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33화 (33/166)

33화

“…방금 무슨 소리지?”

‘또 뭐가?’

“영서 목소리에요! 근처에 있나 봐요!”

‘잠깐, 영서 목소리라고?’

혜리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하얗게 빛나는 조명과 흰 복도 끝에는, 희미하게 4F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니, 아마 밑에 층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 병원의 층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다면 말이다.

“밑에서 난 것 같아요. 여긴 4층인 것 같은데… 분명 아까는 로비였는데?”

‘계속 복도만 걷고 있지 않았나?’

“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건 없어서 그냥 로비 왼쪽 복도를 쭉 따라 걸었어요. 이상하네… 그런데 밑에 층으로 어떻게 이동하죠?”

평소였으면 그냥 벽으로 쑥- 통과하면 되는데! 혜리가 작게 투덜대자 남자는 다시 뭔가를 생각하는지 조용해졌다. 아까까지는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건물이었는데, 갑자기 영서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단지 우연일까. 혜리는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계속 머릿속에서 남아 생각을 방해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기분 나쁜 곳이야. 이런 공간이 영서의 꿈 속일 리가 없어. 아마 일직차사가 말했던 그 귀신이 맘대로 만들어낸 공간이겠지. 남자가 다시 말을 걸 때까지, 혜리는 골똘한 표정으로 복도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걸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리고…

‘이봐, 유혜리.’

“네?”

‘영서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나?’

“네. 그런데 엄청 희미해요. 또 다른 잡음들이랑 섞여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영서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놈도 지금 영서와 같이 있을 확률이 높아.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던 것이 갑자기 들린다는 건 그놈이 너에게 들리도록 허락했다는 거니까.’

“그놈이라면… 역시 영서를 데려가려고 붙잡고 있는 걸까요?”

‘사실 네가 들어간 후부터, 나도 병원을 다시 조사해 보고 있는데 말이지. 확실히 의심 가는 놈들이 두엇 있기는 하네.’

“네? 그게 누구예요? 그, 그러면 역시 그 병원의 지박령이라는 뜻?”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담담한 눈빛으로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혜리가 영서의 꿈속으로 들어간 직후, 남자는 영서의 병실을 벗어나 의심이 가는 곳부터 다시 뒤져보기로 했다. 병원이니만큼 곳곳에 널린 게 귀신들이긴 해도, 이 정도로 큰일을 벌일 만한 놈이면 분명 그 기운을 내가 병원에 들어설 때부터 알아채고도 남았을 터. 대체 뭐지? 내가 놓친 게 뭘까. 남자는 아예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발밑으로 보이는 병원의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담하게 영서에게 손을 대는 놈이라면 분명 시시한 잡귀 따위는 아닐 테다. 게다가 현실의 영서에게 대적할 수 있는 놈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꿈속으로 영서를 끌고 들어간 것일까. 꽤 머리를 쓰는 놈이 아니라면, 자신의 힘이 닿는 범위가 현실이 아닌 꿈속이라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잡귀가 아니라 단순한 ‘사념’이 이런 상황을 만든 건가? 둘 다일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될까.

남자는 복잡해지는 머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뒷목을 벅벅 긁었다. 아- 정말이지, 이런 머리 쓰는 일은 내 전문이 아닌데. 하지만 영서를 데리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월직차사나 도령님께 협력을 요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영서가 병원에 입원한 뒤부터 꿈속에서 영서를 꼬여낸 놈이라면, 분명 본체는 이 병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멍청한 얼굴로 복도나 돌아다니는 지박령들은 분명 이 정도의 힘이 없다.

대체 누구냐.

누가 이 일직차사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거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남자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끼어든다.

만약, 숨어 있는 놈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이때까지 ‘발견하지’못한 거라면?

남자는 로비에 크게 걸려있던 병원 전체 지도를 떠올렸다. 분명 2층부터 4층까지가 일반 병실, 6층과 7층이 중환자들이 입원한 2인실… 그리고 영서의 병실은 7층이었지.

그리고 5층은?

5층이야말로 명목상 ‘중환자실’이었으나, 5층은 이 병원에서 가장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다. 5층에는 수술실과 처치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담당 주치의들을 위한 숙직실과 샤워실까지 5층 전용으로 만들어져 있었지. 단순한 중환자실을 만든 거라면 그렇게까지 다른 병실들과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6층과 7층에도 이미 중환자들을 입원시키고 있었다. 남자의 기억이 맞다면, 5층에 위치한 병실은 단 4개였다. 그것도 전부 1인실. 단순 중환자들보다도 더 위중한 상태의 환자들을 받는 곳인 걸까? 더 위중한 상태라면, 거의 빈사상태에 가까운 환자들인 걸까?

-…유혜리, 아직 복도에 서 있나? 4층?

‘아, 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으세요?’

-그전까지는 병원의 구조가 뒤죽박죽이었나 보군. 하지만 지금은 괜찮을 거야. 제일 의심 가는 놈을 찾은 것 같아. 일단 이쪽에서 내가 찾아가 봐야겠다. 너는 영서의 목소리를 따라가. 상식적인 구조에 얽매이지 마. 그냥 영서의 목소리만 따라가다 보면 영서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네! 그, 그런데… 의심 가는 놈이라는 건…?’

남자의 가늘어진 눈이 병원의 구조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504호…는 비어있군. 503호…도 비어있고. 502호도…

501호.

찾았다.

남자의 입꼬리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나는 네 친구라고.”

“네 이름, 우주민이라고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 같은 애랑 친구가 된 적 없어.”

영서의 경계 어린 표정에 주민이 슬며시 웃었다.

“아니야, 영서야. 우린 친구야.”

“웃기지 마. 너, 귀신이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왜 모를까.”

주민의 아이같이 높고 명랑하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마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귓가를 울리는 착잡한 목소리에 영서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사방은 온통 암흑이었다.

대체 뭐가 뭔지…! 영서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서있던 주민이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고 애써 모른 척하던, 자신이 죽던 날의 기억과 뜨문뜨문 이어지던 병원과 엄마의 울음소리, 비명소리도 전부 사라졌다. 이번에는 또 뭐야. 대체…

-영서야. 기억해내. 너는 이미 죽었고, 그때 나랑 약속을 했어.

사방이 캄캄한데도, 또렷하고도 담담한 음성만이 머릿속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어도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 이건 마치… 그 남자가 말할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것과 달리, 이 나지막한 음성은 온통 영서의 뇌를 감싸고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멀미가 나는 것만 같았다.

“웃기지 마…내가 무슨, 약속을 했다고…. 윽!”

-약속했잖아. 나랑. 나랑 같이 놀겠다고 했잖아. 나랑 같이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무섭다고 했을 때, 같이 가주겠다며. 너도 나랑 친구가 되어주겠다며.

기억해내.

나와 한 약속을, 기억해내.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영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양손으로 감싸며 낮게 신음했다. 온전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난, 그런 약속, 한 적…”

…….

약속…

-…라고 해.

-그렇구나. 난…

-…되게… 하하, 신기하네. 난…

-…라니까. 그렇게…

문득 눈앞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혼절할 듯한 두통과 정신이 만들어내는 환각이라고 생각했으나, 영서는 순간 분명히 깨달았다. 이건… 정말, 내 기억이야. 환각이 아니라…

-…하하하! 진짜라니까!

-그런데, 난 이 병원에 오래 있었는데, 너는 오늘 처음 봐. 언제부터 입원한 거야?

-나는 어제. 교통사고가 났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그뿐이고… 나도 몰라! 그냥 눈 떠보니까 여기였어.

-그렇구나. 이름이 권영서…라고 했지? 아직 네 이름은 기억하는구나.

-응. 그런데 왜? 보통 그러지 않나?

-음… 가끔가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이름을 기억 못 하더라고. 반가워서 말을 걸어 봐도, 나를 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려.

-우와… 뭐야,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혼자 심심했었다고 했구나?

-응. 그래서 네가 오니까 되게 신기하고 좋다. 맨날 혼자 노래 부르거나 꽃 만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 여긴.

-그럼 나랑 친구하면 되지. 나도 여기가 좋아! 계속 있고 싶은데?

-어? …계속?

-응!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맞다! 우…

“…기억났어.”

영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주민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바로 곁에 있는 걸 영서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이제 기억났어. 너는… 주민이가 아냐.

‘내 이름은 우주희야! 주희라고 불러.’

영서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분명 우주민, 아니… 우주희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이었다.

“…주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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