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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40화 (40/166)

40화

주희의 눈이 얼마간 허공을 맴돌다가 이내 영서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둘이 눈을 맞추고 서 있던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영서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비록 그 끝이 영서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대답해 줘.”

“뭔데?”

영서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말을 골랐다. 주희의 손끝은 이미 반쯤 투명하게 물들고 있었다. 소매로 슬쩍 손을 가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영서는 입을 열었다.

“일직차사… 그 남자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했지. 예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너랑 똑같은 얘기를 했었어.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왜인지 말을 회피하는 것 같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 그 남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는 알아?”

“…그 애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왜 말을 아꼈는지는 알겠네. 결과적으로 말하지만, 미안해 영서야. 나는 알려줄 수 없어.”

“왜?”

“만약에 내가 살 수 있었다면, 뭐, 애초에 틀린 가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다시 그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알려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말끝을 흐리는 주희의 손은, 점점 더 투명해져 이제는 병원 복의 소매마저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주희는 이젠 아예 양손을 뒷짐 지듯 뒤로 돌렸다.

“난 이제 그의 눈 밖에 벗어난 짓을 하면 안 될 것 같거든. 지금까지 충분히 잘못한 것들도 많고. 헤헤…”

“잘못…”

“그래, 인과율 말이야.”

인과율. 그것은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또는 시공간이 다른 무언가에게 영향력을 뻗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 영서도 물론 알고 있었다. 주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동안 여러 영혼을 성불시켜온 영서지만, 성불된 영혼이 그 뒤로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알 범위가 아니라는 식으로 남자가 굳이 알려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영서도 한두 번 궁금하기만 했을 뿐 관심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약속대로 명부를 채우는 것만이 원래의 계약이었으니까.

“마지막까지 별 도움이 못 되네. 미안.”

“아냐, 괜찮아.”

주희는 미안하다는 듯 엷게 웃었다. 항상 그 앳되어 보이던 어린 얼굴이, 이상하게 처음으로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내주고 나면, 너도 곧 정신을 차릴 거야. 아~ 왠지 부럽네.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니.”

끝까지 장난스러운 주희의 말투와는 다르게, 그 애의 얼굴에는 옅은 긴장과 나지막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영서는 입을 앙다물었다. 왠지 코끝이 매웠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네.”

주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영서도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린 뒤, 주희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나… 이만 가볼게. 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어, 영서야.”

진심으로 즐거웠다는 듯, 주희는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강에 발을 담갔다. 그러나 주희의 가는 발목에 닿는 것은 물살이 아닌 안개였다. 강에 발을 디디는 자는, 실로는 물이 아닌 안개를 건너 강의 너머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리라.

이제 주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니 자신의 혼과 백이 생겨났던 곳으로.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영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끝은 아니야. 주희는 그저, 다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식이 언젠가 끝날 무렵, 그 애도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영서는 믿었다.

“…잘 가, 영서야.”

“너도… 잘 가.”

흰빛과 함께 주희의 몸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무렵, 차마 잊을 수 없을 목소리가 영서의 귓가에 작게 메아리쳤다.

“안녕.”

주희의 몸을 감싼 빛이 순간적으로 환히 빛나며 주변을 더욱 더 희게 점멸시켰다.

영서는 퍼져 나오는 눈부신 백색광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안녕.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곳에서.

고통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없는 곳에서.

부디 평안하기를.

영서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주민의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기억들이 동시에 산발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는 것들,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것들, 모두 누나와 함께 했던 기억들임을 주민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누나는 죽은 걸까. 그렇다면 나도 죽은 걸까. 우스운 생각이지만 주민은 어려서부터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누나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쌍둥이라고는 해도 주민은 누나인 주희를 유별나게 따르고 의지하는 동생이었다. 어쩌면 그런 점에 안심하고 엄마도 우리만 남겨두고 바쁘게 다니셨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누나는 내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눈을 뜨지 않은 날부터, 3년 동안 내 세계도 똑같이 멈춘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누나의 시간이 멈춘 것과 다르게 내 시간은 야속하게도 착실하게 흐르고 흘렀고, 나는 조금씩 누나와 달라지는 나의 얼굴과 신체를 볼 때마다 이유 모를 죄의식과 부채감에 휩싸여야 했다. 왜 누나였을까, 누나는 나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누나가 아닌 내가 아팠더라면, 그래서 내가 죽었더라면…

엄마는?

그리고 누나는, 죽은 나를 두고 어떤 얼굴을 했을까.

적어도 나보다는 덜 볼썽사납게 울고, 금방 털어냈을 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하면 되는지 항상 누나가 알려줬는데.

어떤 얼굴로 울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가르쳐줘, 누나.

가지 말고, 내 옆에서 가르쳐줘.

제발.

“…마세요!”

“…세요!”

“선생님! 이쪽…”

“…서야!”

“영서야!”

주민은 눈을 떴다.

잠시 기절이라도 했던 걸까.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주민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항상 반쯤 어둡던 병실은 낯설게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누나의 주치의인 강 선생과 지친 기색의 간호사들, 그리고 그들이 막고 있는 것은 막무가내로 병실에 들어오려 옥신각신하는 한 남자애였다.

“영서 학생, 아무리 위중한 환자였다지만 이러는 거 아니야! 선생님 말 들어!”

“잠깐이면 돼요, 제발요! 약속했단 말이에요!”

“어어, 강 선생님! 어깨 너무 누르지 마세요! 걔 방금 눈 뜬 애에요!”

“영서야, 왜 이러는 거야!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응? 의사쌤 불러올까? 아니, 아니지, 아줌마랑 아저씨한테 먼저…!”

황망하게 그들의 몸싸움을 지켜보던 주민이 입을 열었다.

“저…”

“주, 주민아! 그래, 얘네 좀 말려보렴! 난데없이 남의 병실에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서, 니네 누나 좀 봐야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억지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주민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커튼이 쳐진 침대 쪽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주희의 침상과 그 몸이 아직 거기에 있음을 짐작게 했다. 하지만 항상 규칙적이면서도 차갑게 병실을 울리던 기계의 소리와 심폐 소생 장치의 소리, 작은 주희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모든 생명유지 장치들의 소리는 조용해져 있었다. 누나의 목소리가 아닌, 그런 장치와 기계들이 돌아가며 내는 소음이 그래도 누나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소리라고 느꼈던지라, 주민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꿈이 아니구나.

주민의 황망한 얼굴을 눈치챈 해강이, 영서를 말리는 간호사들을 막아서다 말고 냅다 입을 열었다.

“부탁이야! 영서를 믿어줘! 네 누나, 우주희 맞지? 주희에게 부탁받은 일이래.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허락해 줘!”

“해강 학생, 조용히 못해?! 지금 유족 앞에서 무슨…!”

“…좋아요.”

“주민아…!”

주민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입안은 물론 목구멍까지 가시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눈은 피로했고, 그토록 울어서인지 시야는 더욱 흐리고 눈은 무거웠다. 그러나 주민은 힘겹게 눈을 똑바로 뜬 뒤 입을 열었다.

“…영서라고 했지.”

영서라고 불린 남자아이의 표정이 느슨해지며, 억지를 부리던 몸이 엉거주춤 서는 것이 보였다. 누나와 똑같은 병원 복을 입은 아이는 방금 전까지 위중한 상태였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안색이 창백했다. 그러나 눈은 누구보다도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할까.”

***

“…잠깐이면 되니까, 모두 나가주세요. 강 선생님, 이따가… 제가 선생님 사무실로…”

“안 돼, 주민아. 얘네랑 아는 사이니? 아니, 아는 사이여도 안 돼. 지금 난 너희 남매 대리보호자야. 어머님께는 연락 넣었어, 금방 오실 거니까 너도…”

강 선생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병실 문을 막아선 영서를, 정확히는 영서 앞을 막고 나선 해강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강 선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순히 주희의 주치의라서기보다, 강 선생은 남매에게 의사이기 이전에 친척보다도 자주 왕래하며 지낸 이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주민의 몸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나 강 선생은 그 말은 끝내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냥 삼켜버렸다.

“…누나한테는 손끝도 못 대게 할게요. 괜찮아요. 정말로.”

그러나 강 선생은, 지금 주민의 목소리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미묘한 확신이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오열하다 못해 정신을 놓고 쓰러진 아이인데, 눈을 뜨자마자 저렇게 초연한 얼굴로 또렷하게 사람을 바라보다니.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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