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영서야, 영서야! 눈 좀 떠 봐!”
“어머님, 저리 비키세요! 환자를 그렇게 흔드시면 안 돼요!”
“선생님, 우리, 우리 영서, 우리 영서가…!!!”
“보호자분들 어서 나오세요! 여기 CPR 준비해! 얼른!!”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간호사와 의사들, 그리고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영서의 부모를 보며 일직차사는 벽 한 켠에 기대어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밤사이에 환자 상태를 체크하러 들른 한 간호사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영서의 상태를 확인해 보니 온몸이 얼음장같이 차고, 혈압의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음을 알고 긴급 호출을 한 것이다. 숙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던 영서의 주치의가 긴급 호출에 뛰쳐나와 가운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CPR 준비를 했을 때에는, 이미 영서의 호흡은 거의 멎어 있었다. 영서의 병원 복을 뜯어내듯 벗긴 뒤 온갖 기계의 패치를 붙이며 심폐소생술을 지시하던 주치의와 간호사들 뒤에서는, 연락을 달려온 영서의 부모와 해강이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날 해강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눈이 새벽부터 떠지는 바람에 모처럼 일찍부터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어차피 시간도 남겠다, 학교 가기 전에 영서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자 교복을 입은 채로 병원에 들른 찰나였다. 아직 새벽 기운이 남은 아침이라 조용하리라 생각했던 병실 앞 복도는 난장판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급하게 뭔가를 지시하는 의사, 급하게 뛰어다니는 간호사들,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다른 환자들, 그리고 울면서 영서의 병실에서 밀려나듯 나오는 영서의 부모를 봤을 때, 해강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해강의 손에 들려있던 비닐봉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빛깔 좋은 복숭아 한 알이, 봉투에서 또르르 굴러 나왔다.
***
어둠 속에서 구둣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발의 주인은 자신의 등장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무성의한 태도로 복도의 고요함을 깨며 한 문 앞에 다다랐다. 대충 갈겨쓴 것 같이 생긴, 누런 종이 위에 새겨진 글씨체가 퍽 익숙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관계자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과연 관계자에 해당되는 건지. 그림자는 마치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3분 늦었네.
-3분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맙시다, 좀. 예?
-네가 언제 제시간에 맞춰 오는 꼴을 봤어야 말이지.
문 너머는 대여섯 평이나 될까, 싶은 작은방이었다. 방 또한 어두침침했으나,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낡은 전등이 까딱까딱 흔들리며 힘겹게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전등 밑에는 작은 나무 책걸상이 놓여 있었다. 무슨 옛날 소학교 같은 곳에서나 썼을 법하게 낡고 작은, 어딘가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풍기는 책상과 의자라고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취향 한 번 진짜 또라이 같다니까.
-그래서, 소집일도 아닌데 따로 부른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에 대해 말해줄 시간을 지금 네가 3분이나 늦어서 다 까먹었군. 이제 2분 남았네.
낡은 책상을 두고 마주 보는 형태로 놓인 의자 중 한쪽에는, 남자와 똑같은 민 무늬의 올 블랙 정장을 입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자로 잰 듯한 태도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그 태도에서 미묘한 짜증이 느껴지는 것을 남자는 눈치챌 수 있었다.
-내 계획대로라면 너에게 할애할 시간은 딱 4분 30초, 넉넉잡아 5분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난 그 5분 후에 바로 업무에 복귀해 이 근방 대교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현장에 가 있어야 했지.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그렇지, 우리 선배가 워낙 바쁜 분이셔서. 내가 그걸 깜빡했네.
-이러한 이유로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지금 네가 숨겨주는 인간들, 일주일 안에 모두 원상태로 돌려놔. 그럼 내 선에서 눈감아주고 강림 도령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까.
여자는 팔짱을 끼며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어른이 앉기에는 작은 의자와 책상인지라, 대강 다리를 꼬고 의자에 몸을 기댄 그녀의 모습은 무심한 말투와는 반대로 오히려 조금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단 한 번도 어설퍼 보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거절에 대한 관용은?
-없지.
-그렇겠죠.
남자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별다른 언질이 없다 했더니, 역시 다 알고 있었구만.
-이보쇼, 월직차사. 내가 당신보다 오백 년은 어린 것도 맞고, 차사가 되기 전부터 저 거둬서 가르치고 한 거 내 다 기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배였다지만 지금은 나도 일직의 이름을 받지 않았나. 자꾸 그런 태도로 나오면 나도 마냥 기분 좋게 들을 수만은 없는데 말이지.
-뭔가 착각하나 본데, 이건 권유가 아니다.
-그… 참… 거, 도령님한테는 내가 직접 말하게 해주쇼.
-못 본 사이에 건방이 염라대왕님 발바닥까지 찌르는구나. 내가 그걸 그냥 용인할 것 같나? 그리고 도령님도 용인하실 것 같아?
여자의 눈매가 짐짓 사나워졌다. 이번에는 단순한 짜증이 아니었다.
-….도령님도 이 일을 알고 계시다면, 어쩔 거요?
-또 개수작을…
-어허, 차사끼리는 비폭력주의인 거 잊으셨나.
여자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손사래를 치며 한발 물러났다.
-밑에 애들이나 제대로 관리하고 네 맡은 바 일이나 하면 될 일이지, 왜 갑자기 업무 외 일에 매달리는 거지? 일직, 이건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기도 해. 그리고 도령님 일이기도 하고.
-알죠, 알죠. 내가 우리 팀에 민폐 끼친 적이 언제 있었나?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만 해. 잘 알지 않나, 너도.
-그렇지.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 참나, 아니 선배, 내 나이가 몇이고 경력이 몇인데 그런…
-시간이 다 되었네. 벌써 1분을 초과했어. 난 이만 가보겠네.
-…네, 들어가십쇼.
-…모쪼록 똑바로 행동해라. 이도.
여자는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정장을 탁탁 털며 먼지를 털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꽤나 단정하고 호감 형이었지만, 항상 그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나 감정이 깃든 적이 없다는 것을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얼굴을 흘깃 건너다 본 여자는, 더욱 딱딱해진 얼굴로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을 끝으로, 다 태워진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여자의 몸이 사라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여자가 사라지고,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와 낡은 책상을 노려보던 남자는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젠장, 또 어려운 길을 가시는구만.
이도,라고 불린 남자, 아니 일직차사는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그 방을 열고 다시 복도로 나섰다. 몇 분 만에 텅 비워진 방은, 언제 누가 머물렀냐는 듯이 여전히 낡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
“…아저씨, 영서가… 왜 이래요?”
-글쎄다, 나도 모르지.
“….”
혜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영서는 오늘 새벽, 갑작스레 심장 발작을 일으켜 의료진들의 긴급한 치료로 다행히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분주한 의료진들과 소란스러워진 병실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것은 영서의 부모와 해강뿐만이 아니었다. 혜리 또한,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병실의 소리를 듣고 병원 뒷마당을 거닐던 것을 멈추고 병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혜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창백해진 영서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여러 종류의 호스와 산소마스크, 이상한 기계와 땀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주치의의 모습이었다. 영서의 부모는 울다가 실신한 모양이었고,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는 어떤 남자애가 그들을 추스르며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혜리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저기에 누워있는 영서 빼고는.
혼란스러워진 마당에도 혜리는 단박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주변을 돌아보며 어딘가에 있을 일직차사를 찾았다.
남자는 예상대로 병실 벽 구석에 몸을 기대고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혜리가 울먹거리며 그를 부르자,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반응에 혜리는, 그나마 조금의 안도를 느낄 수 있었다.
***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저기…”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아~”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영서는 뻘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아니 내 꿈 속인 건 맞는지, 그리고 이 애의 정체는 무엇인지… 영서는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말을 걸어보려고 해도 뭐가 신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가는 탓에 차마 막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대체 여긴 어디인 건데…!”
병실을 나선 영서의 앞에는, 분명 아까까지 지나온 낯익은 5층의 복도와는 전혀 딴판인 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