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야, 권영서!”
“…어, 어?”
“너는 방학 때 뭐 하냐?”
조금 전까지 떠들던 옆 분단 아이들이었다. 같은 반 학우들 이름이야 전부 외운지 오래지만, 학기 초에 전학을 온 영서는 학기가 끝나갈 무렵까지 이렇다 하게 친해진 친구가 없었다. 아직 전학생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고, 이미 1학년부터 끼리끼리 친해져서 올라온 지라 영서가 그 무리에 끼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서도 그다지 그들 무리에 끼고자 하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에. 얘는… 이름이 뭐였지, 슬쩍 내려다 본 시선 끝에, 말을 건 아이의 명찰이 보였다. 김수현.
“야, 영서 공부하잖아! 애한테 친한 척하네, 김수현~”
“나랑 영서 친하거든? 지난달에 짝꿍이었잖아, 짜식아.”
항상 농구를 하느라 점심만 먹으면 튀어나가는 수현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려 있었다. 학기 초에는 분명 조금 더 흰 편이었던 것 같은데. 수현은 항상 왁자지껄한 무리의 가운데가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고 남들의 이목을 끄는 누구 씨가 생각나기도 했다. 영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나야 뭐, 나도 학원 다닐 것 같은데…”
“너도? 아 맞다, 영서 너 사거리에 있는 청솔 학원 다니지? 얘도 거기 다닌다? 야, 구민석! 너도 청솔 다니지?”
“어. 근데 영서는 A반이라 나랑 얼굴 볼 일이 없었음.”
“진심?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은 반 친구인데 학원에서 한 번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냐? 야, 영서야! 구민석 한 번도 못 봤어?”
“아, 그러게… 민석이랑은 영어도 수학도 반이 다 달라서.”
“권영서 공부 잘하잖아. 야, 김수현, 너도 구민석이랑 같이 청솔이나 다녀라. 대학 안 갈거임?”
“아, 안 그래도 엄마가 난리야~ 청솔 근데 빡쎄지 않냐? 영서야, 어때? 거기 숙제 존나 많잖아.”
수현의 시선이 영서가 풀던 문제집으로 내려갔다. 학원 마크가 찍힌, 시판용 교재가 아니라 학원에서 자체 제작하는 문제집인지라 표지부터 큼지막하게 푸른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영서는 그 시선에 풀던 문제집을 건넸다.
“한 번 볼래? 내 거는 A반 거라 이 정도 난이도고, 다른 반은 이 정도까지 심화과정은 아닐 거야.”
“오, 봐도 돼? 땡큐~”
학원을 알아본다는 말은 진짜였는지, 대충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고 건넨 문제집을 수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는 처음부터 책장을 넘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 존나 어려워~ 인상을 찌푸리며 반쯤 웃는 얼굴로 내뱉은 수현이 골몰한 얼굴로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을 보며, 영서는 문득, 같은 반 친구와 이렇게 길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 본 지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이 학교에 온 후로는 처음이라고 느껴졌다. 시작부터 꼬였던 전학 생활. 그리고 항상 이유 모르게 등줄기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기분 나쁜 직감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항상 약간의 긴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물. 남중 고등학교는 영서에게 그런 곳이었다. 그랬던 지라 더 친구들과 친목을 다지는 것 따위는 상상도 못 했던 걸 수도. 공부에 매진하며 학교에 친한 사람이라곤 해강밖에 없었던 외로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영서는 결심했다. 그래, 이제라도 친구를 만들자. 원래 학교에서도 꽤 여러 친구들과 알고 지냈던 영서였다. 나도 친화력 하나는 자신 있는 편이라고! 영서는 방학 전에 친구들을 사귀고, 여름 방학을 학원에서만이 아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며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그래, 할 수 있다, 권영서!
…하지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영서야, 뭐해~? 엉? 이거 영서 책 아니냐?”
갑작스럽게 등장한 해강의 모습에, 영서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아는 척을 했다. 외에도 반에서 저들끼리 떠들던 아이들도 저마다 해강에게 아는 시늉을 해댔다. 등장 한 번도 조용히 하는 적이 없지, 저 녀석은. 영서는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헤실헤실 웃는 낯으로 뒷문에서 영서의 자리까지 빠르게 다가온 해강은, 남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영서의 책상에 딱 붙이고 앉았다. 옆에 앉으라고 한 적 없거든!!! 영서는 소리치고 싶었으나, 앞으로의 원활한 친목 도모를 위해 미래의 절친들 앞에서 그런 사회성 없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네, 네가 여긴 왜 왔어?”
“왜긴, 우리 반 담임 나가고 영화 본 대서, 재미없을 게 뻔하니까 몰래 나왔지~ 뭐 하고 있었어? 숙제? 이거 이번 주까지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 주해강. 너도 영서랑 같은 반이냐? 올~ 짜식 공부 좀 하네?”
“영서랑 같은 반 하려고 기말고사 때 존나 열심히 했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해강을 보며 영서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자, 수현은 그런 둘을 번갈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학, 이거 개 골 때리네! 야, 주해강, 너 권영서 좋아하냐?”
“아니거든??!!!”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지른 것은, 바로 영서였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책상까지 쾅 치며 부정의 비명을 지른 영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수현이, 이내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야, 장난이지, 장난. 이거 보아 하니까 주해강이 맨날 따라다니고 귀찮게 해서 영서가 칠색팔색을 하네, 맞지?”
“아, 그, 그렇지! 하하, 장난이지 장난! 그렇지, 해강아? 우린 그냥 어쩌다가…”
“맞으면?”
뭐라고? 영서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해강은 영서의 책상에 턱을 괸 채 동그란 눈으로 수현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미묘하게 웃음기가 가신 얼굴. 해강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영서는 무어라 변명의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맞으면 네가 어쩔 건데, 김수현.”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에, 낄낄대던 수현과 주변 패거리들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서는 혼란스러웠다. 이놈이 갑자기 왜 정색을 해? 미쳤나?
“마, 맞긴 뭐가 맞아! 아하하! 해강이도 참! 야, 주해강 내가 어제 학원 갈 때 닭꼬치 안 사줘서 삐졌구나? 아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꼭 같이 가서 사준다, 내가! 됐지? 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목소리와 필사적인 표정으로 해강과 수현의 사이로 끼어든 영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해강의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었다.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엉키면서, 해강의 표정도 동시에 느슨해지는 것을 본 영서가 수현에게도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야, 수현아, 너, 너도 우리 학원 같이 다닐래? 더 같이 많이 다니면 좋지! 하하하!”
“뭐… 일단 생각 좀 해보고? 엄마랑도 상의해야 하니까…”
“그으래! 그렇지 참! 어머니한테 말씀도 드려야 하고! 하하! 같이 다니게 되면 내가 떡볶이 쏠게! 그 앞에 진짜 대박 맛있는 분식집 있거든? 알겠지?”
“엉, 그래…”
하늘이 도운 것인지, 아니면 염라대왕이 도운 것인지. 마침 영서가 어색하게 분위기를 녹이자마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와와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학생들 덕분에 팽팽하던 분위기는 더욱 시들해져, 수현의 친구들이 수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눈짓했다. 먼저 간다며 영서에게 눈인사를 한 뒤 수현과 친구들이 교실을 나가고 나서야 영서는 참았던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쉴 수 있었다.
“…야, 주해강. 너 미쳤냐? 갑자기 왜 거기서 정색을 해?”
“…영서야, 너 김수현이랑 친해?”
“친하고 자시고 간에 오늘 거의 처음 대화해 봤거든? 그리고 그냥 우리 학원 관심 가지길래 내 교재 보여주면서 잠깐 얘기한 거야. 아니다, 내가 왜 이런 설명을 하고 있지.”
“친하게 지내지 마.”
영서는 미치겠다는 눈으로 해강을 내려다보았다. 해강은 여전히 아까의 그 동그란 눈으로, 책상에 턱을 괸 채 수현이 나간 뒷문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김수현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영서야.”
“왜?”
“….”
“그냥, 이라고 하지 마라. 타당한 이유 아니면 안 들어줄 거니까.”
“…영서 바보.”
“뭐? 내가 너보단 똑똑하거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의자를 끌며 일어난 해강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담담하게 말했다. 영서는 어딘가 분하면서도, 방금 전까지 예민하게 반응했던 해강의 표정과, 또 곁에 있던 영서만이 느낄 수 있었던 해강의 불쾌감이 그대로 떠올라 그저 자리에서 따라 일어날 뿐이었다. 어우, 골 아파 진짜.
그래, 일단 밥이나 먹자.
영서는 고개를 내저으며 복도로 나섰다.