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영서야.
영서야. 눈 좀 떠 봐.
눈을 뜨고 나를 봐.
누군가의 목소리가 깃털 같은 무게감을 지니고 귓가에 내려앉는다. 영서는 한결 편안해진 숨과 가벼워진 몸의 감각에, 천천히 눈을 떴다. 깨질 듯하던 두통도,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과 이유 모를 분노도, 슬픔도, 모든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편안해.
이대로 조금만 자고 싶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잠을 잔 적이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일어나, 바보야!!! 지금은 자면 안 돼!!”
“으갸아악-!!”
별안간 귓바퀴를 울리는 고성에, 잠에 젖어 가물거리던 영서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이 떠지다 못해 엉겁결에 몸까지 벌떡 일으키자, 제풀에 놀란 듯 고성의 주인이 엄마야! 하며 옆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 보였다.
“너, 너는…”
아야야…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은, 다름 아닌 우주희였다.
말랑말랑해지던 몸이 단박에 긴장으로 굳어졌다. 날카롭게 세운 경계에 대해 무어라 해명할 생각도 없는지, 주희는 뾰로통한 얼굴로 영서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는 자면 안 돼. 피곤한 건 알지만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해야 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아,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너 데리고 가려고 한 것도! 거짓말한 것도! 그리고 네 친구한테 한 짓도!”
“내 친구라니… 너 또 누굴…?!”
“왜 그, 단발머리에 눈 크고, 네 이름을 막 부르면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여자애. 내가 만든 공간이 무너질 뻔했다고! 걔는 상도덕도 없다니?”
상도덕이니, 자신이 만든 공간이니, 전부 영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발머리에 눈이 크고 온 동네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여자애라면… 영서가 아는 한 그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혜리?! 혜리가, 이곳에 있어? 하지만 여기는 네가 만들어낸 공간이잖아. 어떻게?”
“정확히는 네 꿈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곳이지. 내가 만들어냈다…기보단, 음,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직접 만든 적은 없어.”
“직접 만든 적이 없다니?”
“한… 작년쯤인가. 갑자기 생겨났어. 나도 사실 자각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보니, 그냥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익숙한 공간이 있어서 자주 머물렀을 뿐이야. 그러다 또 우리가 만났던 그 꽃밭에서 있기도 하고, 그러다 너를 만났고…”
영서는 그 말의 진의를 가늠하듯 주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약간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 같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필사적이었다. 저렇게 겁을 먹었으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뭘까. 영서는 문득, 그 남자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혼들을 단순히 물리적으로 성불시키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 어쩌면, 이 애도 나에게 계속하려던 말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비록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갖고 장난질을 쳤을지 몰라도, 주희라는 아이의 이야기는 자신이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너는 이미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그리고 이 안에 있는 이상, 절대적으로 나에게 불리한 상황 아닌가?”
“…믿어. 그리고…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 전부… 해명할 테니까.”
영서는 한참 동안 주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긴 했다. 스스로 꿈에서 깨려고 노력이야 몇 번이나 해봤지.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억지로 영서의 혼을 붙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막는 게 너라면, 나는…
“그럼 납득되게 설명이나 해 봐. 그리고…나한테 보여준 기억들에 대해서도, 전부.”
주희는 쓰게 웃었다.
설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이미 주희의 기억의 조각들을 무수히 봤기 때문인지라, 영서도 대부분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주희는 간략하게 영서가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나,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 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여기 서 있는 자신의 또 다른 조각이자 분신과도 같은 사념체가 힘을 얻어 영서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럼, 네가 한 짓들이 아니라고?”
“…그건 내가 아니기도, 나이기도 해. 지금 여기서 너와 얘기하는 나조차도, 내가 나인 걸 확신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연히 인간이라면 자의식이라는 게…”
영서는 숨을 멈췄다.
주희는 여전히 씁쓸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너…그럼….”
“응.”
주희의 마른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죽는다는 건 그래, 영서야.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주희의 목소리에, 영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다.
이 몸도, 그래, 분명…
주희가 보여준 기억은, 그중에는 내 기억들도 섞여 있었다. 사고가 난 날, 난 확실히 죽었던 거다. 가까스로 소생했다던가, 무슨 엄청난 의료기술로 살려낸 게 아니라, 난…
이미 권영서는, 그때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그런데 난 왜 살아있지?
영서는 다시 질문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 기분, 언젠가… 느껴봤었다. 그래, 유혜리. 혜리도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했었어. 그런데 그 남자가…
“일직차사…”
“…그 남자를 조심하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영서야.”
“하지만 아저씨, 아니 일직차사는 오히려 날 살려줬어. 어째서…”
“살려준 게 아니라면?”
뭐?
“살려준 게 아니라면? 그리고, 너에게 숨기는 게 있다면?”
“…그런…”
“…영서야, 난 말이지. 아주 오래전부터 친구가 필요했어. 건강한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아프다는 건, 그 아픈 시간만큼 내가 죽어가는 걸 느낀다는 뜻이야.”
영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희를 응시했다. 눈치채지 못할 새에, 어두컴컴하던 시야가 환히 밝아졌다. 이전에 보았던, 그리고 주희의 기억 속에서도 보았던 그 풍경이었다. 꽃이 만발하고, 하늘은 맑고, 공기는 따스하며, 잔디가 부드러운 곳.
아무리 달리고 굴러도, 그 어느 것 하나 상처를 낼 것 같지 않은 곳.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 나도 저기, 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랑 똑같았던 거야. 내 이름도, 내가 누군지도,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계속 계속 걸어서 저 너머로 가려고 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어.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몰라, 그냥…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났어. 나, 아직은 살아있구나. 아직 죽은 게 아니구나.”
영서와 주희는 어느새 강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잔디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은 주희의 맨발이, 부드러운 잔디 사이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여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어. 이상하지, 이렇게 기분 좋고 편안하고 따뜻한 곳인데… 왠지 여기 있으면 영영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혼자 계속, 혼자서… 여기서 기다렸어. 누군가 말이 통할 사람, 나 같은 사람이 오기를. 나처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사람이 오기를…”
영서의 이마 위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이상해. 해가 없는 곳인데도 이렇게 밝다니. 잔디의 주변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리며 즐겁게 뛰어놀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주희가 가리킨 강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빛만이 존재했다. 영서도 주희도, 강 너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나 있지. 중학교 졸업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사실 중학교도 못 갔거든. 그쯤부터는 증세가 악화되기만 해서 아예 외출도 금지 당한 마당에, 당연히 등교는 불가능하다더라구. 나중에는 병원 뒤뜰을 산책하는 것조차도 못하게 됐지.”
주희의 눈은 어딘가 꿈결처럼 젖어 보였다. 똑같은 자세로 나란히, 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어딘지 웃긴지, 주희는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영서를 보며 실없이 웃기도 했다. 영서는 간신히 힘을 짜내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그냥… 그랬어. 내 인생의 반은 병원에서 보낸 거니까, 내가 아는 건 그런 풍경뿐이었던 거야. 계속 아프기만 하고, 누군가의 걱정거리만 되고,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가족들이라면… 부모님?”
“응. 엄마랑 남동생 하나.”
“…아, 그럼 혹시 남동생 이름이.”
“맞아. 우주민. 다시 만난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동생 이름으로 둘러댔지.”
“왜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어?”
“몰라서 물어?”
고개를 든 주희의 눈에 약간의 실망감과 책망하는 빛이 어렸다.
“내 ‘이름’, 네가 알면, 정말로 난 무사할 수 있었어?”
확신할 수 있냐는 듯한 물음에, 영서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 사실이다. 영서는 실제로 주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몇 번이나 명부를 꺼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단순히 꿈인 것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오류가 있었던지 명부를 불러오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아마, 이 애의 ‘진짜 이름’을 알아야만 가능했었던 걸지도.
“하지만 이제는 알잖아. 우주희,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난 네 몸이 필요했던 게 아냐.”
주희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딘가 고집스레 강 너머를 바라보는 얼굴에, 영서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너는 나랑 약속했어.”
내… 기억. 영서는 입안으로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혼자 이곳을 지키던 내게, 네가 나타나서 약속해 줬어. 같이 가주겠다고. 무서워하지 않게, 내가 심심하거나 길을 잃지도 않게, 네가… 네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어.”
주희는 이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나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영서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