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눈이 무거워…
이건…
-영서야, 영서야!
이건… 그 애의 목소리….
-영서야, 어디 있어! 영서야!
…이건…혜리…?
아냐… 우주희의 목소리다…
눈을… 떠야 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잠이…
***
“그만 울어, 바보야! 바보같이 자꾸 우니까 애들이 더 놀리잖아!”
“나 바보 아니야아-!! 으아아앙-”
어린 주민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제 막 학원을 마치고 온 건지, 태권도복을 입은 채로 신발 가방을 든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나름 단단하게 도복을 챙겨 입었으면서도,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땀으로 범벅된 채였다. 학원에서부터 내내 울면서 온 것인지, 아니면 더운 날씨 탓인지. 주민은 이미 울다 지쳐 반쯤 진이 빠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울면서 병원에 들러서, 로비를 지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병실까지 용케도 찾아왔겠구나 싶어 주희는 이걸 다그쳐야 할지,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누구야? 유재민? 심영석? 그때 학원에서 본 5학년이야?!”
“으아아앙- 누나아아-”
“으휴, 이 울보가! 울지만 말고 말을 해야 알지!”
주희는 자그마한 주먹으로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주먹 위에 붙은 흰 반창고와, 그 반창고 사이로 이어진 링거의 호스가 그 바람에 살짝 흔들거렸다.
“내가 입원만 안 했어도 그놈들 다 때려주는 건데. 넌 맞고만 있었어?!”
“흑…흐극, 학, 학원에서어… 대련하는데에… 영석이가…”
“심영석 가만 안 둬!!!”
“주희야! 병원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죄, 죄송합니다아…”
금방이라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듯 불같이 화를 내는 주희의 모습과, 또 그런 누나가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주의를 받고 금방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며 주민은 울다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코맹맹이 소리로 딸꾹질까지 하던 주제에, 언제 울었냐는 듯 바보같이 웃는 모습에 주희도 배시시 웃어버렸다.
“누나가 퇴원만 하면 바로 걔네 다 혼내줄게. 알겠지? 그러니까 뚝해, 뚝!”
“우웅…뚝.”
“으, 콧물 봐, 더럽게 진짜! 이리 와 봐. 흥해, 흥!”
“흥…”
땀으로 젖은 주민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얼마 전에 난생처음으로 밀어버린 주희의 머리칼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주희의 머리는 어깨 정도로 길어 아침마다 엄마가 차분히 빗어 예쁜 머리끈으로 묶어주곤 했었다. 그러나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주희는 타고난 성질머리로 예쁜 머리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항상 시비를 거는 남자아이들과 머리채까지 잡으며 쌈박질을 하곤 했다. 자신보다 한 뼘이나 더 작은 쌍둥이 남동생을 항상 뒤에 숨기며,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아이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싸움까지 번지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남매의 엄마는 건강해도 너무 건강한 주희와, 그런 누나와는 얼굴 외에는 한구석도 닮지 않은 유약한 주민을 언제나 걱정했다. 그러나 걱정은 잠시, 누구보다도 남매를 사랑했던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했으므로.
엄마였던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쌍둥이 중 한 명을 데려가겠다는 조항에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네 미래를 생각하라는 친정 엄마의 만류에도 그녀는 쌍둥이 중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후회로 얼룩진다 해도… 이 두 아이만큼은 떨어지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쌍둥이는 여덟 살에 엄마와 셋이서 다시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느라 바빠진 그녀는 어느샌가 다가온 불행의 씨앗을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주희는 언제나 건강하고 당당했으며, 어른스럽고 동생을 챙길 줄 아는 딸이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어른에게도 입바른 소리를 하며 항상 엄마인 자신의 고단함을 이해해 주는 아이였다. 오히려 그녀는 주희보다는 유약하고 심성이 여린 주민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주희가 있으니 괜찮겠지, 어린 남매를 두고 잦은 야근과 세미나로 집을 비우면서도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처음은 코피였다.
아침에 남매를 등교시키며 주희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빗어 묶어주던 순간이었다. 흰 주희의 티셔츠에는 어느새 손쓸 수 없이 빠르게 핏방울이 물들어갔다. 아무리 지혈을 해도 멈추지 않았다. 주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날, 의사는 말했다.
주희는 앞으로 5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그날은, 주희와 주민의 10번째 생일날이었다.
***
“누나, 그런데 오늘 엄마는 안 와?”
“그렇대. 내일까지 바빠서 모레쯤 온다나 봐. 집에 가면 할머니 계실 거야. 자꾸 병원 오는 거 할머니한테 들키면 너 혼날걸?”
“치이… 그치만 할머니는 밤에 책도 안 읽어주고… 자꾸 시금치랑 피망 남기면 잔소리한단 말이야…그리고 티비도 오래 못 보게 하고… 놀아주지도 않아. 심심해.”
“그래도 병원 와봤자 할 것도 없잖아. 난 병원 밖으로 나가면 혼나. 복도만 걸어 다녀도 간호사 언니들이 엄청 감시한다구.”
“그래도 누나가 있잖아, 여기는…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할머니도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친구들하고 놀면 되잖아. 난 예림이랑 지원이랑 못 만난 지 한 달은 되는 것 같은데. 심심한 쪽은 오히려 나거든?”
주희는 소꿉친구들의 얼굴을 하나둘씩 떠올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일 작은 병원복도 주희에게는 아직 헐렁하게 맞았다. 소매와 바짓단을 몇 번이나 접어 올리고, 간이 약한 병원 밥도 맛있게 싹싹 먹고는 항상 힘차게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며 병원을 누비는 어린 주희를 보며, 같은 층에서 자주 마주치는 어른들은 남몰래 눈물을 훔치거나 혀를 차곤 했다. 주희가 밝게 인사할 때면 옆 호실을 쓰는 한 할머니는 어린 것이 딱하다며 안쓰럽게 남매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반응들이 주민은 정말이지 싫었다. 누나는 불쌍하지 않은데, 딱하지 않은데. 얼른 나아서 퇴원하고, 이 병원에서 나가서 나랑 같이 놀 건데. 엄마랑 생일 때 못 간 놀이동산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셋이서. 그러나 주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른들이 자신을 보며 무어라 얘기를 주워섬겨도, 주희는 밝게 인사를 한 뒤돌아서곤 했다. 그리곤 주민의 손을 잡고 오늘은 병원에서 숨바꼭질을 하자며 웃었다.
“할머니가 게임기 사줬는데, 내일 내가 가져올게. 만화책도 가져올까?”
“뭐어-?! 할머니 치사해! 난 안 사주고!”
“누나 것도 있어! 그런데 누나는 아프니까 아직 못 준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내일 올 때 내 것도 갖다 줘!”
주민은 알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주희는 꼭이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주민은 다음날 학교를 마친 뒤 잊지 않고 집에 들러 게임기를 챙겼다. 간식을 준비해 두고 낮잠을 자는 할머니의 눈치를 살핀 뒤, 자신의 가방 안에서 교과서를 빼고 주희가 좋아하던 만화책과 새 게임기를 넣었다. 살금살금 걸어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가다가, 식탁 위에 올라 있는 간식을 보고 주민은 잠깐 발을 멈추었다. 지금 먹고 싶지만 누나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 가져가서 같이 먹어야겠다. 엄마가 항상 주기적으로 사다 두는, 남매가 좋아하는 쿠키와 주스였다. 가방에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넣은 주민은 신발을 신고 병원까지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갔다.
혼자 버스를 타는 것도 어린 주민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엄마나 할머니와 같이 가야만 병원을 찾아갈 수 있었는데, 주희가 입원한 뒤 홀로 집에 남은 주민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곧 여러 가지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태권도와 영어, 글쓰기 등 여러 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학원차량으로 병원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던 지라, 주민은 점점 누나의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 병원으로 하원을 하거나, 아니면 버스를 타고 병원까지 스스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도 주민은, 가방에 누나가 좋아할 만화책과 간식, 약속한 게임기까지 잔뜩 챙긴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린애 혼자서 병원에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면, 오고 가는 어른들은 호기심, 또는 안쓰러움에 찬 눈으로 주민을 내려다보곤 했다.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혀를 차는 시선들도 있는 한 편, 어린애 혼자 누굴 보러 왔느냐며 상냥하게 묻는 어른도 있었다. 주민은 그럴 때마다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배꼽인사를 하며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주민은 그날도 역시, 까치발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서서 얌전히 층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렸다. 모르는 어른 두어 명과, 간호사복을 입은 어른 한 명이 3층에서 타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손에 든 차트를 빠르게 넘기는 것을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주민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튀어나가듯 걸어 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도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