서를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문가로 다가왔다.
“너,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오는 길에 뭔가 만났다거나, 본 적 있어?”
“어? 아, 아니… 아무도 없던데. 그리고 어쩌다, 라니, 난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누가 있는지 찾으려다가…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 왜 있었어?”
영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501호의 환자가 이 애였던가. 게다가 꿈속에서ㅡ분명 꿈이 맞았을 것이다ㅡ몇 번 본 바로는, 이 애는 항상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고 차분한 말투로 대화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꿈들에서와 달리, 지금 눈앞에서 눈썹을 찌푸린 채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이 애도 나를 알고 있다. 나 또한, 서로 무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바로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 애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걸까. 나는 왜 이 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오늘 길에 아무하고도 안 마주친 거, 확실하지?”
“응… 심지어 소리 내서 부르기도 했는데, 정말 아무도 없나 봐. 너랑 나… 둘뿐인가?”
“…일단은 그런 것 같아.”
사뭇 신경질적이어 보이던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지더니, 팔짱을 풀고는 다시 침대로 가 걸터앉는다. 영서는 어리둥절한 기분에 주춤주춤 그 애의 곁에 다가가 섰다.
“그런데 있지…너는…그… 맞지?”
“뭐가?”
“뭐가라니. 넌 나를 알고 있잖아. 그리고 나도… 그런데 네 이름을 모르겠어.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
“…글쎄.”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거짓말하면 표정관리는 못하는 타입이구나, 싶어 영서는 왠지 우스워졌다.
“다른 꿈에서 몇 번 만났었잖아. 그것도 최근에. 너, 귀신이야? 내 꿈에 자꾸 나오고?”
“꿈이라고?”
되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경계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영서는 조금 기가 눌리고 말았다. 내, 내 쪽에서 기가 눌리다니. 그것도 나보다 작은 애한테. 영서는 왠지 속으로 자존심이 상했으나, 하긴 멀쩡한 사람이라면 꽤 기분이 나쁠 법도 하겠다 싶어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냥 어디서 자주 봤던 것 같아서… 왠지 익숙하다, 싶어서. 하지만 귀신같은 거면 오히려 나한테 접근할 생각도 못 하겠지.”
“대체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네 이름은… 글쎄, 나도 모르겠어. 눈을 떠보니 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아무도 없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누군가가 꼭 내 머릿속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머릿속,…이라고?”
“그래. 너를 보는 순간 누가 영서야! 하고 부르는 걸 들었어. 그래서 그냥… 네가 영서구나, 싶었지. 내 또래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랬구나… 그렇지만 난 고등학생인데. 너 중학생 아냐?”
“뭐? 나 열여덟 살이거든?!!”
“엥, 진짜?! …그런데…”
왜 이렇게 키가 작아,라고 물어보려던 영서는 헙 하고 입을 닫았다. 눈앞의 아이는 키는 물론이고, 손도 체구도 영서보다 더 작아 보였다. 신경질적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말투 때문인지 처음에는 좀 기가 죽었으나, 찬찬히 보니 순한 눈매를 가진 큰 눈에 동그스름한 코끝, 작은 입과 턱, 피부마저 햇볕을 많이 받지 않았는지 인형같이 흰 얼굴이었다. 꽤 귀엽게 생긴 상에 짧게 다듬어진 검은 머리는 영서보다도 짧았지만, 살짝 튀어나온 둥근 이마가 훤히 드러나 한층 더 어려 보이게 해주는 인상이었다. 영락없이 중학생 정도인 줄 알았는데. 나랑 동갑이라니. 영서는 어려 보이다 못해 중성적으로까지 보이는 눈앞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중학생이라니, 이미 졸업한 지 오래라고.”
“맞아, 그리고 고등학교는 중퇴했고. 맞지?”
“그렇지, 고등학교는 중퇴… 어, 어엉?”
“왜?”
“…용케 그걸 기억하고 있네.”
영서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으며 애써 어리둥절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너, 나 기억 안 난다며? 그런데 네가 나한테 너 학교 안 다니는 거 말해줬다는 걸 어떻게 또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게… 어, 그러니까…”
“…풉…푸흡…큭…”
“우, 웃어?!”
“아하하! 너, 거짓말 진~짜 못한다!!”
영서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에, 상황도 잊고 그만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정말 이상하지. 눈을 떠보니 병원은 텅 비어있고, 사람이나 귀신이라곤 털끝도 안 보이고, 있는 거라곤 이 언제 만났는지도 잘 모를 애 한 명뿐인데. 이렇게 대책 없이 마음이 편하고 스스럼없어도 되는 건지. 영서는 문득, 정말로 이 애가 꿈속에서 봐왔던 그 애가 맞겠구나, 하는 확신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얘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기분이야.
“그건 그렇고, 우리 구면이면 통성명이나 하자. 너만 내 이름을 아는 건 불공평하다고.”
“이름…?”
“그래, 이름. 뭐라고 부르기도 애매하잖아, 야 야 거리기도 그렇고.”
“…내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