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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29화 (29/166)

29화

영서의 호흡과 맥박이 정상수치에 다다른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쓸어 넘긴 주치의는 말했다. 영서가 의식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별일 아니기를 자신도 바라지만, 갑자기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것이니 깨어나고 나서도 다시 종합적으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의사 특유의 아리송하고도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건 그저 그의 직업으로 하여금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만에 하나 경솔한 기대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기에 꾸며내는 차가운 태도일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안도감과 차분해진 목소리는 영서의 부모와 해강을 안심시키기 충분했다. 아니, 해강은 그러지 못했다.

“…영서야…”

한차례 불어닥친 위험 상황을 수습하고 나자 의사와 간호사들은 기계 같은 태도로 전달사항만 알린 뒤 병실을 정리하고 나갔다. 언제 그런 난리 법석이 일어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영서의 모습은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영서의 부모 또한 그런 아들의 곁을 쉬이 떠나고 싶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남아 지켜보겠다며 영서의 부모를 안심시키는 해강의 배려에 그들도 마지못해 의사를 따라 상담을 하러 병실을 나섰다. 해강은 그들을 배웅하고 다시 들어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조용해진 병실 안에는 해강과 영서, 둘뿐이었다.

-….

“….”

사실 둘뿐은 아니었지만.

“아저씨, 쟤는 귀신 못 본대요? 영서 친구라면서요.”

-친구면 다 귀신 보는 애들이냐?

팔짱을 낀 채 어딘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부루퉁해진 얼굴로 남자는 여전히 벽 한구석에 기대어 있었다. 혜리도 왠지 모르게 그런 남자를 따라 벽에 나란히 등을 붙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겠지만, 왠지 사람들이 한가득 있으면,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혜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해강을 건너다보는 눈빛이 꽤 탐탁잖아 보였다.

“주해강이라고 했지. 나 쟤 알아요. 우리 학교가 남고로 바뀐 이래로, 쟤 이름을 제일 많이 들어본 것 같아.”

-그래 봤자 바뀐 지 3년 밖에 안 됐는데, 뭘.

“그래도 뭐~ 다들 인정할 만큼 얼굴 하나는 괜찮네요. 나는 저런 타입 별로지만.”

-어허, 아무도 네 취향 안 물어봤다, 임마.

“원래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 한다고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우리 아빠도 되게 잘생겼었는데, 그 얼굴 하나 보고 결혼했다가 지금 이 모양 이 꼴 아니냐고 그랬거든요.”

참으로 가벼운 말투에 묵직한 가정사로다. 남자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유꼬맹이, 그, 뭐냐,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저놈이 저거, 잘생긴 편이냐?

“제 타입은 아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니까요. 옆에 여고 애들은 우스갯소리로 뭐라는지 알아요? 데뷔하면 차은우, 데뷔 안 하면 주해강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데. 차은우는 또 누구야.

“연예인이요. 지금 데뷔하면 차은우 보는 거고, 데뷔 안 하면 주해강 보고 사는 거라고.”

-어느 쪽이 좋은 건데?

“아잇 진짜! 어느 쪽이든 둘 다 대박이라는 뜻이지 뭐예요?”

혜리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 눈을 흘기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혜리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놨다.

-자식이 이거, 시키는 일은 안 하고 그런 헛소리들만 주워듣고 다녀? 너 꽁으로 데려온 줄 알아 내가?

“아, 아프잖아요! 애초에 아저씨가 시킨 건 정보 수집이면서. 이런 것도 다~ 나중에 도움이 된다고요. 그리고 주해강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오라고 한 건 아저씨잖아요!”

-그런 개똥에도 못 쓰는 것들 말고. 좀 제대로 된 거 말이야, 엉? 이놈이 이거, 인간일 적에는 똘똘해서 일 좀 시키려고 데려왔더니? 안 되겠어, 어?

또 꿀밤을 놓으려는 시늉을 하며 손을 흔들자, 혜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후다닥 몸을 피해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괜히 화풀이 같은데 말이지. 대체 뭐에 쓰는 화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혜리는 혹이 날 리가 없는 제 이마를 괜히 한 번 쓰다듬으며 퉁퉁거렸다.

“그리고 쟤, 중학교는 다른 데에서 다녔나 봐요. 고등학교부터 입학한 건 맞는데, 보통 이 근처 중학생들이 남중고로 많이 올라오잖아요? 근데 쟤랑은 아무도 동창이었다는 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봤더니, 중학교까지는 외국에서 다니다 온 모양이더라고요.”

외국?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해봐.

“그러니까 중학교를 영국에서…”

“미안해.”

!!!!!!!

혜리는 자신의 입을 합 막고 눈을 크게 떴다. 드, 들렸나?! 아니, 아니 들릴 리가 없잖아! 혜리가 눈을 끔벅거리며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도 순간 놀란 건지 움찔, 하며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도, 괜히 나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걸까…”

해강이 영서의 침대 발치에 살짝 걸터앉아,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영서에게 말을 거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 병실 안에는 그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아직… 얘기도 많이 못 해봤는데…”

해강의 표정은 괴로움을 꾹 눌러 참는 듯해 보였다. 수심이 어린 눈가가 영서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조금 전의 소동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 영서의 모습을 보고 잠에 깊게 들었을 것이라 짐작할 정도로, 영서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아까까지의 희게 질린 얼굴과 찬 몸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음에도, 해강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이제야 만났는데… 난… 나는…”

혜리는 눈을 굴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눈짓이 의미하는 바를 남자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대로 좀 더 기다려보면 의외로 자기 입으로 정보를 술술 흘릴지도… 그런데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란 말이지, 저 녀석. 남자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해강을 노려보는 동안, 혜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해강과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주해강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더니…

혹시…

주해강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래서 자꾸 쟤에 대해서 정보를 캐오라고 하는 걸지도 몰라…!

혜리가 헛다리를 짚어도 제대로 짚는 동안, 남자는 턱을 슬슬 쓸면서 잠든 영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리 봐도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게, 여타 보통의 귀신들이 장난질을 치는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게다가 내가 모르는 범위 내에서 영서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영서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 보았지만, 그 몇 개의 가설도 곧바로 논리적 결함으로 인해 반려되고 말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영서가 지금 꿈에 사로잡혀 있다는 건데…

-유혜리, 권영서가 보통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아나?

“글쎄요, 요즘은 오전 9시면 일어나던데. 아무리 늦어도 10시 전에는 일어나 있더라고요.”

-잠드는 건?

“입원하기 전에 집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여기 다시 입원하고 나서부터는 새벽에 잠이 드는 것 같더라고요. 첫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 며칠 점점… 밤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어제도 아마 3시쯤 잠들었을 텐데.”

-그렇군…

남자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대강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가설 중에서 전부를 제치고 남은 단 하나의 가설. 남자는 혹시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이 아는 한 그런 기운은 느끼지 못했으므로, 이내 고개를 털어버리고 만다.

***

“있잖아, 어디까지 걷는 거야, 우리?”

“조금만 더 가면 돼. 아직은 괜찮거든.”

“아까부터 조금이라고 했으면서…”

영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영서를 전혀 신경도 안 쓰는 듯, 신난 뒤통수를 보니 영서는 다시금 주변을 살살 둘러보았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일단 꿈속은 맞는 것 같은데. 꿈이 아니더라도, 일단 현실일 리가 없었다.

영서가 병실을 나서고 마주한 광경은, 마치 어렸을 적 읽어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동화 페이지마다 부드러운 그림체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지. 그 삽화만큼 부드러운 느낌은 아니지만ㅡ아니, 오히려 더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ㅡ묘하게 현실적인 배경에 섞여 녹아든 기괴한 모습들이 한층 더 이곳이 꿈속의 공간인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분명 영서가 다니던 병실은 맞았지만, 제일 이상한 점은, 층수가 뒤죽박죽이었다. 영서는 분명 5층에 있었는데,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는 전혀 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벽이나 호실을 지나칠 때면, 5가 아닌 4층이라고 쓰여 있거나, 605호실이라든가, 2F라고 쓰여 있다거나 하는 것이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애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왜 층수가 계속 바뀔까? 이상한 것은 층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영서가 혼자 병원을 돌아다닐 때는 아무것도, 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정신을 차려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자 같은 것들이 사람의 형상을 띤 채 스물스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귀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서는, 아무런 기운이나 에너지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서 영서도 나중에서야 조금씩 눈치채게 된 것이다. 육안으로 보이는, 그러나 전혀 공격적이거나 위험하진 않은 이상한 그림자들. 그건 간호사의 모습을 할 때도 있었고, 병원 복을 입은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예쁘게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묶은 꼬마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도 불현듯 스쳐 지나갈 뿐. 영서가 그림자들에게 시선을 집중하면 이내 벽 속으로 숨어버렸다. 하는 짓은 꼭 귀신같은데 말이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꼭 지구에서 동떨어진 외로운… 뭐였더라, 동화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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