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영서는, 다른 인간들하고 달라. 단순히 영서의 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혜리는 영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까지. 차사의 방해로 완벽히 이름을 수거하는 것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혜리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 된 사건이었다.
혜리는 3년 동안 학교에 갇혀서 멍하니 떠돌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엄마에 대한 것도, 친구들에 대한 것도, 그리고 하다못해 자신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것들을 희미하게 잊어가면서도,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저 밤이고 낮이고 건물 안만 서성거리던 그날들을.
그러다가 영서를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영서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야.
권영서는 나한테… 영서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영서의 꿈에 숨어들어간 귀신이라면,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예…?!"
그렇게 혜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ㅡ물론 영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서긴 했지만ㅡ영서의 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실제로 성공할 지도 의문이었는데, 일직차사가 그래도 꽁으로 차사는 아닌가 보네. 그렇게 잘 알면 자기가 들어오면 될 일이지. 투덜거리는 혜리의 귓가에 일직차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임마, 내가 영서의 꿈에 들어가 버리면 완전히 망자를 데려가는 거랑 뭐가 달라?’
“꿈속이라 그런가, 신기하네. 생각하는 대로 귀에 들리기도 하고.”
‘지금 영서의 혼은 육체하고 반쯤 분리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 상태로 저승차사가 들어가면 자연히 혼은 나를 따라 나와 버리겠지. 그리고 내가 꽁으로 차사는 아니거든?’
“아 깜짝이야!!!!!! 와, 와이씨, 진짜 개 놀랬네!!!”
‘시끄러워. 남의 꿈속에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냐.’
“뭐, 뭐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거, 뭐지? 텔레파시?! 뭐, 그런?”
‘아까부터 꿍얼거리는 거 다 들었거든? 이 쪼그만 게 사람 없다고 뒷담을 해? 그것도 이 일직차사를?’
“아, 치사하게 진짜…! 영서 꿈 안에서 아저씨가 하는 말이 들릴 줄 누가 알았냐고요!”
‘내가 꽁.으.로 차사가 된 건 아니라서 말이야. 아무튼 넌 나오면 보고, 지금 주변에 뭐가 보이지? 어디에서 눈을 떴나?’
“보자… 어… 음… 병원? 이상하다. 여기 꿈 안으로 들어온 거 맞아요? 방금까지 있던 병원인데.”
‘이 병원 안이라… 지박령답게 무대를 준비해도 이런 곳밖에 준비하질 못하는구만.’
“아, 그런데 조금… 다르나? 아무도 없어요. 조명이나 가구… 뭐 구조, 이런 건 다 똑같은 것 같은데… 사람이든 귀신이든, 아무것도 없어요.”
‘영서의 꿈이지만, 막상 그 꿈은 그놈이 멋대로 조작해서 영서에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해. 아마 넌 불청객이니까, 영서의 꿈속이라도 그놈이 알아챘을 확률이 커. 자신 말고 다른 귀신이 영서의 몸에 씐 걸 알면 바로 튀어나올 텐데…’
“에에에엑?!저, 저 그러면, 괘, 괜찮은 거예요? 저기 아저씨, 제가 좀 지능파라서요, 저 싸움 같은 건 못하는데…”
‘멍청아, 꿈 안에서 무슨 싸움 타령이야? 어차피 그 놈도 이렇다 하게 너에게 해코지를 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는…?”
‘…그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영서의 몸을 갖는 게 목적이겠지. 그러면 영서의 혼을 밀어내고 그 놈의 혼이 주인 행세를 할 거다. 같이 몸 안에 들어온 잡귀 따위야, 그놈 알 바는 아니지.’
“잡귀라니… 저 말인가요…”
잡귀라니… 내가…? 서러워…흑흑…. 혜리의 멘탈과 자존심에 금이 가든지 말든지,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최악의 경우에는, 영서는 죽고… 너도 같이 그 안에 갇혀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
“…이게… 뭐야?”
“뭐긴, 너지.”
“…아냐, 이건… 나, 나는…”
영서는 열린 문 너머로 들이치는 광경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영서가 문고리를 잡고 병실의 문을 연 순간, 마치 다른 차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병실 안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영서에게 낯설지 않은 풍경.
‘누가, 누가 구급차 좀!!’
‘꺄아아아악! 저기 학생이!!’
‘119죠! 여기 교통사고가 났는데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이었다. 그래. 그날이었다.
-아가, 조금만 참아.
영서가 한 번 죽었던, 바로 그날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고개 돌리지 마. 똑바로 봐. 영서야.”
“….”
제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밤, 그렇게 차가 많고 사람도 많았던 시내였는데도, 영서는 사고를 당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히려 늦게 끝난 학원에 피곤함을 느끼며 가방을 대출 둘러메고 우산을 쓴 채였다. 분명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본 영서는 발을 옮겼고, 가시거리에서 벗어난 거대한 트럭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뒤의 기억은, 현재의 영서로선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주치의의 말로는 큰 사고를 당하면 뇌가 그 일을 잊기 위해 그 즈음의 기억이 전체적으로 흐려질 것이라 했다. 실제로 영서가 기억해 내기에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으므로, 영서도 굳이 기억을 더듬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마치 영서에게 일어난 일을, 고약한 카메라가 그대로 찍어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생한 장면을 그대로 마주하자니, 영서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게다가 자신이 트럭에 치여 나뒹구는 장면, 그때의 고통, 느린 시야, 시끄러운 목소리들과 목소리가 아닌 것들, 그리고….
그 남자.
그래, 일직차사.
“영서야, 아직도 네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 같아?”
자신의 어깨를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속삭인 말에, 영서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죽은 자신을 보며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뺨을 적신 뜨거운 눈물을 닦을 수도 없이, 영서는 멍하니 자신이 죽는 모습을 또렷하게 지켜보았다.
‘수술 준비해! 거기는 환자 혈압하고 맥박 체크하고!’
‘선생님, 환자 출혈이 심각해서 먼저 수혈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취과에 연락해! 이쪽은 수혈 먼저 준비해 줘!’
‘영서야!!’
‘보호자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영서야, 영서야!!!!’
‘안 돼, 안 돼… 영서야!!!’
“어때?”
“…왜…”
“….”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주민, 이라고 한 아이는 말없이 웃었다. 정말 해맑고 무해한 그 웃음에, 영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사고가 똑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남자를 조심해. 영서야.”
“…그 남자라니…”
“강이도. 그 남자의 이름이야.”
“…”
강이도? 영서는 떨리는 손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열이 나는지 온 얼굴이 뜨거웠다.
“너… 누구야?”
“난 네 친구야, 영서야.”
주민이 기쁜 얼굴로 환히 웃었다.
쿵-
“어,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나는 모르겠는데.’
“그런가… 아무튼 여기 너무 소름 끼쳐요.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냥 조금 을씨년스럽다 정도였는데, 점점 이상한 그림자들도 돌아다니고….”
혜리는 벤치에 다리까지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영서를 찾아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혜리는 다리가 아프다는 감각이 문득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아프다고?
“…아저씨.”
‘또 왜?’
“…아까부터 이상했는데요. 분명 여기… 꿈속이랬죠?”
‘그래, 정확히는 영서의 꿈이 오염된 상태지.’
“…안 보이시겠지만, 지금 제가 의자에 앉아있거든요?”
‘…엉?’
“…그리고 벽이… 만져져요…!”
‘….’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남자가 무척 당황했다는 것을 혜리는 왠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황한 건 제 쪽이거든요…! 혜리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다가갔다. 분명 평소대로면 이렇게… 팔이 통과해서….
….
…….
통과하지 않아….
혜리는 멍한 얼굴로 자기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손이, 벽에 닿는다.
그 말은 즉, 혜리의 상태는 지금, 영혼이 아닌 ‘물리적으로 실체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 공간이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내 몸이 어딘가에 닿아 부딪힌다는 것. 그것도 항상 통과하던 벽들이, 차갑지만 단단하게 손바닥에 닿아오는 느낌.
혜리는 항상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감각이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복잡한 기분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