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39화 (39/166)

39화

얼마나 그렇게 앉아있었을까.

주희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풀과 꽃잎들이 붙은 병원 복 바지를 탁탁 털어냈다. 어디 가려고? 눈으로 묻는 영서에게 손을 내민 주희가 조그맣게 웃었다.

“너는 네 할 일을 해야지.”

“내 할 일?”

“응, 너만이 할 수 있는 일.”

영서는 잠자코 주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의아한 영서의 얼굴을 뒤로하고 주희는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이 강 쪽이라는 것을, 영서는 금방 알아채고 주희의 팔을 붙들어 멈추게 했다.

“잠깐만, 너 뭐 하는 거야?”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저곳으로 넘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 거, 기억하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을 뿐, 넘어가면 안 되는 게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영서야.”

주희는 잔잔한 얼굴로, 자신의 소매를 틀어쥐고 있는 영서의 손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살포시 얹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개입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마음이 영서의 얼굴에서 복잡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도 한때는, 사는 게 정말 고통스럽고 지겨웠어. 그래서 얼른 죽어버리고 싶다, 이렇게 살 거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어.”

주희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참 건방진 생각이었던 거야.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나를 살려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돈,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

“…우리 엄마한테… 나는 괜찮았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 마디만 전해줄 수 있어?”

또다.

또 이런 상황.

이렇게… 누군가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을 봐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게.

영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식의 부고를 알리며, 마지막 유언이랍시고 그들의 말을 전해주면, 자식 잃은 어미의 얼굴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더욱더 무섭고 슬픈 것은, 그 얼굴에 자신의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매일 기도하면서 나한테 그랬어. 미안하다고, 이렇게 낳아서 미안하고, 이렇게 아프게 해서 미안하고, 이렇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하나도 미안할 것 없는데. 엄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주희의 목소리는 가볍고 잔잔했으나, 이미 그 흰 얼굴에는 어느새 하나둘씩 떨어진 눈물방울로 점점이 얼룩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민이한테도… 약속 못 지켜서, 누나가 미안하다고 전해줘…”

“…주민이…는…”

주희의 얼굴 위로 얼룩지던 울음은, 어느새 파도가 치듯 얼굴을 아예 덮어버렸다. 어깨를 떨며 목 놓아 우는 주희의 울음소리는, 마치 태어난 이후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을 토해낼 듯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턱과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쁜 숨을 들이쉬던 주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영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속, 이야. 주민이는… 아마 이런 얘기, 안 믿을 거야. 우리 엄마도 그렇고. 이거… 내가 자주 하던 거야.”

주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영서도 홀린 듯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어린애들이 소꿉장난하듯 손가락을 걸었다. 뼈마디가 가는 주희의 손가락과 영서의 손가락이 맞닿자, 눈물을 닦던 주희가 반쯤 웃음을 머금고 손을 두 번, 흔들었다. 새끼손가락을 건 채 엄지를 내미는 모습에, 영서도 엄지를 내밀어 꾹 눌러주었다.

“꼭, 꼭, 도장 꾹. 영서 너도, 나랑 약속한 거다? 알겠지?”

“…꼭 어릴 때 소꿉장난하는 것 같네.”

“…우리 엄마랑 주민이한테, 3년 동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다 까먹어버렸네. 진짜 바보다, 나…3년 동안… 그렇게 혼자서, 눈 뜨면 첫마디를 뭐라고 할지, 엄마랑 주민이에게 뭐라고 할지, 전부… 정해뒀는데. 이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

“…주민이 자식, 마지막까지 자기 걱정한다고 잔소리할 것 같네…하지만 누나니까, 어쩔 수 없이 동생이 걱정된단 말이지… 그 녀석 나 말고 친구도 없고.”

주희는 눈물로 젖은 눈가를 비비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영서의 귀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귓속말을 했다. 영서는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만 그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실컷 울고, 하고 싶은 말도 전했고… 이제, 끝났어?”

“…응.”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말해.”

“마음의 준비라니?”

주희는 마치 언제 목 놓아 울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건 지난 3년 동안 이미 다 끝냈거든!”

***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팔짱을 풀고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으며, 소리 없이 벽을 통과해 다시 병원 건물의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가볍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영서가 누워 있는 병실이었다. 영서는 여전히, 낮잠이라도 곤히 자는 듯한 얼굴로 규칙적인 호흡을 뱉고 있었다.

-이봐, 유혜리, 때가 됐어. 나와.

‘네? 그치만 아직 영서를 못 찾았는데요?’

-영서는 됐어. 이제 스스로 나올 거다. 영서가 깨어나기 전에 얼른 안 나오면 그대로 갇혀버린다?

‘자, 잠깐만요! 이, 이거 어떻게 나가더라?!’

다급한 혜리의 목소리가 이내 희미하게 가늘어지더니, 남자의 앞에 누운 영서의 이마에서 자그마한 빛 무리가 떠올랐다. 그 빛은 주인의 힘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약하게 일렁이는 빛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본원화本源化도 할 줄 모르다니, 남자는 어느 세월에 교육 시켜 일 인분의 몫을 할 수 있게 시키나 싶어, 이마를 짚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틀비틀 흘러나온 빛 덩어리가 남자와 영서의 침대 사이로 이동하더니, 작게 바람이 일면서 지친 표정의 혜리가 나타났다.

“저, 지금 목숨 걸고 갔다 온 거 맞죠?”

-쯧, 그 정도 일 가지고 그렇게 기가 빨려서 어디에 써.

“으익…! 그래도 제가 들어가서 영서를 찾은 건 맞잖아요!”

-…! 쉿.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는 혜리에게 손을 들어 보인 남자가, 굳어진 표정으로 영서의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 미묘하게 편해진 얼굴이었다. 여전히 느슨한 얼굴로 잠에 빠진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권영서, 알아서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있나 보군.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미한 웃음이 그의 입술에 걸릴락 말락 했다. 너는 항상 내 예상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넘는구나.

-원인의 본체는 찾아냈어. 자세한 건 깨어난 영서에게 들어야겠지만, 아마 501호에 서린 영혼의 짓일 거다.

“501호라면… 간호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3년째 코마 상태라던… 장기 입원 환자가 있는 병실 맞죠? 나이도 어리다고 들었는데…”

-…뭐, 이 땅에 태어난 것들에게 태어난 순서는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들 하잖나?

그리고 네가 할 말은 아닐 테지. 흘긋 자신을 스쳐간 눈빛을, 혜리는 단숨에 캐치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자신을 혼내는 듯한 어투였다.

“…그보다 영서는요? 언제쯤 깨어나요?”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영서의 귀문鬼門이 곧 닫히려고 하고 있어. 닫히고 나면 머지않아 눈을 뜨겠지.

“귀문…”

혜리는 무언가 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던 서늘하면서도 미묘한 눈길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눈빛은, 이상하게도 혜리에게는 책망 내지는 무언가 불쾌하거나 동정하는 것을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느껴져서, 얼른 눈을 뜬 영서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해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판기의 버튼을 눌렀다.

덜커덩하는 부피감과 무게감이 기계 내부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면서, 발치에 위치한 입구 덮개 사이로 음료 캔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음료를 꺼낸 뒤 마개를 따 단숨에 들이킨 해강이, 그대로 캔을 확 찌그러트린 뒤 자판기 옆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 넣었다. 휴대폰을 꺼내며 복도를 걸어 나가던 해강의 시야에 익숙한 뒤통수가 잡혔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짧은 잿빛의 머리칼… 카디건을 입은…

“엥? 너는 그때 그!”

심심하던 찰나에 마침 익숙한 얼굴을 만나자ㅡ비록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마주친 것이라도 해강에게는 전부 ‘아는 사람’으로 통하는 것이다ㅡ해강은 손을 들어 인사를 아는 척을 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아챘는지,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와 흰 얼굴은 해강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어라? 너…”

주민은 자신을 부른 사람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너… 울어?”

약간 머쓱한, 그리고 조금 당황한 듯한 해강의 목소리가 반쯤 작아지며 물었다. 괜히 크게 아는 척을 한 게 미안해서였으리라. 아니, 애초에 아는 척을 하고 말고의 사이도 아니었지만.

“…너는…”

“아,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봤는데. 그런데… 그, 무슨 일…”

있나? 눈치를 보며 뒷말을 생략하자, 주민은 눈가가 한층 더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주민의 안 그래도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쳐진 눈은 금방까지 한바탕 울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방금 전도 막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차마 닦지 못한 눈물은 볼과 턱을 타고 흘렀을 것이고, 그 자국은 계속해서 새로운 눈물길로 지워졌을 것이다. 눈은 물론, 코와 뺨이 붉어질 정도로 운 주민의 얼굴은, 정제된 어른의 슬픔이 아닌,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이 무너지듯 울어젖혔을 때나 나올 법한 얼굴이었다. 해강이 봤었던,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스쳐갔던 얼굴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얌전한 얼굴이었다. 울고 떼쓰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꼭 말을 잘 듣는 모범생 아이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마주한 해강은,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과, 그 아이가 5층에서 내렸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얼굴 상태와 메마른 목소리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은 그 애의 상처만 더 들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나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주민의 젖은 눈이 해강을 향했다. 그러나 초점은 해강이 아닌 그 너머의 어딘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죽었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