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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37화 (37/166)

37화

그날은 남매가 13살이 되던 날이었다. 남매의 생일은 12월이었으므로, 어린 주민이 조금 더 성장해 얼추 소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할 때였다. 그날도 주민은 두꺼운 떡볶이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장갑을 낀 양손에는 쇼핑백을 잔뜩 들고 버스에 올랐다. 자신의 몫으로 받은 생일 선물들과 이르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들이었다. 그중에서 주희가 좋아할 만한 게임기나 장난감, 옷 들을 골라 쇼핑백에 담아 들고 온 것이었다. 팔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주희의 병세가 올해 들어 악화되면서, 엄마는 더 일에 매달렸고, 집에는 거의 들르지 않았으며,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한 분 늘었다. 작년 여름, 남매의 엄마인 유미경은 바라던 대로 이사회의 신임을 얻고 승진을 따내 부사장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더욱더 바빠진 스케줄을 조정하기는커녕,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악착같이 프로젝트를 열고 현장까지 돌며 모든 일을 체크했다. 그때의 그녀는 마치, 병원에 있는 주희를 위해 집에 남은 주민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오히려 주희와 주민, 남매 모두를 신경 쓸 수는 없다는 것처럼. 매주 방문하던 병원도 그 주기가 점점 늘어나 이제는 한 달에 한두 번 방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희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주희는 엄마를 이해해 주는 착한 딸이니까.

어른보다도 어른스럽게 굴어야 하고, 엄마가 힘들 때는 걱정시키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게 주희는, 첫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던 날, 마지막 검사를 위해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전부 밀어버렸다.

“누, 누나, 머리가 그게 뭐야?”

“선생님이 내일 하는 검사 때문에 깎으래. 원래는 더 일찍 했어야 하는 검사인데, 머리 깎으라고 하면 애들이 다 운다고, 나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한 거야.”

“울었어?”

“바보냐? 안 울었거든.”

부루퉁한 얼굴로 책상다리를 한 채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주희는, 그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아예 머리까지 밀고 모자를 쓴 모습을 보자, 왠지 주민은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바보야! 울면서 웃냐? 그리고 니가 왜 울어?”

“그, 끄흑, 그, 치만, 누나, 머리가…”

“웃을 거면 맘대로 웃어!”

“우, 웃긴 거 아냐! 그치만, 흐윽…”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우주민!”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잔뜩 성을 내는 누나의 모습에도, 주민은 동시에 터지는 눈물과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섭게 하려고 허리에 양손을 얹고 목소리를 크게 해도, 눈을 매섭게 부라려도, 주민의 키가 주희의 키를 따라잡은 후부터는 묘하게 그런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주희는 예전만큼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남매를 뼈저리게 할퀴고 지나갔다.

언제나 누나보다 작았던 주민의 키는 이제 주희보다 한 뼘은 커졌고, 항상 통통하던 뺨의 살도 갸름하게 빠져 아직 어린 모습이 남은 주희에 비해 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6인실을 쓰던 주희는 이제 2인실을 쓰고 있었고, 이번 검사 결과에 따라 혼자 병실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주민은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새로 들어온 간호사는 주민에게 여동생을 잘 돌봐주는 오빠라며 칭찬했다. 주민은 손사래까지 치며 정정했지만,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주희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 무반응이 주민의 마음을 더 서늘하게 했다.

주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아프고 나서부터, 정확히는 2년 전부터 주희의 성장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체형은 물론이고 신체의 모든 발달이 늦어지고 있었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들어가는 주민은 어릴 때보다 키가 훌쩍 커 170cm에 도달했는데, 주희의 키는 여전했다. 주민은 중학교 교복을 새로 맞추러 갈 때도 할머니와 동행했었다. 엄마가 장기 출장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누나, 머리는 다시 자라잖아. 자라면 다시 엄마한테 머리 묶어 달라 하면 되지.”

“흥, 오히려 긴 머리보다 난 짧은 게 더 낫거든? 긴 머리는 귀찮기만 하고.”

“그럼 지금이 더 좋아?”

“빡빡이는 별로지만… 그래도 씻을 때도 편하고 좋네, 뭐.”

팔짱을 낀 채 대답하는 주희를 보며 살며시 웃은 주민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들고 온 짐들을 주희가 누운 침대 위에 잔뜩 부려놓았다.

“이게 다 뭐야?”

“내일이 우리 생일이잖아! 친구들이랑 이모, 고모, 삼촌네가 전부 보내줬어. 이건 할머니가 사 준거!”

“…그럼 다 네 선물이네?”

“무슨 소리야, 누나랑 내 거지.”

주희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온갖 박스와 선물 꾸러미들 겉에 쓰인, 주민의 이름이었다. 그 어떤 것에도 주희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다. 쌍둥이의 생일은 크리스마스와 가까웠다. 그랬기에 그들의 친척이나 주변 지인, 친구들은 모두 쌍둥이에게 크리스마스 겸 해서 푸짐한 선물을 잔뜩 안겨주곤 했다. 엄마가 바빠지는 것과 반대로, 남매는 연말을 항상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항상 똑같은 선물을 두 개씩 사서, 각각 주희와 주민의 이름을 쓴 카드를 동봉해 보내던 친척들의 선물은 그들에게 일종의 관례와도 같았다. 한 해를 무사하고 건강하게 잘 보냈다는 의미, 생일을 축하하고 또 예수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미, 그리고 쌍둥이들 모르게, 그들의 엄마인 유미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내는 일종의 환심용 선물이기도 했다. 이미 이혼한 뒤 남남이 되어버렸지만 친가 쪽에서는 여전히 손자들이 눈에 밟혔는지, 주기적으로 미경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경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기업의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 친척들 사이에서는 항상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그저 콩고물이나 바라고 접근하는 치들이라며, 미경은 항상 친가에서 오는 연하장이나 선물은 아주머니를 시켜 모조리 갖다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런 미경의 약점을 알아낸 친척들은, 이번에는 아이들의 이름을 써 붙여 손자 조카들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라며 을러대곤 했다. 미경은 차마 아이들의 이름이 붙은 장난감들을 버릴 순 없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반 토막 난 친척과 조부들의 이름까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딴 건 몰라도 아이들 앞으로 오는 선물은 받겠다는 무언의 허락을 내리자,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친가의 선물공세는 더욱더 심해졌다. 그러나 그 잊지 않고 오던 선물들이, 올해부터는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정확히 말해, 주희의 이름이 붙은 선물은 오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손녀는 필요 없다는 뜻인가. 의아해하며 박스를 들고 온 주민을 안심시키며, 미경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언젠가, 주희가 입원한 지 꽤 되었던 때에, 시어머니였던 작자가 병원에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미경을 따로 불러낸 시어머니는 염치도 없는지 깐깐한 말투로 주희의 병실을 흘깃 건너다보며, 불치병 걸린 애한테 쏟아부을 돈이 있으면 애들 아빠와 다시 재혼해 사업을 나눠주길 요구했다. 미경은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곳은 병원이니까. 그리고 친자매나 다름없는 현서가 주희의 주치의로 일하는 곳이니까. 큰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성적으로 퇴장을 요구하자, 시어머니라는 인간은 혀를 차며 말했다.

‘안 그래도 애들 태어날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주희는 이제 가망이 없잖니? 원래 가문에는 장손이 필요한 거야. 너, 주민이는 제대로 키우고 있니? 주민 아빠하고 얘기해서 주민이라도 우리 쪽으로 보내든가 하렴. 애는 엄마 손에 커야 하는데 말이지, 원. 나라도 키워줄 테니까, 양육비 명목으로 좀 보내주면 좋고.’

미경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큰 소란에 강 선생이 달려와 둘을 뜯어말릴 정도로 미경은 처음으로 큰 소리로 화를 낸 것이다. 그 뒤로 친가에서는 마치 고사라도 지내는 것처럼 주희를 철저히 무시한 채 주민을 위한 선물만을 챙겨 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쌍둥이들은 모르는 이야기.

“…누나, 머리 짧은 게 많이 편해?”

“긴 것보다야 낫다니까. 왜? 너도 밀든가.”

“…그럴까?”

“뭐?”

네가 왜,라는 황당한 얼굴로 주희가 주민을 올려다보았다. 주민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어느새 덥수룩하게 자라 뒷목까지 덮을 기세였다. 앞머리도 길어 눈을 찌르는지 손으로 자꾸만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주민의 말에, 주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거, 또 누나 따라 하는 버릇 못 고쳤네.”

“아, 아니거든?”

“아서라, 아서. 몇 달 후면 중학교 들어가는 놈이, 머리는 갑자기 왜 밀어? 안 그래도 못난 얼굴 더 열심히 꾸밀 생각은 안 하고.”

“…우리 쌍둥이거든?”

“…시끄러!”

민망한지 또 덜컥 화를 내는 주희를 보며, 주민은 자신의 뒷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손끝에 닿는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부들부들하게 손바닥을 감쌌다. 누나와 똑같은 머리. 하지만 누나는 이제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렸으니. 주민이 한 고민에 빠진 것도 모르고, 주희는 새로 받은 선물들의 포장을 뜯느라 바빴다.

다음날.

항상 방문하던 시간에 주민이 오지 않자, 주희는 심심해진 나머지 링거를 끌고 병실을 나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인지라 간신히 하던 산책마저 금지 당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병원 내부는 돌아다녀도 되니까. 제일 꼭대기 층부터 1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놀이 따위를 생각해낸 주희는 슬리퍼를 끌며 카디건을 입고 병실 문을 열었다.

“누나?”

“엉? 뭐야, 우주민! 왜 이리 늦…!”

주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마주친 것은, 웬 털 모자를 쓴 주민이었다. 그런데, 털 모자라니. 안 그래도 머리숱이 많아 북슬북슬한 곱슬머리 주제에, 모자를 쓰고 오다니. 잠시 주민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주희의 입이 금방 벌어졌다.

“야, 너어…!!!”

“헤헤, 나 미용실 좀 갔다가 오느라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주민의 얼굴은, 마치 잘못을 숨기는 어린아이같이 반쯤은 웃으며, 반쯤은 눈치를 보는 얼굴이었다. 뒷목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에는 아무런 것이 잡히지 않았다.

“우주민, 너…!!! 진짜…!!!!”

“나, 머리 미니까 누나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볼래?”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지나가던 간호사가 살짝 놀란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쳤다. 마침 회진을 돌던 강 선생도, 복도를 막고 선 두 아이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주희, 왜 나와 있어? 어디 가려고?”

“선생니임…!!”

“이건 누구야, 으엑, 주민이니?!”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하하하!! 너희 이렇게 놓고 보니까 정~말 똑 닮았다! 아하하하하하!!”

급기야 배를 잡고 웃는 강 선생과 멋쩍은 얼굴로 선 주민을 번갈아 보던 주희도,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바보야!! 어우, 진짜!”

“나 많이 이상해?”

“너희 이렇게 보니까 미경 언니 핏줄을 빼다 박았네! 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는 두 여자 사이에서, 주민은 머쓱한 얼굴로 맨들한 머리를 긁으며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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