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손이…”
‘유혜리, 정신 차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해!’
별안간 벼락이라도 치듯 머릿속을 뒤흔드는 불호령에, 혜리의 눈에는 다시 빛이 감돌았다. 이전보다 훨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혜리는 주춤주춤 손을 거두곤 벽에서 물러났다.
“…죄, 죄송해요.”
‘네가 지금 있는 곳은 꿈속이라는 걸 잊지 마. 현실이 아니야.’
…현실이 아니라고…
“알아요.”
‘…영서를 찾아서 그 애를 무사히 깨우는 게 너를 그 안으로 들여보낸 이유야. 명심해라.’
‘안다구요! 참나… 그런데 이렇게 제 몸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 처럼 작동하는데, 그럼 영서를 찾는데 더 불리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혜리가 씁쓸한 얼굴로 되묻자, 머릿속에서 울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벽을 통과할 수도 없고, 원래처럼 날아다니거나 층을 맘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어요. 걷는 속도, 바닥에 닿는 발의 피로감, 몸의 무게감. 전부 다… 느껴지고 있다고요.”
‘…그 감각이, 살아있을 때와 같다고 확신하는 건가?’
“적어도 제 기억대로는요.”
혜리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머리를 두어 번 털어냈다. 분명 꿈을 꾸는 건 영서일 텐데, 자신까지도 이 몽롱한 꿈의 마수에 걸려든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해. 제대로 생각해. 유혜리.
‘…상태가 좋지 않겠군.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돼. 일단 눈에 보이는 게 있나?’
“음… 병원 로비요…?”
‘눈에 띄는 건?’
“….”
혜리는 점점 피로해지는 발을 움직여 복도를 걸어가 보았다. 자신의 체중을 버티는 다리의 감각을 이토록 선연하게 느낀 적이 얼마 만인지. 현실의 나는, 조각 조각난 기억으로 일직차사의 힘에 기생해 간신히 이승에 머무를 뿐인 존재인데. 영서의 꿈속에서는 ‘진짜 나’처럼 움직이고 돌아다닐 수 있다니… 혜리는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진짜 나, 라니…
진짜 나는 대체 뭘까.
죽은 나는 가짜인 건가.
살아 있는 쪽인 지금이 가짜가 아닌가.
점점 무거워지는 몸의 피로감이 정말 지금 느껴지는 사실인지, 아니면 이 세계에서 그렇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것인지, 혜리는 고민하면서 일단 복도를 걸어 로비를 벗어났다.
***
해강은 매우 지루했다.
아니, 지루하기보단 무언가를 기한 없이 기다리느라 속이 타 재가 될 정도였다.
대체 영서가 눈을 뜰 수는 있는지, 그렇다면 그게 언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종례시간이 된 것도 간신히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이만 가보라며 은근한 애도의 눈빛을 보내는 담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뛰듯이 걸어 학교를 빠져나온 것이 약 30분 전이었다.
해강은 그 길로 버스가 아닌ㅡ영서가 입원한 병원은 남중고등학교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ㅡ택시를 잡아 세워 병원에 최대한 빠르게 도착했다. 결과적으로는 그저 5분 10분 정도를 빨리 온 것이지만, 그만한 시간의 낭비도 어떻게든 막고 싶은 것이 해강의 심정이었다. 얼른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싶어. 그 얼굴이 눈을 뜬 것을 보고 싶어.
정확히는, 그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어.
해강은 타는 듯한 갈증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에겐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시간으로 보면 아마 아저씨가 간호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그 말은 즉 영서가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거겠지. 해강은 층의 버튼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두세 번 눌러댔다. 너무 오래 끌지는 않아야 할 텐데. 난 영서에게 아직 할 말이…
“자, 잠시만요!”
닫혀가던 엘리베이터의 문을 응시하던 무미건조한 해강의 눈에, 희고 작은 손이 끼어든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해강은 순간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거두고 열림 버튼을 눌렀다. 금방이라도 문 사이에 끼일 것 같던 손이, 아주 잠깐의 차이로 문이 다시 벌어지면서 다시 드러났다. 손가락, 손등, 손목, 긴 소매의 카디건과, 그리고 얼굴.
“가, 감사합니다.”
어색한 몸짓으로 인사를 건네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소년의 얼굴은, 햇빛을 많이 받지 못했는지, 아니면 체질 탓인지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이었다. 짧게 잘랐다가 기르는 중인지, 잿빛의 머리카락은 아직 이마를 가리지도 못할 정도로 짧은 길이였다. 영서보다도 작아 보이는 키와 체구는 이 병원의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인지, 아니면 환자 본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눈에도 소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체격이었기에, 해강은 단순히 기계적인 미소를 지은 뒤 시선을 거두었다.
“몇 층 가세요?”
“아, 5층이요… 감사합니다.”
입에 사과와 감사를 달고 사는 타입이군. 해강은 숫자 5를 검지로 누른 뒤 닫힘 버튼을 눌렀다. 계기판의 숫자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던 해강은 다시금 영서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애가 말한 꿈이란 게 대체 어떤 꿈이었을까. 또 이상한 것들이 꼬여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닐지, 그게 맞다면 영서가 어떻게 대처해야 것인지 등등 해강은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층이 멈추고, 경쾌한 기계음의 목소리가 5층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영서가 입원한 병실은 6층이었다. 문이 열리자 옆에 서 있던 소년이 발을 내디뎌내딛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해강은 그가 내리는 것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 다시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닫혀가는 문 너머로 동그란 뒤통수가 점점 멀어지다가, 갑자기 몸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어떤 표정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몸을 돌림과 동시에, 복도 앞쪽에 있던 병실 중 하나에서 한 간호사가 튀어나와 그를 부르는 것까지는 들을 수 있었다.
“어머, 주민아! 누나 보러 왔니?”
그러나 문은 닫혀버렸고, 해강은 다시 별생각 없이 영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본다, 얘. 어머님은 오늘 안 오시니?”
“네. 오늘은 저만 왔어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일은… 그냥 요즘 오시는 게 뜸하셔서 그러지. 간병인 분이 찾으시기도 했고. 어머님이 많이 바쁘신가 보더라? 연락이 되질 않네.”
“급하게 세미나가 잡혀서 출국하셨거든요. 그래서 이번 주는 제가 매일 오려구요.”
“너도 항상 수고한다, 정말… 아, 누나 보러 온 거 맞지? 안 그래도 어제 갑자기 산소 포화도가 올라서 새벽에 선생님 호출했었거든.”
“…저, 정말요?!”
“응.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하시긴 했지만, 호흡이며 맥박도 정상이고… 내일쯤 뇌파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다고 하셨어. 이따 시간 날 때 동의서 좀 쓰러 와줄래?”
“네. 금방 갈게요.”
금방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소년을 뒤로하고, 간호사는 살짝 웃어준 뒤 차트를 챙겨 병실을 벗어났다. 주민,이라고 불린 소년은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 조심조심 걸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계가 일정하게 내는 소음과 삑삑대는 소리, 산소호흡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병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반쯤 어둡게 꺼진 조명은 병실 안에 놓인 한 개의 침대를 약하게 밝히고 있었다. 소년은 침대 옆으로 가 익숙하게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있지… 나, 어제 꿈에서 누나가 나왔어.”
살짝 물기가 어린 목소리가 잠잠하게 병실 안을 울렸다. 침대 위에 누운 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얼굴에 씌워진 산소호흡기와, 몸에 부착된 여러 가지 바늘과 호스들이 내는 미약한 소음만이 대답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낮잠이라도 자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잠에서 깨듯, 금방 눈을 뜨고 지금이 몇 시냐며, 왜 안 깨웠냐며 토라진 목소리로 질책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정말 누나가 지금 낮잠이라도 자는 거면 좋겠어. 주민은 떨리는 손을 뻗어 희고 가는 손목을 살짝 건드렸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누나, 너무 오래 자면 안 돼… 알겠지?”
주민은 대리석같이 그대로 놓인 흰 손을 어루만졌다. 작은 손등에는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 두꺼운 바늘과, 수액을 공급하는 호스가 꽂혀 있었다. 조심히 손을 잡은 주민이, 이내 손을 놓아버리곤 고개를 숙이고 만다.
고개를 숙인 주민의 시선 끝에, 침대 가장자리에 달린 이름표와 환자 차트가 보였다.
501호
우 주 희(18, 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