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주민아,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지. 너 나랑 만난 적 없어?”
“글쎄,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나도 눈을 뜨기 전까지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서… 왠지 네가 익숙하긴 하거든, 나도. 아까 네 이름을 안 것도, 원래 아는 사이여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음…그런데 난 친구가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그리고 고등학교는 안 다닌다고 했지? 중학교 동창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유치원일 수도 있고.”
“그런데 자꾸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고집스레 대답하는 주민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들떠 보였다. 그 얼굴에 더 이상 캐묻기도 어색해진 영서는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주민아, 혹시 너도 이 병원에 입원한 적 있어?”
“응, 조금 오래 입원했어.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영서 너는 지금 입원 중이야?”
“나도 별 건 아니고, 그냥 손을 조금 다쳐서. 하하.”
버릇처럼 양손을 쥐었다 편 영서는, 갑작스러운 기시감에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붙어있어야 할 반창고들이, 없었다.
자신의 양 손바닥은 마치 언제 다치기라도 했냐는 듯,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의사 선생님이 조금 흉터는 남을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마치 상처가 안 난 것처럼… 나을 수가 있나?
“뭐해? 멀뚱하게 서서. 얼른 와!”
벌써 저만치 앞서간 주민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도 되는 거야? 아까 나보곤 그렇게 조심하라는 듯이 굴더니… 영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병원 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슬렁슬렁 걸어갔다.
“해강아, 우리 대신 자리 지켜줘서 고맙구나. 학교 지각한 거 아니니? 얼른 가보렴. 아저씨가 태워다 주실 거야.”
“아니에요, 마음만 같아선 저도 결석하고 영서 깨어나는 거 보고 싶은데…”
“그런 소리 마. 그래도 영서한테 이런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야, 아줌마는. 전학 가서 적응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무슨 소리세요, 영서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어머, 그래? 정말 다행이네… 영서 깨어나면 아줌마가 연락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가 봐. 여보, 해강이 좀 태워다 줘요.”
“그래, 해강아. 이만 가자. 아저씨가 학교에는 대신 연락하마. 영서 얘기도 해야 하고.”
해강은 망설이며 영서를 흘긋 건너다보았다. 영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실을 나가면서도, 해강의 눈은 마지막까지 잠든 영서의 눈가에 머물렀다.
“…학교 끝나고… 다시 올게. 조금만 기다려.”
들릴 듯 말 듯 입속으로 중얼거린 해강이, 이번에는 다부진 얼굴로 가방을 둘러메고는 병실을 나섰다. 영서의 엄마가 두 사람을 배웅하러 뒤따라 나가자, 병실 구석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주머니 나가셨네요.”
-배웅 겸 간 거니까 금방 돌아올 거다. 어차피 시간이야 충분히 벌었군.
“으… 그치만 꼭 해야 해요?”
-영서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해야 하는데, 계속 저 주해강인지 뭔지 하는 놈이 붙어 있어서 쳐다만 보고 있었잖아! 아마 부모도 계속 영서가 깨어날 때까지 간병할 모양인데, 언제 자리를 비울지 누가 아냐?
“아저씨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 뭐냐, 뭐시기 저… 힘도 아저씨가 더 낫지 않나? 저승차사니까 아무래도…”
-시끄러 임마! 얼른 안 들어가?
“아, 알겠다고요!”
소심하게 짜증을 낸 혜리가 투덜거리며 영서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들 속도 모르고, 참 태평한 얼굴로 잠들어 있기는. 혜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빨리 눈을 뜨란 말야, 권영서. 너 아니면 나한테 사과 깎아줄 사람도 없고… 혜리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들어 영서의 이마에 내려놓았다. 아무런 무게감조차 없는 흰 손이, 영서의 이마 위로 녹을 듯 합쳐졌다. 혜리는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하긴 할 건데요, 영서나 저나 잘못되면 다 아저씨 탓이에요.”
-아무렴. 내가 너희 잘못되게 하겠냐.
“영서를 못 찾으면 어떻게 해요?”
-찾을 수 있어. 영서는 이 건물 안에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잔말 말고, 어서 다녀와.
권영서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나오는 거 잊지 말고. 남자가 시니컬하게 웃자, 혜리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서서히 정신을 눌러 담았다.
잠시 후, 혜리가 조그마한 빛으로 뭉쳐지더니, 빨려 들어가듯 영서의 몸 안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굳은 얼굴로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나랑 내 동생, 우리 엄마랑 아빠야. 아, 개도 키워!”
“그래? 난 외동인데. 엄마랑 아빠가 결혼하시고 늦게 내가 생긴 거래. 어렸을 때부터 자잘하게 앓고 그랬는데, 맨날 호들갑 떠는 게 귀찮아 죽겠어. 그냥 단순 감기몸살인데.”
“호들갑 떠실 만도 하지. 부모님들은 원래 다들 그러잖아. 자식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만 크면 다행이라고.”
“요즘은 또 안 그래. 중학생 때부터 내가 학원을 몇 개나 다녔는지 아냐? 이제 고2인데, 벌써부터 수험생이라도 된 양 입시 학원 알아보고, 대학교 설명회 다니고, 가끔은 너무하다 싶어.”
“하하, 그런 건 좀 귀찮겠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자주 입원을 하느라 학원은 사실 거의 안 다녔는데.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으니 말다했지 뭐.”
“맞아, 그거 말인데, 그럼 지금은 퇴원한 거야? 고등학교도 중퇴할 정도면… 크게 아팠던 거 아냐?”
“아… 그랬지. 그런데 뭐… 한 1년 지나니까 괜찮더라고.”
주민이 말을 얼버무리자, 영서는 약간 예민한 부분에 대해 물었나 싶어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영서는 가족에 대해서 더 물어보기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동생 있다고 했잖아, 동생은 몇 살이야? 여동생? 아님 남동생?”
“…남동생.”
“나도 가끔 남동생이 있었으면 했는데. 외동은 확실히 외로운 데가 있긴 해. 그래도 친구들 하소연 들어보면 형제 없이 혼자인 게 더 나은가 싶기도 하고…주민이 네 동생은 이름이 뭐야? 동생도 이 근처 학교 다녀?”
“동생이랑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좀… 떨어져 살아서. 요즘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중학생 때까지는 친했어. 내가 아프지 않은 날에는 둘이서만 놀러 다니기도 하고 그랬지.”
그렇구나… 최근에는 동생이랑 사이가 멀어진 걸까. 하지만 영서가 보기에 주민은 딱히 동생과 사이가 나쁠 만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남의 집 사정은 모르는 일이라지만, 자신이 만약 주민과 같은 형이 있었다면 다른 형제들처럼 싸우거나 하지도 않고 잘 지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작고 말랐는데, 어떻게 싸울 마음이 들겠어. 영서는 주민의 뒷모습을 슬쩍 훑어보았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키와 체구, 마른 몸, 자주 아파서 그런지 피부도 창백한 편이었다. 병원 복 아래로 드러난 맨 손목과 발목도, 뼈대부터가 가는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생도 주민이처럼 체구가 작은 편인가. 목도 가늘고… 그 나이 또래쯤 되면 으레 나타나는 수염 자국 같은 것도 없이 깨끗한 피부에, 영서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여기야.”
영서와 함께 주민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여타 병실들과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한 병실 앞이었다. 병실에는 큼직한 숫자로 301호라고 적혀있었다.
“301호… 여기는 왜?”
“보여줄 게 있어. 어서 열어봐.”
“내, 내가?”
“응. 네가 열어야 해.”
웃는 얼굴이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영서는 마지못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고, 주민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주었다.
301호… 301호.
어딘가 익숙한 숫자인데…
끼익-
“……!!”
조심스럽게 문을 연 영서는, 뜻밖의 광경에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버리고 말았다.
“여긴…”
“기억 안 나?”
주민이 생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 안 나, 영서야?”
***
“아~! 권영서, 찾으면 가만 안 둔다, 진짜!”
혜리는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해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고는 로비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 일직차사가 갑자기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며 혜리에게 손짓을 했다.
“뭐, 뭔데요.”
-이건 너 말고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영서를 깨어나게 하고 싶지?
“그렇…죠?”
-필시 이 건물 안에 있는 놈들 중 하나가 벌인 일이야. 정확한 건 더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아마 지박령 중 하나가 며칠에 걸쳐 권영서를 데려가려고 작업을 한 모양인데, 그간 권영서가 이상한 꿈을 꾸고, 잠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더라니… 그게 오늘이었던 것 같군.
“그러면, 이것도 귀신이 한 짓…?”
-그래. 다행히 응급처치로 목숨은 건졌어도,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마…영서는…”
최악의 경우, 영서가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뇌사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심장은 뛰어도, 눈도 뜨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식물인간으로 살다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단박에 숨은 뜻을 이해한 혜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이건 단순한 잠이 아니야. 뭔가가 권영서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거라고. 현실에서의 잡귀나 악령들은 권영서가 알아서 하겠지만, 이번에는 꿈속…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야.
“그럼, 어떡하죠? 누가 영서의 꿈에 들어간 거라면…”
-유혜리,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나?
혜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다가,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